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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ly You Aug 19. 2020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라고 쓰고 나비효과라 읽는다


-저.. 비혼주의자거든요!!!


-뭐..라고?


-저는 완전 비혼주의자에요. 결혼이 제일 싫고 결혼 왜 하는지 모르겠고 그냥 그래요. 안 해봤지만 결혼이 인생의 무덤인건 알겠더라고요. 남자들은 연애 하면 다 결혼하자고 조르더라고요. 그래서 헤어진 적이 몇 번 있어서요. 


나름 심각한 나의 항변에 구불머리 회장은 갑자기 폭소가 터졌다.

한참을 푸!하!하!하! 하면서 웃더니


-역시나 항상 신선해, 아주 특이한 캐릭터야.


하면서 좀처럼 웃음을 멈추지 않는 것이 아닌가.


난 진지했는데.


구불 회장은 한참을 웃더니 슬며시 인상을 쓰면서 한 마디를 던졌다.


-그거 은근 자기 자랑이지? 아니, 대놓고 자기 자랑이네?

-아닌데요.

-맞잖아. 뭐 연애만 하면 남자들이 결혼 하자고 목 메서 너가 찼다, 뭐 그런 자랑 아닌가? 그래서 지금 너도 똑같을거면 결말도 똑같을 거니까 아예 시작도 하지말자, 딱 그런 말이 하고 싶은 거 같은데?


헛.


구불머리 회장은 의외로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사람인 게 분명했다. 듣고 보니 절대 틀린 말이 아니라, 갑자기 민망해져 뭐라고 해야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구불 회장이 한 마디를 더 보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내가 맘에 든 거지. 그래서 너도 지금 나 떠보는 거잖아.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봐봐. 니가 만약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하면 되잖아. 다른 사람 같으면 비혼주의자니 뭐니 그런 말을 거절의 표시로 에둘러 했을 수도 있어. 근데 내가 봐온 너는 그럴 사람은 아니야. 어딜 가서 싫으면 얼굴에 싫어요 싫어요가 왕복 8차선 도로로 깔리는 수준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가 비혼주의자라고 한 건, 내가 결혼하자고 치근덕거리지만 않으면 나랑 만날 맘이 있다는 말을 다르게 한 거잖아. 


비혼주의 어쩌고는 순식간에 튀어나온 헛소리 같은 대답이었지만, 왜 그런 소리를 한 건지는 나도 몰랐던 내 마음인데, 듣고 보니 완벽한 정답인 것 같았다. 공대 박사를, 공대생이라고, 너무 얕본 걸까?


그런데 정말 재미난 건, 그때까지도 조금은 갈팡질팡하던 내 맘이 그의 촌철살인에 완전히 무장해제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구불머리 회장은 내가 생각했던 거 보다 더 괜찮고 더 비상(?)한 사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허..... 다 맞는 말씀인 것 같아요.

-그럼 허락의 뜻으로 받아들일게.


구불 회장은 이미 거의 식은 핫초코를 쭈욱 원샷하더니 맥주가 차가울 텐데 안 춥냐며 갑자기 내 손을 덥썩 잡았다. 벌써 손을 잡다니...? 매섭게 그를 보려는 순간, 그의 표정을 보니 싱글벙글이었다. 

그는 정말 감동한 듯한 눈빛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진짜 아까 너 말 듣고 너무 놀랐는데, 나도 비혼주의자거든. 비혼이라기보단.. 안티 매리지라고 할까? 결혼이란 제도가 좀 웃긴 것 같은 제도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어. 그래서 그런데 나도 지금 말할게. 나는 결혼이라는 제도의 불신론자라고. 호주 사람들은 보면 결혼, 연애는 다 다른 이야기잖아. 그래서 막상 프로포즈 받을 때 진짜 울기도 하고. 그런데 한국은 아니더라고. 연애 시작하면 늘 '결혼하면'이라는 전제가 붙고, 아직 거기까지 생각해 본 적 없다고 하면 싸움이 나고, 헤어져야 하고. 우리의 연애는 어떤 모습일 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런 전제는 안 따라오겠다. 


처음에 본인도 비혼주의자라고 했을 때 그 순간에는, 그냥 내 비위를 맞추려고 나도 비혼이야~ 라고 한 얘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길어진 그의 이야기를 듣자 나 듣기 좋으라고 한 이야기가 절대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결혼에 관한 이야기는, 정말로 내 머릿속을 들여다 보고 한 말인 것만 같이 내가 평소에 결혼에 대해 해 왔던 생각과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너무 신기했다. 구불 회장은, 평소에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그거 진짜 내 스타일이었다.


 





두 비혼주의자는 이렇게 처음 만났고,

시간이 흘렀다.


비혼주의자들은 영혼의 단짝 같았다. 그렇게 만나면서도, 둘 다 결혼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너무나도 잘 맞았다. 이렇게 생각이 같을 수가!


우리는 매일 오늘만 살자. 오늘만 사랑하자. 


그 오늘엔, 오늘만 사는 사람들에겐, 결혼이란 너무나 미래의 것이라 좀처럼 끼어들 틈이 없었다.


하지만,

둘 다 졸업을 앞둘 무렵, 어느 날, 이 비혼주의자들은 이상한 이유로 갑자기 결혼이라는 걸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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