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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ly You Aug 15. 2020

브리즈번에 다시 도착.

긴 여정의 시작이 된 그날

부산을 힘차게 날아오른 비행기는 홍콩에 잠시 섰다.

홍콩에서 딤섬과 완탕면을 사 먹으며 다시 브리즈번에서 남은 날들을 세어보았다.


졸업까지는 앞으로 1년.


그때만 해도 나의 계획은 졸업 후, 졸업 논문을 쓰고, 졸업 논문을 멋지게 좋은 저널에 싣고, 미국으로 박사 학위를 하러 떠나는 거였다. 미국 학위를 위해 필요한 GRE 시험 등도 계속 준비하고 있었다.


호주에서의 첫 1학기는 정말 힘들었지만 그만큼 배운 것도 많았고 새로운 분야에 눈을 뜨는 계기이기도 했다. 지난 시간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시간들을 곰곰이 짚어보는데 문득 내 앞날이 꽉 차 있는 기분이 들었다. 뭔가 할 일이 있다는 것, 계획이 끊임없이 있다는 건 너무 멋진 일이었다.


어느새 대기 시간이 끝나고 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승무원들은 이륙 준비로 분주했고, 나는 모든 짐을 정리 후 기내식 메뉴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자 슬그머니 구불머리 회장이 생각났다. 며칠 전, 브리즈번엔 언제 다시 돌아오냐고 물어보았었는데, 몇주 뒤 즈음 갈 것 같다고 대충 둘러대자 학생이 공부하러 호주에 와 놓고 무슨 외도가 그렇게 길어지냐며 타박을 해대던 그였다.





기나긴 비행 끝에 택시를 타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브리즈번 특유의 향기가 날 신나게 반겨주는 느낌이었다. 파란 하늘, 낮게 떠있는 구름, 공기 중으로 비치는 햇살까지. 희영언니가 내가 없으니 너무 심심했다며 두 팔을 벌려 환영해 주었다. 오랜만에 보는 언니도 너무 반가웠고, 한창 한국의 더위에 지쳤던 터라 브리즈번의 서늘한 공기도, 예쁜 하늘도, 우리 집 특유의 냄새마저 다 좋았다.


이제는, 어드덧, 여기가 내 보금자리가 된 걸까.


한숨 자고 씻고 일어나 언니와 밀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언니가 특유의 이쁜 눈웃음을 지으며 뜬금없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너 그 회장이랑 뭐 잘 되가는거야 뭐야?

-응? 무슨 소리야???

-회장이 너 언제 오냐고 엄청 물어보던데?

-헐!!! 뭐야. 그래서? 말 해 줬어?

-말 못해줄 건 또 뭐야. 오늘 온다구 했지 뭐!

-그게 언제였어?

-며칠 된 것 같은데.

-어떡해. 나는 더 늦게 온다구 거짓말 했는데.

-어머어머, 왜 그런 거짓말을 해? 얘, 봐봐! 너네 뭔가 이상해!!


희영언니의 호들갑을 '나중에 다 말해 줄게'로 간신히 얼버무리며 방에 들어오니, 타이밍도 좋게 구불 회장의 메세지가 도착 해 있었다.


-오늘 저녁에 집 앞으로 갈게. 혹시 피곤하지 않으면 잠시 볼 수 있을까?


이럴수가.

역시 구불 회장은 내가 돌아온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여기서 싫다고 하면 모든 게 이상해 질 것만 같았다. 


-네. 저 저녁은 희영언니랑 먹기로 했으니까 식사 하고 뵈어요.




구불 회장은 우리 집 앞 길가에 주차를 하고 본인 차 앞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집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니 그 모습이 생생하게 보였는데, 이리 왔다, 저리 왔다 하는 모습이 굉장히 산만해 보였다.


얼른 겉옷을 껴입고 내려가선 진짜 오랜만이에요, 하고 인사를 했다.


추우니까 얼른 타라며 차 문을 열어주는 구불 회장.


차는 시동이 꺼지지 않은 채 히터를 힙겹게 내뱉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너무나도 낡아보이는, 당장 폐차장에 갖다 놓아도 이상하지 않은 차라 그런가, 히터가 잘 나와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불 회장은 한국에서 어떻게 지냈냐며 근황을 물어보았고, 그런 이야기들에 하나 둘씩 답하다 보니 어느새 너무 예쁘게 불빛을 밝힌 카페가 가득한 동네에 도착해 있었다. 왜 오는 날짜를 거짓말 했냐는 질문을 예상했지만, 그는 그런 질문은 하지 않았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한 스트릿 전체가 불이 타오르는 난로가 피워진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로 가득한 동네였고, 처음 보는 예쁜 풍경에 나는 넋이 나갔다.


-예쁘지? 

-네. 진짜 예뻐요!

-운전 해야하니까 술은 못 마시고, 여기서 차나 한잔 하고 가자.

-네, 좋아요. 


나는 맥주 한 병을, 구불 회장은 핫 초코를 시키고는 난로가 활활 타오르는 야외 좌석에 앉았다.

등 뒤로 타는 불 덕분에 온 몸이 따스했지만, 코 끝으로 들어오는 공기는 많이 차가운 겨울의 늦자락이었다.


구불 회장은 불빛을 말없이 바라보며 핫 초코를 홀짝이더니 무심히 한 마디를 던졌다.


-우리 만나면 안 될까? 없어보니.. 너 없는 시간이 너무 허전하더라. 내 맘은 이미 알고 있을거고.. 니 맘이 너무 궁금해서... 대답 듣고싶어서 오늘 보자고 했어.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구불 회장은 평소에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데, 꼭 진지해 질 때만 서울말을 쓰는 습관이 있었다. 난 괜히 앞에 놓인 맥주 병을 꼭 쥐었다.


손끝이 점점 차가워져왔다. 갑자기 추워지기 시작했다.


구불 회장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나도 상상 못한 전혀 엉뚱한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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