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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ly You Sep 02. 2020

가자, 카타르로!!!

수도는 도하랍니다



정말 많은 고민을 했다.


카타르로 같이 가자, 그것도 결혼 해서, 라는 그의 이야기에 그로부터 한 1-2주일간은 하얗게 샌 머리로 매일을 보낸 것 같았다.


그 전에 나는 여러 다른 옵션을 만들어 보았다.


1번 안> 구불 회장은 카타르, 나는 한국으로 귀국해서 장거리 연애를 한다


불가능. 거의 100%의 확률로 이별하게 되는 건 시간문제 같았다. 일단 나는 나를 잘 아는데, 그 누구보다도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사람이었다. 예전엔 그런 말을 싫어했는데, 경험으로 얻은 진리인데, 나는 정말 그런 사람이었다. 이렇게 각자의 곳으로 가게 되면, 각자의 생활이 익숙해지고, 연락은 뜸해지고, 그렇게 서로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겠지. 그래도 괜찮을까? 구불 회장은 내게 그 정도의, 스쳐 지나가는 사람일까?


2번 안> 구불 회장이 카타르 직장을 포기하고 함께 한국으로 귀국한다.


사실 내게는 제일 구미가 당긴 안이었지만, 이 또한 국내에서의 장거리 연애를 피할 길이 없었다. 구불 회장의 카타르대학교 포스트 닥터 (박사 후 연구원 과정)직을 포기시키고 국내에서 일자리를 구해보아라고 내가 떼를 써 본들, 나는 졸업 후 부산으로 돌아갈텐데. 나 때문에 한국 어디엔가 확실치도 않은 직장을 찾아 귀국해야하는 구불 회장의 사정은 그렇게 하라고 조르기엔 너무 나의 이기심같은 느낌이 들었다.


3번 안> 구불 회장의 말 대로 결혼 후 카타르로 간다


한숨이 나왔다. 26살의 꽃같은 나이에 결혼이라니.. 전.혀. 내 인생의 옵션에 없던 이야기였다. 내가 그린 내 인생은, 만약에 결혼이란걸 한다면 34살이나 35살 즈음이었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혼자살기'였기 때문에..



1번도, 2번도, 3번도 다 머리가 아파왔다.


다시 돌아와서, 구불 회장과 나와의 관계는, 전진이냐, 파국이냐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중에서도 단 하나 확실했던 건, 내가 일찍 결혼을 하고 싶지 않다 - 결혼이라는 제도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었지, 구불 회장에 대한 고민이나 의심이 아니었다.


사실 그는 내가 처음 만난, '나'라는 사람을 진정으로 알아 준 사람이었다. 나를 낳아 준 사람은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봐 준 사람은 그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영혼의 단짝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으며, 항상 나라는 사람을 존중하고, 또 존경해 주었다.



단 하나 솔직히 마음에 쪼오오금 걸렸던 건, 정말 현실적인 문제였는데, 그가 나보다 훨씬 많은 나이임에도 박사 공부를 하느라 모아둔 돈이 1도 없는 빈털털이였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그때 호주 달러로 약 $5000정도 (한국돈 400만원 가량) 나가는 포드의 덜덜거리는 낡은 중고차를 타고 다녔는데, 그게 그의 전 재산이었다.


어린 나이에, 그래 결혼이란 걸 한다 치자, 근데 남편 될 사람의 전 재산은 400만원이라니.. .. ..


경악을 금치 못할 부모님의 표정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졌다.




이런 저런 이유로 나는 구불 회장께 답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재촉하지 않았다. 그는 하루씩 호주 생활을 정리하면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고, 비행기 티켓까지 알아보고 있었다. 정말 마음 아프게도 가난한 박사생이었어서 모아둔 돈이 하나도 없던 터라, 카타르까지 갈 비행기 티켓 (그가 먼저 예약하고 도착하면 카타르 대학교에서 비용처리를 해 주는 형식이었다)도 신용카드로 긁어야만 했다.


그런 그에게 포드 차를 팔고 그걸로 비행기 티켓을 마련하라고 했지만 마지막까지 차가 없으면 불편하다며 고개를 젓더니, 자기가 가면 차는 내가 타고, 내가 졸업하고 난 후에 차를 팔아서 여행을 하던 비지니스 티켓을 사서 편히 한국으로 귀국하든 하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내게 줄 건 이것밖에 없다며 차 키와 차 관련 문서를 쥐어주는 것이 아닌가.


우리 집 앞에 차를 세워놓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 같았음 내 전 재산을 남자친구에게 주고 비행기 티켓을 신용카드로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니었다.


나였다면 차를 팔고 그 돈으로 편히 호주 생활을 정리하고 카타르로 떠났지, 남아 있는 연인에게 그걸 주고 정작 나는 재정적으로 허덕이면서 힘든 마무리를 할 것 같진 않았다.



그에겐 자신이 경제적으로 힘든 것 보다 더 중요했던 건, 남은 내가 호주에서 그와 있을 때처럼 편하게 지내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더 많이 날 사랑하고 주는 사람이라니.. 그 생각에 마음이 찡해왔다.


다들 연애에도 사랑에도 조금씩은 계산적이던 시절이었다. 나도 사실 그렇게 살아 왔었다. 그런데 구불 회장은 마치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았다. 이대로 한국에 돌아가서, 내 생활을 살고, 시간이 지나고 서른 중반 무렵 내가 아직 혼자면, 나는 그가 생각나지 않을까?


그때 되어서 후회하지 않을까? 그런 사람 또 없을까, 하면서.


만약 지금 내가 35살이라면 그랑 결혼할까? 이 제안을 망설이고 있을까?


나는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2층 발코니에서 구불 회장이 남겨놓고 간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 위로 노을이 길게 떨어지고 있었다.


그 때일까.

덩그러니 가로수 밑에 주차되어 있는 낡디 낡은 포드 차를 보면서 아마 그때 나는 결심한 것 같다.



구불 회장이 타던 , 툭하면 엔진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던 낡은 포드 포커스 (구글 이미지)


그래,

가자, 카타르로.


내가 마음을 먹으니 그 후 모든 일은 일사천리였다.


몇주 후,


우리는 부모님과 형제자매, 그리고 브리즈번에서 알고 지내던 친구들만 모아 브리즈번의 한 작은 교회에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린 뒤, 구불 회장은 먼저 카타르로 떠났다. 그리고 두달 후, 나도 졸업을 하고, 홍콩을 거쳐 카타르의 수도 도하로 향했다.



안녕,

내 두번째 브리즈번.


내 인생 2막의 시작이었다.





다음 글은  <카타르 라이프> 매거진에서 연재됩니다.


https://brunch.co.kr/@kellyyou/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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