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가가 되자
“오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희윤이, 엎드려서 책을 읽는 김대리의 옆구리를 발끝으로 쿡 찔렀다.
“윽, 왜?”
“전세 두 집이 세 달 뒤에 동시에 만기야.
내가 오늘 문자 보내봤는데, 한 집은 확실히 나간댔고 다른 집은 연장하고 싶대.
일단 재무제표 열어봐. 우리 돈 얼마 있어?”
희윤의 엄명에 김대리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낡은 컴퓨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아… 두 집 금액은 안되고 하나는 충분해.
한 집은 연장하고 다른 건 수리해서 월세로 돌리면 되겠어.”
재무제표와 함께 임대관리 현황표를 비교해 보면서 김대리가 대답했다.
“그래? 근데 아까 내가 부동산 사장님이랑 통화했는데,
지금 기존 전세금이 시세보다 너무 낮아.
우리 공사비만 빠지게, 내가 전세금 조금만 올려달라고 얘기해볼게.”
세상은 김대리와 희윤의 마음처럼 돌아가 주지 않았다.
조금은 더 전세금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하던 욕심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연장 의사를 내비쳤던 임차인이 전세금 인상 제안에 마음을 바꿔 퇴거를 통보한 것이다.
"사장님, 아무래도 전세금을 좀 준비하셔야 할 것 같아요."
중개사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하필이면 왜 지금.
정부의 부채 관리 정책 강화로 갑작스레 전세자금 대출이 막혔다고 한다.
청년들이 전세를 선호했던 이유는 월세보다 저렴한 대출이자 때문이었는데,
그 길이 막히자 시장은 순식간에 뒤집혔다.
김대리는 똥줄이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두 세대의 전세금을 동시에 돌려주려면, 아무리 긁어모아도 한참 부족했다.
찔끔 오른 급여명세서를 들고 은행을 찾아가 보았지만 대출 한도를 늘리는 일은 불가능했다.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마이너스 통장도 둘 모두 한도까지 찼고, 새마을금고에서 나오는 긴급생활자금 대출까지 받았다.
그런데도 딱 칠백만 원이 모자랐다.
“오빠… 나 퇴직금 중간정산 할까?”
희윤이 저녁 밥상 앞에서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조금만 기다려봐. 이번 달까지 마련 안되면 다시 생각하자.”
김대리는 희윤의 손을 토닥이며, 무언가를 결심하는 듯한 얼굴을 했다.
“우짠 일로 이래 불러냈노?”
김대리가 내미는 소주잔에 마주 건배를 하며 친구가 물었다.
“뭐 그냥 겸사겸사..”
어색하게 웃으며 말꼬리를 흐리는 김대리를 친구가 날카롭게 쏘아봤다.
“니 요새 건물 하나 사서 그거 고친다고 쌔 빠진다 안했나?
혹시 그기 또 사기 당한거가?”
김대리는 지난 번 파주 사건 때 '개발제한 구역에는 프로젝트 파이낸싱 대출이 절대 나오지 않는다'며 일깨워 준 은행 친구를 만나고 있었다.
“그건 아닌데… 머 또 사고를 친건 맞다.”
김대리는 그간의 상황을 친구에게 차분하게 설명한 뒤, 고개를 푹 숙인채 간신히 말을 이었다.
“혹시 니네 은행에서 대출 좀 받을 수 있을까?
수리해서 내어 놓는 잠깐이면 된다. 두 달도 안걸릴거야.”
아무리 친구라도 부탁하는 일은 김대리에게 너무나도 어려웠다.
며칠 뒤, 김대리는 친구가 퀵으로 보내온 두툼한 서류 봉투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뭐지, 이게.’
그 날 친구는 알아보아 주겠노라고 김대리를 안심시킨 뒤 헤어졌기에,
김대리는 초조해하며 연락을 기다리던 참이었다.
그런데 왠 봉투를 보내왔단 말인가.
돈봉투를 퀵으로 보낼 리는 없으니 말이다.
그 때 휴대폰이 울렸다.
‘위잉, 위잉.’
친구였다.
김대리는 돈보다는 친구의 마음 씀씀이에 더 울컥했다.
가슴이 후련하면서도 먹먹해서 무슨 기분인지 알기 어려웠다.
자신을 믿고 이렇게까지 해 준 친구가 고마웠고, 그런 친구를 둔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야, 니 통장 받았나?”
“뭐? 통장이라고?”
김대리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래 통장. 그거 내끼다. 거 도장이랑 카드도 넣어 놨으니 니가 빼 쓰고 채워 놓으라.”
“아니 니 통장을..왜?”
“아 거 내 쓰던 통장이 아이라…”
친구는 담담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친구는 김대리의 이야기를 듣고 한참을 고민했다.
우리나라 금융 제도상 한 은행에서 대출 한도를 다 채운 사람은,
대부분 다른 은행에서도 추가 대출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그냥 못본 채 거절할 수도 없었다.
고민 끝에 친구는 다니는 은행에서 자기 이름으로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해,
통장 째로 김대리에게 보내준 것이다.
김대리는 봉투를 열어 보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단단히 다짐했다.
“오빠 고마워. 너무 다행이다.”
“희윤아, 마음고생 많이 했지? 우리 한 가지만 원칙을 세우자.”
김대리는 희윤을 다독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가 첫 리모델링과 임대 성공에 너무 들뜬 나머지, 마음이 너무 급했어.
임차인들을 사람 아닌 숫자, 돈으로만 보았던거 같고.
근데 우린 결국 ‘임대업’이라는 사업을 하는거잖아.
이 사업의 고객은 임차인이고,
우리가 진짜 해야 할 일은 그 고객들이 오랫 동안, 편안히 살게 하는 거야.”
희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절대 무리해서 임대료 올리지 말자.
대신, 우리가 좋은 공간을 만들어서 더 많은 고객들이 우리 건물에 살고 싶게 하자.”
김대리는 그렇게 말하며 희윤의 손을 꼭 잡았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마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단순한 임대인이 아니라 진짜 사업가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이
두 사람의 마음속에 함께 자라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