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호의 등장
"흐음... 다시 연락을 해야겠는데."
김대리는 월세 현황표를 바라보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달력처럼 주별로 나눠놓은 칸에는 각 세대가 언제 월세와 관리비를 내야 하는지 정리되어 있었고,
납입이 확인되면 김대리가 동그라미를 입력해 체크 표시를 해 나갔다.
이미 채워져 있었어야 할 301호의 납입 란은 체크가 되지 않은 채로 텅 비어있었다.
물론, 날짜가 하루 이틀 늦었다고 바로 연락하는 건 아니었다.
너무 빡빡하게 관리하면 임차인도 부담스럽고, 김대리 자신도 괜히 신경만 더 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단순히 깜빡하고 송금을 못 한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또 너무 늦게 알려주면, 임차인이 다음 달 월세와 함께 몰아서 내야 하는 부담이 커졌다.
그래서 김대리는 '일주일은 기다린다'는 원칙을 세워 두었다.
그리고 그 시점이 되면 정중하게 문자 한 통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임대인입니다.
301호의 10월 분 월세 및 관리비가 미납되어 연락 드립니다.
바쁘시겠지만, 빠른 시일 내 납입을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읽음 표시가 떴어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일이 바쁜가 보네...”
김대리는 애써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다른 세대의 납부 현황을 정리했다.
김대리와 비슷한 나이의 301호 임차인은 처음 계약 때부터 범상치가 않았다.
부동산 경매 일을 한다는 그는, 전문가처럼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난 듯했다.
동네 상권 이야기를 시작으로 중개사무소 입지가 잘못되었다며 법석을 떨고,
별것도 아닌 절차를 두고 법령을 들먹이며 중개인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임대인이 자신과 비슷한 또래라는 사실도 못마땅했는지,
임시로 잠깐 원룸에 머무는 거라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그는 김대리 부부가 감히 상상도 못할 고급 외제차를 끌고 다녔고,
여자친구와 함께 명품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옷을 입었다.
301호는 유난히 요구사항이 많았다.
이사 첫날, 김대리의 휴대폰이 울렸다. “잠깐 얘기 좀 할 게 있다”는 연락이었다.
마침 다른 호실 배관 문제로 건물에 있던 김대리는 곧장 올라갔다.
문을 열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건 벽 한쪽을 다 차지하는 거대한 TV였다.
“사장님, 여기 벽걸이 TV 달 건데 구멍 좀 뚫을게요.”
고급 소파에 앉은 여자친구는 김대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현관 옆에는 신발장에 넣지 못한 값비싼 구두와 부츠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도배 원하신다고 해서 지금 새로 다 한 상태에요. 죄송하지만 구멍은 안되겠습니다."
김대리가 정중히 거절하자, 301호는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아 됐어요. 화장실 바닥에 시멘트 조각 있던데, 그거나 치우고 가세요. 배수구 막히면 어쩌려고.."
김대리는 화장실에 들어가 보았다.
손톱보다 작은 시멘트 부스러기 몇 개가 떨어져 있었다.
김대리는 묵묵히 부스러기들을 손가락으로 집어 들고 나왔다.
그 뒤에도 김대리는 몇 차례나 더 301호를 방문해야만 했다.
환기를 안 해서 생긴 결로, 단순한 샤워기 고장, 가끔 나타나는 벌레 한 마리까지.
전화나 문자로 물어보면 될 일도 꼭 “급하다”며 김대리를 현장으로 불러냈다.
방에 들를 때마다 베란다에는 값비싼 위스키 병이 나뒹굴었고,
현관 앞에는 늘 배달 음식 봉투가 쌓여 있었다.
여자친구가 불안해 한다며 호실 앞에 CCTV 설치를 요구하거나, 공동 현관의 비밀번호를 수시로 교체할 것을 요구하는 일에는 헛웃음이 나왔다. 신발장이 작다며 큰 것으로 교체해 달라고 했을 때는 화도 나지 않았다.
"우웅"
이제는 휴대폰 화면에 ‘301호’라는 번호만 떠도 김대리의 심장은 쿵 내려앉았다.
심지어 벨 소리가 환청처럼 들릴 정도였다.
노이로제에 걸리겠다는 말이 남 얘기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