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1/2)
김대리는 커서가 깜빡이는 화면을 바라보다 뜨거운 김이 오르는 머그잔을 집어들었다.
창 밖에는 따뜻한 봄 햇살이 부드럽게 흐르고 있었고, 진한 커피향이 입 안 가득 번졌다.
따스한 액체가 목을 타고 내려가자, 머릿속에 흩어져 있던 생각들이 천천히 한 줄기로 모였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빈 화면에 천천히 글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김대리는 어느덧 부장이 되었다.
하지만 과장에서 차장을 거쳐 부장이 되는 동안에도, 친구들은 여전히 그를 '김대리'라고 불렀다.
"야 너는 중학교때부터 김대리였잖아. 어딜 승진하려고 해?"
평범하고 온순한 외모가 어쩐지 회사원 같았던 탓인지, 친구들은 그에게 '김대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중학생 딸의 아버지가 되고 부장 직함을 받은 지금까지도 김대리는 김대리로 불렸다.
한때 그 별명은 기분 좋은 공상을 불러일으켰다.
월급을 받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회사원이 될 수 있다는 꿈을 꾸게 했으니 말이다.
막 입사했을 때의 선배 대리들은 한없이 대단한 전문가처럼 보였다.
술자리에서 친구들이 ‘김대리’라고 부르면,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진짜 대리님으로 보는 것 같아 괜스레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대리를 달았을 때는 기분이 달랐다.
친구들이 ‘김대리 대리’라며 놀려댔을 때, 그는 알고 있었다. 기대했던 ‘대리’의 세계가 생각보다 초라하다는 것을.
돈은 받는 만큼 쓸 곳이 늘어났고, 모으기는 어려웠다.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는 조바심과 두려움에 밤낮없이 회사 일에 매달렸다.
달콤한 제안도 있었고, 코피를 쏟아가며 앞만 보고 달렸다.
하지만 결국 큰 좌절을 맞이했다.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해봐."
어깨를 다독이던 한부장의 말이 전환점이 되었다.
그제서야 스스로의 꿈을 세우기 시작했고, 다행히 함께 꿈을 꾸어주는 사람이 곁에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둘은 그 꿈이 현실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월세 입금 알림이 처음 휴대폰에 울렸을 때는 신기하고 자랑스러운 마음에, 아무나 붙잡고 '제가 월세라는걸 받았어요' 하고 털어놓고 싶을 정도였다.
중개인과 임차인들이 '사장님' 혹은 '건물주'라고 불렀을 때는 뿌듯하면서도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좌충우돌 끝에 첫 세대의 수리를 마치고 임대를 놓았을 때는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한 집, 두 집 손수 고친 세대가 늘어나며 손길은 능숙해졌고, 임차인과 중개인을 상대하는 태도도 원숙해졌다. 회사와 직함을 떠나 사람을 만나는 경험은 늘 새로웠다. 건물은 두 사람이 운영하는 또 하나의 회사였고, 둘의 의사결정이 건물의 성패를 좌우했다.
다행이 두 사람은 지역 내에서 손꼽히는 임대인으로 자리매김했고, 시장의 인정을 받았다. 월급이 모여 월세를 늘렸고, 늘어난 월세가 다시 새로운 월세를 늘리는 힘으로 작용했다.
월세가 늘어난 건 단순히 월세로 전환한 세대수가 늘어나서만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며 월세는 물가와 함께 조금씩, 그러나 확실히 상승했다. 월세만 오르지 않는 것 같던 시기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훌쩍 올라 있었다.
반면에 보증금은 복리로 줄어들었다. 자금을 모아 전세를 줄여나가기도 했지만, 화폐 가치가 하락하는 효과는 시간이 지날 수록 무서울 지경이었다. 그토록 거대해 보였던 몇 억 이라는 돈은, 세월의 흐름 속에 침식되어 쪼그라들었다. 월세도, 관리비도, 다른 자산들도 모두 물가와 함께 가치가 늘어났다. 가치가 줄어든 것은 결국 보증금과 은행 대출 같은 현금성 부채뿐이었다.
김대리와 희윤은 인플레이션의 위력을 온몸으로 실감했다. 한두 해 정도로는 잘 느껴지지 않았지만, 더 긴 시간을 두고 보면 너무나도 분명했다. 현금은 가치를 잃어버렸고, 거대한 산 같던 대출은 왜소해졌다. 자산은 가만히 두어도 불어났고, 월세와 배당은 꾸준히 늘어났다.
'그 때 투자를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생각이 들 때 마다, 아찔함에 몸서리가 쳐졌다. '투자를 하지 않는 위험'을 조금이라도 일찍 깨달아서 얼마나 다행인지가 새삼 느껴졌다.
팔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은 곰씹을수록, 그리고 시간이 흐를 수록 더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불확실성을 싫어한다. 하지만 세상은 불확실한 것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인간은 그로 인한 두려움을 없애고자 늘 예측을 시도한다. 때로는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김대리도 시장을 예측하고자 했던 때가 있었고, 심지어 예측할 수 있다고 착각하기까지 했다. 결국 대가를 치를 수 밖에 없었지만, 다행히 그 대가는 값진 교훈에 비해 그리 크지 않았다.
주식과 부동산 모두, 가치가 예상보다 크게 올랐을 때는 '매도해야 하나' 하는 고민의 순간이 찾아왔다. 지금이 꼭지인 것 같은데. 팔아서 현금화한 뒤, 바닥 즈음에서 다시 사면 큰 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시장은 예상이 가능한 영역이 아니었다. 자신의 예측을 비웃듯 움직이는 시장을 보며, 김대리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수 차례 깨달았다. 그리고 매도하지 않는 '매도' 원칙을 다시금 곰씹었다.
좋은 자산에 투자하고, 보유 과정에서 얻는 수익을 누리라는 의미 외에도, 더 나은 투자 대상을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매도하는 '위험'도 강조하고 있는 원칙임을 깨달았다. 더 좋은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현금화를 하여 시장에서 벗어나면, 자칫 다시는 들어갈 수 없게 될 수도 있었다. 강은 흐르는데, 강둑에만 서있는 형국이 될 수도 있었다.
시세가 급락하는 순간은 더욱 원칙을 지키기 힘들었다. 하강하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온몸이 곤두박질치는 느낌이었다.
다행히도 김대리는 자신이 선택한 자산에 대한 근거 있는 확신과, 자본주의가 최소한 붕괴하지는 않으리란 굳은 신뢰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공포에 질려 있는 동안에도 배당과 월세는 꼬박꼬박 들어왔다.
시가총액은 변했어도 회사는 여전히 이익을 내며 배당금을 지급했고, 시세는 빠졌어도 건물은 임대를 유지하며 월세라는 황금알을 낳았다. 일시적 가격 변동이 본질을 흔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는 셈이었다.
게다가 배당과 월세, 그리고 직장인의 가장 큰 무기인 월급으로 값싸게 재투자한 자산들은 또 다른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어주었고, 김대리의 현금흐름을 더욱 튼튼하게 만들어 주었다.
공포가 시장을 지배하는 동안, 자산이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는 일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가를 김대리는 거듭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