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2/2)
김대리가 맡은 파트는 세 명으로 꾸려져 있었다.
파트장인 김대리, 그리고 한두 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 직원 둘.
팀의 역할은 회사의 사업계획과 연간 전망 재무제표를 만들어내는 일이었는데, 전임 파트장은 과장으로 일하다 차장으로 떠났다. 대리 나부랭이였던 김대리는 부담 반, 성취감 반으로 자리를 이어받았다.
일은 힘들었지만 의외로 재미도 있었다.
밑에 둘은 성실하게 따라와 주었고, 밤을 새운 뒤 새벽에 나누는 소주 한 잔이 피로를 날려주곤 했다. 업무량은 언제나 넘쳐났다. 이쪽저쪽에서 시나리오를 쏟아내면 그걸 곧장 재무제표로 찍어내야 했는데, 거의 컨베이어 벨트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사적인 조직 개편이 시작됐다. 회사가 커지는 속도를 기존 조직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고 했다. 문제는 김대리가 찍어내던 제품이 ‘조직별 재무제표’였다는 점이다. 김대리의 파트는 조직 개편이라는 소용돌이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미 매일 밤을 새우던 상황에서, 김대리의 파트는 개편 전·후 조직 기준의 재무제표를 동시에 찍어내기 시작했다. 개편은 경영진에게 민감한 사안이었고, 한 치의 오차도 용납되지 않았다. 김대리는 코피를 자주 흘렸고, 손에 잡히는 대로 보고서를 찢어 닦으며 이러다 정말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 무렵, 기획 담당 임원에게 호출이 떨어졌다. 김대리는 혹시라도 무슨 오류가 있었나 걱정하며 서류철을 한 아름 안은 채 손때 묻은 노트, 계산기를 들고 어딘가 한기가 느껴지는 듯한 임원실 문을 열었다.
“니 요즘 마이 힘들다매?”
‘웬일로 내 얘기를 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대리는 일을 하며 고생한다는 티를 잘 내지 않는 편이었는데, 아마 주변에서 누군가 귀뜸을 흘린 모양이었다. 임원은 며칠 지켜보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김대리를 따로 불러낸 것이다.
“잘하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다. 쪼매만 더 해 보자. 니도 과장 달아야 안되겠나?”
승진을 바라고 일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대리 3년 만에 과장이라니.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몸속 피로가 신기하게도 스르르 녹아내렸다.
‘아, 이분이 나를 이렇게까지 보고 있었구나.’
가슴이 울컥했고, 눈시울이 짜르르하기까지 했다.
“나가 봐라. 몇 달만 참고 하믄 좋은 일 생길 끼다. 내가 니 하나 못 챙기겄나.”
임원실에서 들은 몇 마디 말의 약빨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승진 얘기도 반가웠지만,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는 사람에게 처음으로 인정받았다는 기분이 더 짜릿했다. 점순이와 성례를 시켜준다는 약속에 소처럼 몇 마지기 밭을 단숨에 갈아버린 소설 속 아무개처럼, 김대리도 그해 설부터 추석까지의 모든 휴일을 사무실에 바쳤다. 회사의 대대적인 조직 개편 작업도 밤을 새워 찍어낸 재무제표 덕분에 무사히 굴러갔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승진 발표 날이 되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명단 어디에도 김대리의 이름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