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부장과의 낮술
“잠깐 바람이나 쐬고 올까?”
김대리가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던 어느 날, 옆 팀 한부장이 조용히 다가왔다. 회사 일로는 자주 이야기했지만, 개인적으로 이렇게 접해보기는 처음이었다.
한부장은 늘 차분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사람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나서지는 않지만, 맡은 일은 깔끔하게 처리해내는 데다 늘 다른 사람에게 공을 돌리기까지 해서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
승진 속도가 눈에 띄게 빠른 것도 아니었고, 조직에서 앞줄에 서려는 야망을 내비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에게는 늘 여유가 묻어났다. 급한 일이 닥쳐도 어쩐지 허둥대는 모습이 없었고, 높은 사람 앞에서도 비굴해지지 않았다.
김대리는 가끔 생각했다.
‘도대체 저 사람은 뭘 믿고 저렇게 여유로울까.’
그날도 한부장은 소란스럽지 않게, 그러나 묘하게 안심이 되는 목소리로 말을 건넸고, 김대리는 끌리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을 햇살은 아직 따가웠지만 해가 기울어가며 피부에 닿는 공기가 선선했다.
사무실을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숨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아는 얼굴들이 모여 있는 흡연장소를 지나쳐, 회사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이르자 성큼성큼 앞서 걷던 한부장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한잔 어때. 좀 마시고 싶은 기분일텐데.”
조금 놀랐지만 사실이었다.
승진 회식에는 도저히 갈 수가 없었고, 친구들에게도 부끄러워 차마 털어놓지 못했다. 동료들의 술자리 제안도 모조리 거절했다. 술이 들어가면 감정을 누르지 못하고 일을 저지르고야 말 것만 같았다. 승진은 누락되었어도 회사는 다녀야 한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모두들 다 잊은 듯이 지냈고, 갈수록 자신만 이상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 같던 참이었다.
“그래도 아직 근무시간인데요.”
멍하니 대답하자, 한부장이 빙긋 웃었다.
“어차피 사무실에 있어봤자 아무것도 못하는 거 같던데. 혹시 내가 잘못 봤나?”
아니오. 제대로 보셨습니다.
김대리는 한부장이 이끄는 대로 회사에서 멀찍이 떨어진 초밥집으로 들어갔다. 네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는데도 꽤 많은 테이블이 차 있었다. 혼자 마셔도 좋겠다 싶은 구석에 있는 조용한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가볍게 둘이 먹을 만한 걸로 주세요. 사케 괜찮지?”
한부장은 사장과 잘 아는 듯 눈인사를 주고받으며 주문을 했고, 김대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땡땡이를 치고 커피를 마신 적은 있어도 근무 시간에 낮술이라니. 그래도 왠지 마음이 좀 풀리는 기분이었다.
주문한 사케와 안주가 나오자 한부장이 잔을 채워주고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김대리를 보며 이야기했다.
“사실 승진 발표 때부터 쭈욱 지켜보고 있었어. 얼마나 마음이 아플지 잘 알아서 그냥 두고 볼 수가 없더라고. 사실 나도 자네만할 때 똑같은 일을 겪고 얼마나 방황했었는지 몰라.”
김대리는 의외의 말에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는데 방황했던 시절이 있었다니. 한부장은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모두가 다 밉지? 승진 약속 해 놓고 쌩까버린 그 임원한테는 더 그럴 거구.”
맞는 말이었다. 한부장이 내미는 잔에 건배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부장은 그럴 거라는 표정으로 김대리를 바라보았다.
“직원 인사 끝나면 임원 이동 있는 거 알지? 그 임원 이번에 작은 계열사로 떠난다고 하더라고. 타이틀만 보면 승진인데 좋은 이동인지는 좀 헷갈리는 자리지. 아마 그래서 자네도 못 챙겼을 거야. 자기 앞길 신경 쓰느라.”
이해는 됐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풀리지는 않았다. 술을 들이키자 감정이 터져나왔다.
“저 이제 일 못하겠어요. 이게 뭡니까 진짜. 그 임원이, 아니 회사가 저를 망쳐놓은 거 같아요. 저는 열심히 일했는데.. 대체 왜.”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갑자기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남들 앞에서 운다는 사실이 부끄러웠지만 약간은 후련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내친 김에 가슴에서 올라오는 대로 말을 쏟아놓았다.
“저 이제 루팡처럼 살 겁니다. 열심히 일했던 거 생각만 하면 가슴이 정말 찢어지는 것 같아요. 짝사랑하다 보기 좋게 차인 기분이라고요. 이게 다 회사 탓이니 저한테 뭐라 하진 않겠죠.”
한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는 대답했다.
“맘껏 미워해. 그대신 그게 너무 오래가면 안 돼. 자네 말이 다 맞지만 다른 사람 탓을 너무 오래하면 스스로가 망가지니까.”
김대리가 숨을 가다듬는 동안 한부장이 말을 이어나갔다.
“요즘 일을 놓아보니까 어때. 하루가 참 길지?”
사실이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지나가던 오전 시간도, 전화 몇 통 하면 사라지던 오후 시간도, 이제는 끝없이 늘어져 있는 시간 속에 질식해버릴 지경이었다.
“일을 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니까 좋던가?”
아니었다. 스트레스와 압박감에 늘 시달리기는 했지만, 일을 할 때는 집중하는 느낌이 좋았고, 하나하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자신의 모습이 뿌듯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보내는 하루는 무기력했고 우울했다. 아무 일도 할 수 없었고, 또 하고 싶지 않아서 자신이 선택한 하루들이었지만,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회사일을 하라고 하지는 않겠어. 그럴 수 없다는 건 잘 아니까. 하지만 다른 일을 좀 해 보는 건 어때? 멍하니 보내는 하루는 또 다른 지옥이잖나.”
말을 마친 한부장은 사실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라며, 미안하지만 먼저 일어나야겠다고 하며 자리를 떴다. 내 얘기 잘 생각해봐라 하며 어깨를 두드려 주는 손이 잠깐이지만 큰 온기를 전해주었다.
김대리는 혼자 술잔을 기울이며 한부장이 남긴 얘기를 곱씹어 보았다.
한부장이 마지막에 이야기한 ‘다른 일’이란 다름 아닌 김대리 자신의 인생을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는 김대리의 질문에 한부장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자네가 어떤 사람이고, 지금 현재 행복한 사람인지 가만히 생각해봐. 그리고 행복하지 않다면, 뭐가 자네를 행복하게 해 줄지, 최소한 행복의 입구까지라도 데려다 줄지를 고민해 보라고. 아마 지금까지 너무 정신없이 살아왔을 텐데, 마침 타이밍이 좋잖아?”
맞는 말이었다. 김대리가 어떤 사람인지는 딱 잘라 말하기에 막연했지만, 지금 현재 행복하지 않은 건 틀림이 없었다. 어떻게 행복할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뭐가 김대리를 행복하게 해 줄까? 승진은 추구하는 건 답이 아니었다. 뒤늦게 승진한다 해서 지금의 상처를 치유해 줄 리도 없었다.
김대리는 처음으로 자신에 대해, 그리고 행복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