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재무제표 만들기
회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김대리는 낡은 데스크탑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멍하니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던 컴퓨터를 처음으로 생산적인 일에 쓰는 순간이었다.
엑셀을 띄우고 회사 재무제표를 만들던 기억을 더듬었다. 이번엔 회사가 아닌 자기 인생의 숫자를 적어보기로 했다.
먼저 자산 목록을 만들어 보았다.
우선은 현금이다.
인터넷 뱅킹에 접속해 계좌 잔액을 입력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외면했던 증권 계좌에 어렵게 접속했다.
대박이 날거라는 증권사 동기의 말만 믿고 덥썩 가입했던 해외 적립식 펀드. 꽤 많은 돈을 성실하게 납입했지만, 환율과 정치 상황에다 관세 이슈까지 겹치더니 급기야 반 토막이 나고 말았다.
볼 때 마다 스트레스가 치밀어 올라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던 계좌였다.
은행에 들어간 다른 동기가 추천한 저축보험도 있었다.
김대리 너는 소처럼 성실하니까 회사 오래 다닐거고, 오래 부으면 큰 돈 된다고 해서 별 생각 없이 가입한 상품. 또, 남들 다 한다고 따라 만든 청약통장.
부채는 아직 없다. 자산에서 부채를 빼면 순자산인데, 지금은 자산과 순자산이 같다.
앞으로 순자산이 얼마나 늘어나는지가 관건이리라.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자산 합계를 보자 김대리는 한숨이 나왔다.
'벌써 회사를 5년이나 다녔는데 월급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신입 시절에는 친구들과 기분 내느라 카드값을 막기 바빴고, 철이 좀 든 후에는 주식이나 펀드에 덤볐다가 오히려 까먹고 말았다. 원칙도, 생각도 없이 되는 대로 살아온 결과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재무제표는 곧 김대리 회사 생활 5년의 집약체였던 것이다.
5년을 다니고 고작 삼천만 원이라니.
차라리 펑펑 쓰고나 다녔더라면. 제대로 논 것도 아니고, 제대로 모은 것도 아니고. 그래도 이것 보다 조금은 더 많을 줄 알았는데.
하지만 동시에 더 늦기 전에 현실을 마주본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회사에서 갈고 닦은 솜씨로 재무제표를 보기 좋게 만들어 놓으니 조금 뿌듯한 기분도 들었다.
내친 김에 계획도 세워 보기로 했다.
10억까지 가는 길은 여전히 막연하지만, 당장 올해 말, 내년 이맘 때 숫자는 그려볼만 한 것 같았다. 계획 역시 막연히가 아니라, 회사에서 하듯 실제 소득과 지출을 분석한 후 제대로 짜 보기로 했다.
김대리는 카드사 어플을 열어 사용 내역을 내려받았다.
교통비나 식대 같이 어쩔 수 없는 지출, 건강을 위한 헬스장 비용 등 꼭 필요한 지출이 한 달에 얼마나 나가는지 확인했다.
매 달 월급을 받고, 또 필수적인 지출이 이만큼 나간다고 가정하면, 한 달에 얼마나 순자산이 늘어나는지 대충 추정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올해 말, 그리고 내년 이맘때의 순자산 추정치가 나왔다.
당분간 투자는 하지 않고 이 금액을 고스란히 통장에 모으기로 했고, 이런 내용을 반영해 재무제표 상 현금 항목에 저축액을 더해나갔다.
김대리는 이 재무제표를 자신의 ‘계획 재무제표’라고 부르기로 했다.
숫자는 아직 초라했지만,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아 희망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갑자기 희윤의 얼굴이 떠올랐다.
'너만은 어떻게든 행복하게 만들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