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구체화되다
김대리는 잠시 잊고 있었던 과거의 경험이 떠올랐다.
파주 목사에게 사기를 당할 뻔해 크게 위축되어 있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을 무렵이었다.
유모차에 탄 하율을 데리고 산책을 하던 어느 날,
둘은 집 근처에 들어서는 화려한 신축 브랜드 아파트 단지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입주를 앞둔 듯 아파트는 내부 인테리어가 한창이었고,
단지 내 상가는 완성이 되어 대로변에 붙은 몇몇 호실은 벌써 영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건 다름 아닌 휴지 꾸러미였다.
전략적 궁상은 지속되고 있었고, 언제나 생활비를 줄일 궁리를 하던 둘은,
상담만 받으면 휴지를 준다는 이야기에 고민도 하지 않고 분양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자 여기 앉아보시죠. 젊은 분들이 오늘 기회 잘 잡으셨습니다.”
분양 담당자는 환하게 웃으며 고급스러워 보이는 폴더에서 빳빳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김대리는 종이를 끌어당겨 숫자들을 들여다 보았다. 익숙한 숫자들이었다.
평당 얼마, 몇 평에 분양가 얼마, 예상 업종과 월세, 그리고 마지막에 퍼센트 단위로 적혀 있는 수익률.
김대리가 책과 까페 글들을 통해 수도 없이 직접 계산해 본 숫자들이 적힌 테이블이었다.
“상가 분양이 거의 끝났습니다. 이제 딱 한 호실 남은거에요.
지금 분양사무실도 철수하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무언가 어수선해 보이는 사무실 구석에 쌓여 있는 종이 박스들을 가리키며
분양담당자가 흥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뻔한 수법이라는 걸 알면서도 딱 하나 남은 물건이라는 말에 둘은 귀를 쫑긋 세웠다.
“저희가 원래는 이런 분위기면 프리미엄을 붙이기도 해요.
여기 수익률 한번 보세요. 요새 7퍼센트 짜리가 어디 있습니까?”
아닌게 아니라 맞는 이야기였다.
서울에 위치한 상가의 수익률은 보통 3퍼센트 내외였고, 잘해야 4퍼센트를 크게 넘지 않았다.
7퍼센트라니. 김대리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데요 팀장님,”
김대리는 종이와 함께 받은 명함에 적힌 직급을 힐끗 보며 말했다.
“분양가가 10억인데… 저희가 그런 돈이 없어서요.”
팀장이라고 불린 사람은 시원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유 누가 상가를 자기 돈 주고 삽니까. 그럴 수 있는 사람 없어요.
이거 계약만 하시면 저희가 은행 소개시켜드리고, 자금 맞춰 드립니다.
다른 고민 마시고, 돈 벌 궁리만 하시면 됩니다.”
“대출이 얼마나 나오는데요?”
“원래는 한 80퍼센트…그러니까 요 10억 상가에 8억 정도 나오는데,
혹시 부족하시면 저희가 또 다 맞춰드릴 수 있어요.
월세 받으셔가지고 하시면 대출 정도는 금방 갚아버리죠. 또 젊은 분들이.”
팀장은 손바닥을 비비며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대출이 그렇게나 나온다면 자금이 부족하지는 않다.
김대리는 깜짝 놀라면서도 점점 해볼 만한 기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놀랄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제가 아까 드린 종이에 쓰여있던 7프로 수익률 있죠?
그게 대출 받으면 더 올라갑니다. 한번 보시죠.”
팀장은 아까 그 폴더에서 또 다른 종이를 꺼내어 둘 쪽으로 내밀었다.
정말 그랬다.
대출이 없을 때는 10억을 투자해서 월세 600만원 즉 연간 7,200만원이 들어오니 수익률이 7.2%였다.
하지만 4% 금리로 8억을 대출받는 경우를 보자 마법같은 일이 펼쳐졌다.
실제 투자금은 2억으로 줄어들었지만, 월세는 그대로 7,200만원이 입금된다.
다만, 8억에 대한 이자를 내야 하는데, 4% 이자율이므로 연간 이자는 3,200만원이다.
월세에서 이자를 뺀 금액인 4,000만원이 2억 투자의 순 수익이 된다.
무려 20%다. 김대리는 눈을 의심했다.
아무리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봐도 숫자는 틀림없었다.
“이런거 안 잡으시면 투자하실 데가 없어요. 어 잠시만요.”
갑자기 울려댄 팀장의 전화벨 소리가 조용했던 분양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네… 아직 남아 있기는 한데요… 네 네…”
팀장은 둘을 힐끗 보며 수화기를 막고 구석으로 가더니 한참 통화를 하고 돌아왔다.
“아이고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지금 막 계약하시겠다는 분이 계시네요. 이를 어쩌나.”
연신 죄송하다는 말의 내용과는 다르게 얼굴은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김대리는 갑자기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20퍼센트의 수익률, 이자를 내고도 1년에 4천만원이나 떨어지는, 하나밖에 남지 않는 상가가 거의 내 것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이런 법이 어딨어요. 저희가 지금 팀장님 앞에 있는데 어떻게 이런 식으로 분양을 하세요?”
김대리는 허둥대며 말했다. 갑자기 억울함이 치밀었다. 이것만은 빼앗길 수 없다.
“하이고 참 이걸 어쩌나… 선생님 말씀이 틀린 건 또 없긴 합니다만..”
팀장은 김대리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곤란해하는 목소리로 몇 마디를 던지더니,
잠깐 시간을 달라며 다시 구석으로 가서 전화기에 대고 또 한참을 이야기하다 돌아왔다.
김대리는 속이 바짝바짝 탔다. 꼭 움켜쥔 주먹에서는 땀이 배어나왔다.
“저 선생님, 사정이 그렇고 해서 제가 아까 그분한테 부탁을 좀 드렸습니다.
교양이 있는 분이라 이해를 해주셔가지고, 바로 계약 하실 분이면 양보하겠다고 하시네요.”
김대리는 팀장이 고마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름모를 신사분의 통 큰 양보에도 감격까지 느꼈다.
"저희 조금만 더 고민하고 올게요.”
옆에서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희윤이 나서며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하율이는 사무실을 아장아장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만져보며 호기심을 채우고 있었다.
“뭐 좋으실 대로 하세요. 하지만 오늘 지나면 장담 못합니다.”
팀장이 갑자기 뚱한 표정을 지으며 희윤을 빤히 바라보았다.
꼭 연락 달라는 팀장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희윤은 하율이를 들쳐 안은 김대리의 손을 잡아 끌고 분양사무소를 나왔다.
“오빠, 이거 또 사기 아니야?”
“어? 희윤아 이건 완전 합법적인 거잖아. 대출 받아서 상가 매수하고 월세 받는건데 왜?”
“뭔가 수상하잖아. 그리고 20퍼센트 수익이라니… 아니 사람들이 왜 이거 두고 은행 예금해?
왜 기업들은 땀흘려서 물건 만들어 팔아? 그냥 상가 사면 될텐데?”
“아니 이게 뭐 열배 스무배도 아니고… 20퍼센트가 좀 과하긴 하지만…”
김대리는 애써 대답을 해 놓기는 했지만 뒷맛이 영 개운치 않았다.
게다가 열배 스무배 하며 나오는 대로 던진 자신의 말에 번쩍 하고 정신이 들었다.
욕심을 자극하고, 놓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심어 조급하게 만드는 방식.
희생양을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수법이 지난 번 파주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빠, 게다가 여기 보면 위치가 2층이잖아. 생각해봐.
2층 상가에서 어떤 가게가 월세를 600만원씩 내고 장사해서 남겠어?
우리가 직접 한다고 생각해봐.”
희윤의 똑부러지는 말에 김대리는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오빠, 우리 아파트 살 때 세금 생각 못해서 적금 깰 뻔 했던거 기억 안나?
상가도 당연히 취득세가 있겠지. 재산세 같은 보유세도 있을거구, 월세 받으면 소득세도 떼일테고.
이것 저것 떼고 나면 실제로는 그렇게 안나올걸?
거기다 공실이라도 생겨봐.
8억에 4프로니까 은행에 내야 할 이자가 1년에 3,200만원이었지?
그거 내 1년치 연봉이야.”
희윤의 이야기를 듣자 김대리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월급쟁이는 돈을 잃으면 안된다고, ‘꼭 잘 아는 곳에만 투자해야 한다’고 다짐했는데 또다시 욕심 때문에 큰 곤경에 처할 뻔 했던 것이다.
김대리는 희윤의 손을 꼬옥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희윤아, 내가 빨리 부자가 되고 싶은 욕심에 정신이 나갔었나봐.”
“오빠, 이제 하율이도 있잖아. 오빠 마음은 나도 잘 아니까, 좀 돌아가더라도 천천히 가자.”
김대리는 그 이후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근처를 지날 때 마다 상가의 해당 호실을 기웃거려 보았다. 누군가 임자가 나타났는지 호실 밖에 붙어 있던 분양 중이라는 현수막은 임대 구함 이라는 현수막으로 바뀌었다.
김대리는 누군가 자신의 상가를 채간 것 같다는 기분이 계속 들었지만,
'임대 구함'이 붙어있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희윤의 말이 옳았음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이런 직간접 경험들 덕분에, 김대리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임차인 혹은 임대인으로 한 번도 발을 들여본 적 없는 상업시설 투자는,
아직 자신의 무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언젠가 도전해야 할 목표 중 하나로 남겨두긴 했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다행히 월세를 받는 길이 상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주거용 건물로도 충분히 임대 수익을 올릴 수 있다.
김대리는 첫 신혼집이었던 ‘지원이네’와 같은 건물의 주인이 되는 꿈을 늘 마음 한켠에 간직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파트처럼 토지를 지분으로 갖는 구조보다, 대지까지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다가구주택이 훨씬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무엇보다 주택 수를 늘리지 않으면서도, 주인세대로 거주를 해결하는 동시에 다른 세대들에서 임대소득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김대리의 투어 코스는 상업용 건물에서 다가구주택으로 서서히 바뀌어갔다.
주말이면 둘은 하율을 데리고, 캠핑 대신 다가구주택 투어를 다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