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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편집장 Nov 27. 2021

들뢰즈, <안티 오이디푸스> - 늑대와 분열증

프로이트, 꿈의 해석

  프로이트의 페이지에는, 철학사에서 심심치 않게 인용되는, 늑대 꿈에 관한 상담기록이 실려 있는데, 들뢰즈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늑대가 한 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를 묻는다. 이게 무슨 말이고 하니...


  목축이 발달한 유럽에서는 문명과 자주 충돌을 겪었던 동물이 늑대였을 거 아니야. 물론 그것이 늑대의 잘못인가 하면, 먼저 그들의 터전을 빼앗은 인류의 잘못을 따져볼 문제. 꿈에 나타난 늑대는, 문명화(사회화) 되기 이전의 원형질의 충동을 상징한다. 라캉의 상징계로 대변되는 문명에게 터전을 빼앗긴 에로스이기도... 우리나라의 설화와 민담에서는 호랑이가 그런 동물성의 상징이란다. 유럽에는 곶감에 패한 호랑이가 살지 않으니까.


   그런데 들뢰즈는 그 원형질이 복수의 다양체라고 말한다늑대는 여러 마리다즉 분자적이고 분열적 잠재성을 지닌 무의식의 에너지그것이 사회화의 조건 속에서또한 개인의 존재론적 환경 속에서하나의 인격으로 계열화된 시간 안에서 정립되어 간다고 본 것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우리의 무의식은 분열증의 양상이라는 것. 아직은 아무것도 확정되지 않은 혼돈의 잠재성에 대한 주제, 그것으로 그의 모든 키워드가 설명될 수 있기도 하고...

  누구나 내면에는 다른 자아를 지니고 있잖아. 그러나 그 심층에는 더 다른 ‘나’들로 엉겨있다는 거지. 우리는 그 원초적 에로스를 상징계적, 대타자적, 초자아적 질서 체계로 억압하면서 문명적 사회를 이루고 산다는 것. 물론 필요한 조율이긴 하지. 


  병원에 가면 의사가 과도하게 방어적인 진단을 내리곤 하잖아. 불미스런 경우에 대한 책임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물론 말 안 듣는 환자도 많지만, 또 의사의 말을 안 따를 수도 없잖아. 이렇게 권력화가 되는 경우를 푸코가 생체권력이라고 말한 거.


  같은 맥락에서 문명은 과도하게 우리의 자연성을 거세시킨다는 거지. 그리고 권력화 된 이데올로기를 정당하고 합당한 것으로, 때론 욕망하는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우리들.


  “내 말 들려? 아직 거기 있는 거 알아?”

  그런 영화들이 있잖아. 세뇌된 이의 지금에서 애타게 과거의 그를 불러보는... 그 목소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것일 때, 세뇌된 이는 고통을 겪으면서, 그 사람의 지키고자 하는 인격이 겨우겨우 튀어나와 다른 인격과 싸우는 장면.


  들뢰즈가 사랑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어쩌면 그런 뉘앙스인지도 모르겠다는, 프루스트에 관한 조금 다른 생각. 지금의 네 모습은 진짜가 아니라는 것. 사회적 가치에 세뇌당하지 않은, 여전히 사랑하고 열망하는 '너희'가 아직 거기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며 애타게 너를 부르고 있는, 너를 사랑하고 열망하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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