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
정도전의 <방김거사야거(訪金居士野居)>라는 시에는, 풍경을 넋놓고 감상하다가 ‘내 자신이 그림 속에 들어와 있음을 알지 못했다(不知身在畫圖中)’는 구절이 있다. 풍경을 그리는 화가 분들도 그런 느낌으로 임하는 작업이겠지? 이 분은 추억의 풍경에 동화(同化)가 되는 동화(童話)를 그리시는 것 같다.
미술을 지칭하는 용어로 굳어진 ‘미메시스’는 원래 ‘~되기’의 의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어보면 오늘날의 연극 이론에 가깝게 느껴지는 페이지들이 있다. 그 시절의 ‘시’ 장르는 무대 상연을 전제로 하는 종합예술적 성격의 것들을 포괄했으니까. 배우는 그 어떤 존재로도 될 수 있다.
아득하게 빨려 들어가는 듯한 예술 안에서 창조주 스스로 피조물이 되어보는 것. 그림 속으로 숨어들었다던 도교 신화와도 같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꿈의 기능이랄까? 그에 따르면 꿈의 기능은 본질적으로 예술과 다르지 않다. 현실에서는 붙잡히지 않는, 무의식에 일렁거리는 열망의 수렴, 그 승화와 치유. 예술가들의 만족도는 그런 꿈의 가치이지는 않을까?
그때 그 시절 난 꿈 많았지. 잃지 않을 줄로만 난 알았지.
하지만 내 길옆에 버려진 그 꿈들을 주워 담네.
문득 떠올린 유영석의 <그때 그 시절>이란 노래. 고즈넉한 풍경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저 풍경과 유년시절을 함께 했던 세대들이 아닐지라도, 무언가로부터 멀어지면서, 잃어버린지도 모르고 있었던 잃어버린 꿈들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이들에게... 어느 따뜻한 봄날에, 어느 뜨거운 여름날에, 어느 쓸쓸한 가을날에, 어느 하얀 겨울날에 꿈으로 피고 지던 하루. 그 동화의 시간을...
하여튼 요새는 이런 주제만 눈에 들어온다. 솔직하니 나 그렇게 순수하지 않거든. 그런데 어떤 부조리한 마음조차도 그 시절에 사랑했던 소년과 소녀를 향한 것. 현실에서는 덧없이 나이 들어가는 그들을 꿈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미메시스적 탈주. 소녀-되기, 소년-되기, 결론은 프루스트와 들뢰즈에게로... 그 되찾은 시간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