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예전에 진중권 교수의 트위터 계정이 unheimlich이었는데, 발음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게 독일어로 언캐니(uncanny)라는 뜻이란다. 프로이트의 저서에 언급되는 개념인데, 익숙한 것들에서 느껴지는 낯선 긴장감 같은 것. 로봇의 얼굴이 점점 사람에 가까워지면서 뭔가 을씨년스러운 거부감이 드는 단계를 넘어선 이후로는 보다 사람에 가까워지는 것. 헐리우드 CG 기술은 진즉에 이걸 넘어섰잖아. 이젠 실사화가 될 판. 로봇이 지닌 얼굴의 판도는 인공지능의 수준을 의미하기도 한다.
데카르트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 그는 인간을 사유하는 기계로 간주한다. 당시에 '기계'라는 키워드가 의미했던 바는, 나름 첨단의 과학이다. 수학자이기도 했던 그의 얼리어답터적인 면모는 17C 과학혁명의 중요한 공헌으로 인정되기도 한다. 아이러니는 데카르트의 사유가 여전히 첨단과학 이론과 맞물린다는 사실. 대표적인 경우가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가상현실과 복제인간의 스토리텔링. 이를테면 <공각기동대>나 <터미네이터> 등등.
데카르트는 꿈에서 지금 이 순간이 꿈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정말로 그 순간은 꿈이었다. 그렇다면 꿈을 깬 지금 이 순간도 꿈의 지속은 아닐까? 또 다른 깸이 있어서, 지금 이 순간을 꿈속의 일로 회상하는 어느 순간이 다가오지는 않을까? 장자의 호접몽적 모티브와도 같은 순간이 가져다 준 결론,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은 결코 의심할 수 없다.
데카르트의 철학을 '근대'의 좌표로 삼는 이유는, 그의 코기토에 의해 비로소 철학이 '신학의 시녀'라는 굴레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우리의 존재는 신에게서 온 것이지만, 사유 자체는 신에게 종속된 것이 아니라는 거지. 그렇게 신학에서 벗어난 철학으로부터 다시 한 번 분리된 과학도 혁명의 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제작자의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로봇들은 근대 이전의 인류다. 프로그래머는 신의 입장이다. 영화 속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이보그들은, 제작자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독립적인 지능을 탑재한 경우. 저 자신의 자유의지를 자각한 로봇들의 입장에서는 근대가 시작되고 있는 것. 이를테면 <공각기동대>나 <터미네이터> 등등. 정말 그런 시대가 다가오는구나. 먼 훗날에 돌아보면 지금이 저 종족들의 창세기 정도 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