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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편집장 Jan 10. 2022

해남, 상양, 북산의 유니폼 - 매직 존슨, 래리 버드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일러스트

  <슬램덩크>에서 지역 전통의 강호 해남과 상양, 그리고 신흥 강호 북산의 유니폼이 지닌 색은, 당시 NBA의 판도를 반영한 설정이었다.

이미지 출처 - yahoo.com

  80년대 초중반까지의 매직 존슨과 래리 버드의 라이벌 구도는, 전통의 강호 레이커스와 셀틱스의 에이스라는 점, 서부와 동부를 대표한다는 점, 특히나 흑인과 백인이라는 점에서도 매력도가 있는 스토리텔링이었단다. 


  이 두 레전드는 다 죽어가던 NBA를 부흥시킨 이들로 평가된다. 그들의 ‘악연’은 대학 때부터였다. 대학리그 결승전에서는 매직 존슨의 승리. 프로에 들어와서도 래리 버드에게는 그날의 패배가 하나의 동력으로 작용한다. 저 놈에게만큼은 지지 않겠다는... 각각 레이커스와 셀틱스를 이끌고 맞붙은 첫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래리 버드의 드라마틱한 승리. 래리 버드는 대학교 때의 패배를 설욕했고, 챔피언 결정전에서 7번을 맞붙어 7번을 모두 셀틱스가 이긴 역대 전적은 8번으로 늘어났다. 


  그 이후, 래리 버드와 맞붙는 경기와 그 이외의 경기가 있다고 인터뷰했을 정도로, 매직 존슨은 절치부심의 입장이었고, 결국엔 레이커스에게 9번만의 승리를 안기며 역사를 새로 썼다. 이후 래리 버드는 부상의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고, NBA는 매직 존슨의 시대가 되는 듯 했다.


  그러나 또 잘 나갈 때 찾아오는 재앙. 연고지가 헐리우드이기도 한 매직 존슨은 절제 없는 향락 속에서 에이즈 보균자가 되어 은퇴를 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 가장 실의에 빠진 선수가 래리 버드였단다. 그의 농구 인생은 언제나 매직 존슨에게 맞춰져 있는 열정이었기에, 그가 떠난 농구계는 그에게서도 의미가 없었다. 

  이 시기에 비로소 두 전설은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는 친구가 된다. 실상 매직 존슨의 붙임성 있는 성격은 래리 버드와 진즉부터 친구가 되고 싶어 했단다. 래리 버드가 나고 자란 인디애나는 KKK의 본거지, 그러나 래리 버드는 어렸을 적부터 동네 흑인 친구들에게 농구를 배웠을 정도로, 흑인에 대한 편견이 없었단다. 다만 그의 반듯하고도 유통성 없는 성격이 라이벌에 대해서는 거리감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단다. 그러다 보니 진심과는 달리, 과도한 승부욕으로만 일관하며 서로를 재수 없어하는 시기가 이어졌던 것이고...

이미지 출처 - usatoday.com

  이 시기에 비로소 두 전설은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는 친구가 된다. 실상 매직 존슨의 붙임성 있는 성격은 래리 버드와 진즉부터 친구가 되고 싶어 했단다. 래리 버드가 나고 자란 인디애나는 KKK의 본거지, 그러나 래리 버드는 어렸을 적부터 동네 흑인 친구들에게 농구를 배웠을 정도로, 흑인에 대한 편견이 없었단다. 다만 그의 반듯하고도 유통성 없는 성격이 라이벌에 대해서는 거리감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단다. 그러다 보니 진심과는 달리, 과도한 승부욕으로만 일관하며 서로를 재수 없어하는 시기가 이어졌던 것이고...

   한 번 경계가 허물어진 이후 누구보다 아끼는 친구 사이로 변해간다. 래리 버드는 자신에게 없는 스타성을 지닌 매직 존슨과 함께하는 시간이 재미있었고, 매직 존슨은 자신에게 없는 맺고 끊음의 확실함을 지닌 래리 버드를 존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의 농구 스타일이 같았다는 사실로 인해, 서로를 더욱 밀쳐낼 수밖에 없었던 세월에 대해서도 인정한다. 팀에서만큼은 그들은 팀원들의 장점을 최대한 살릴 수 있게 볼을 배급하는 에이스였지만, 라이벌에게는 여분의 배려심이 없었던 시간에 대해서도...


  영상은 래리 버드의 은퇴식에 참석한 매직 존슨.

이미지 출처 - kidssunnah.com
이미지 출처 - basketballnetwork.net

  이 라이벌 구도를 시대의 뒤안켠으로 돌려세우며 등장한 신예. 흑인에 대한 백인들의 편견을 깨부순 두 흑인이 마이클 잭슨과 마이클 조던이란다. 매직 존슨과 래리 버드가 언론과 대중이 부추기는 스토리텔링이었다면 마이클 조던에게는 ‘미학’까지 얹어졌다. 농구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찬사로 돌아본다면, 매직 존슨과 래리 버드의 경우는 문학의 경지였을까?


  마라도나보다는 호날두의 기술이 더 화려하잖아. 시대가 변하면서 그 영역의 세련미도 진화하기 마련. 그러나 농구 쪽에서는 아직까진 마이클 조던만큼 화려한 '포스트 조던'은 없었던 듯 하다. 지금 봐도 뭔가 다른 선과 태. 

  마이클 조던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는 동작이 어디 한 두개이겠냐만, 나는 이 덩크가 그렇게 인상적이다. 마이클 조던에게서밖에 가능하지 않은 우아함이랄까? 개인적으로 누구처럼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 별로 해본 적 없거든. 내 비록 글쟁이와 편집자의 삶을 택했으나, 앙드레 지드처럼 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런데 마이클 조던 같은 경우는, 한 번 저렇게는 살아보고 싶었어.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을 이야기하면서, 마르크스와 칸트를 빌려 ‘미학’적 삶에 관해 이야기하는 페이지가 있다. 인간의 삶이란 게 ‘공적’ 효율성만 가지고는 해명될 수 없다는 것. 그건 ‘노동’의 영역에서나 필요한 거지. 개인의 삶에는 효율로부터 소외된 미학의 요소도 필요하다는 것. 더군다나 현대사회는, 보드리야르가 말했듯, 그 미학이 되레 시장성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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