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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편집장 Jan 17. 2022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 노동과 작업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빨래 장면

  한나 아렌트는 노동(labor)과 작업(work)의 개념을 나누어 설명한다. 노동은 그저 생필품을 사기 위해 지속하고 있는 일로서, 일 자체의 의미보다는 생계가 주된 목적이다. 작업이란 그 자체가 목적으로, 지속해서 개선되어가는, 장인(匠人)으로서의 일. 고대 그리스에서는 노동과 작업으로부터 자유로운 이들이 자유시민이었던 것. 노동과 작업을 토대로 하는 경제가 가계의 범주로 한정된 사적영역이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그 경제가 사회의 공적영역으로 확장되면서, 모든 것이 경제논리로 돌아가다 보니 노동과 작업의 구분이 모호해졌다는 것.


  공적영역으로서의 경제가 모든 것을 재정립, 재생산하며 개인의 사적영역을 좌지우지한다. 가장 대중적인 벤야민의 주제는 대량복제시대에 개체에서 사라지는 ‘아우라’에 관한 것. 시장이 개인의 시간과 의미를 앞질러버린 시대에는, 개인의 스토리텔링이 사라진다. 벤야민에 따르면, 인식은 일종의 소유다. 그러나 그 또한 경제 논리에 의해 대량생산되는 소유인 실정. 지금의 시대에는 존재를 규정짓는 시간도 대량생산이 된다. 모두가 같은 것을 욕망하고 같은 곳만 바라본다.


  장하준 교수는 인터넷보다 세탁기의 발명이 더 큰 시간의 혁명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대가 점점 편리의 방향으로 흘러가도, 주부의 가사노동에 대한 부담이 줄지 않는 이유 중 하나. 예전에는 아이들을 그 마을에서 다 키웠거든. 동네 형아들 따라 다니다 보면 금세 하루가 지나가곤 했었는데, 오늘날에는 그 골목문화가 사라진 것. 공적영역이 사적영역으로 좁혀진 사례라고나 할까? 시대의 역설이랄까? 발전은 언제고 모순으로 터져나와 제 발목을 잡는다던 마르크스의 변증법.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을 이야기하면서, 마르크스를 빌려 ‘미학’적 삶에 관해 이야기하는 페이지가 있다. 인간의 삶이란 게 ‘공적’ 효율성만 가지고는 해명될 수 없다는 것. 그건 ‘노동’의 영역에서나 필요한 거지. 개인의 삶에는 효율로부터 소외된 미학의 요소도 필요하다는 것. 더군다나 현대사회는, 보드리야르가 말했듯, 그 미학이 되레 시장성이기도 하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면 중에 하나, 하울의 성에 줄을 걸고 빨래를 너는 목가적인 풍경. 가끔씩은 이런 일상적 풍경으로 이상을 표현하는 하야오적 코드, 결국 이상이란 것도 일상 위에 지어지는 것이 아닐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을 했다. 작품의 주제와 맞물린 하야오의 페미니즘을 걸고 본다면, 이 또한 남성중심적 감상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판타지 속에서도 일상을 살아가는 누군가의 모습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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