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뱅, 이문세, 소설 <붉은 노을>
난 너를 사랑하네. 이 세상은 너뿐이야!
소리쳐 부르지만, 저 대답 없는 노을만 붉게 타는데...
아침 7시. 내 영혼의 작은 친구, 미니 콤퍼넌트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멜로디. 얼마 전에 구입한 ‘이문세 골든 베스트’의 9번 트랙 <붉은 노을>, 내 알람 전용 음악이다. 져가는 계절 끝에서 이젠 제법 쌀쌀해진 창가로 스미듯 밀려들고 있는 하루. 아직은 푸르스름한 잔어둠이 남아 있는 내 방 안 가득히 울려대는 <붉은 노을>.
깨기를 거부하는 육신에게 기상과의 타협을 종용해 보지만, 이불 속의 온기를 조금이나마 더 느끼고 싶은 나태한 영혼은, 언제나 그랬듯 반사적으로, 머리맡에 놓인 리모컨을 집어 들어서 오디오를 끈다. 난 지금 학교생활에 너무 지쳐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나에게 평온한 휴식을... 이란 명분으로 뭉그적댐을 정당화하며 스스로를 설득해 보지만, 이대로 조금 더 뭉그적대고 싶은 의지는 합리의 명분 너머에서 들려오는 좀 더 솔직한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아~! 학교 가기 싫다.’
아무리 밥 먹듯 지각을 하는 놈이지만, 오롯이 잠으로만 늦잠을 실현해 낼 정도로 양심이 없지는 않다. 나름대로는 본능의 욕구와 교칙의 윤리 사이에서의 내적 갈등으로 눈을 감고 누워 있다가 결국엔 늦잠이 되는 것뿐이다. 아주 잠깐만 더 누워 있으려고 했던 것인데, 무심하게도 무정하게도 빨리만 흘러가는 아침나절의 시간은, 굳이 우주로 나가서 실험을 하지 않더라도 일상에서 체감할 수 있는 상대성 이론이다. 시간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흐른다.
어느덧 환히 밝아온 창가, 아직 충분히 채우지 못한 수면의 욕구를 밀어내며 얼굴로 쏟아져 내리는 아침햇살. 잠이 덜 깬 흐릿한 두 눈에 맺히는 눈부심이 여느 날의 아침과는 다르다. 하지만 언제고 느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너무도 따사로운 이 빛의 감촉. 그리고 언젠가 그랬듯이 몸에 와 닿은 조도(照度)의 의미를 파고드는 순간의 각성, 아울러 스며드는 당황과 더불어 새어나오는 탄식.
“십알! X됐다!”
이런 사태를 대비해서 시계의 알람까지 맞춰 놓았건만, 자신은 알람의 의무를 다했다며 시치미를 떼고 있는 듯한 시계는 이미 9시를 가리키고 있다. 내가 들을 수 있어야 그도 알람이지, 네가 그러고도 알람이냐며 녀석의 시치미를 성토해 보지만, 알람스위치는 애초부터 off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성토의 방향을 스스로에게 돌린다.
“에휴~! 이런 병신!”
우리 학교는 이미 2교시가 시작되고 있을 시간이다. 나는 이 지역에서 최고의 서울대 진학률을 자랑하는, 소위 지방 명문고라 불리는 학교를 다니고 있다. 어쩌다 내가 이 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었는지는 아직까지도 미스테리이지만, 결코 나의 염원이었던 학교는 아니었다. 하긴 학교라는 공간에 무슨 염원까지 들먹일 이유가 있겠냐만, 집에서 가까워 지망했던 1순위가 덜컥 걸려버린 것뿐이다. 그런데 이렇듯 맨날 지각이다. 명문대를 들어가는 학생들이 존재 이유인 것만 같은 이놈의 명문고, 그렇다고 학생이나 교사가 명문인 것 같지도 않은 이 명문고는 등교시간이 비상식적으로 이르다. 분명 명문대는커녕 대학 진학조차 힘든 학생들도 함께 다니는 학교이건만, 그들의 생활패턴은 전혀 존중해 주지 않는 이 통탄을 금치 못할 교육의 현장, 나는 그 비인간적인 제도의 폭력에 맞서고자 늘 지각을 한다... 고 둘러대기에는 오늘은 늦어도 너무 늦었다. 다른 학교들도 이미 1교시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시간이다.
교복부터 주섬주섬 걸치고 엄마에게 왜 깨우질 않았냐는 원망을 늘어놓을 심사로 방문을 열어젖히지만, 집안에는 아무도 없다. 엄마가 어디 갔을까보다는 담탱이가 어쩌고 있을까의 궁금이 앞서는 이 시점, 어쩔 수 없이 엄마를 용서하고 학교를 향해 궁극의 속도... 로 내달리고 싶지만, 어차피 지각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결정적 순간은 이미 지나버렸다. 1시간을 지각하나 2시간을 지각하나 담탱이의 지랄 정도는 같으니, 내 입장에서는 전혀 서두를 필요가 없다. 차라리 담탱이에게 아작이 날 것에 대비해 마음의 여유를 되찾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이, 쿠폰을 모으는 듯, 마일리지를 쌓는 듯, 지각을 해대는 나의 글러먹은 생활신조이다.
아침은 조금만 먹는다. 과도한 섭취로 인해 자칫 3교시 끝나고 먹어야 할 도시락이 맛이 없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의 지루하고도 따분한 하루 중에 그나마 활기찬 순간, 배가 고플 때 도시락을 까먹는 즐거움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나름의 안배이며 배려이다. 나름의 설득력을 지닌 논리를 펼치고 있다는 사실이 기특하면서도, 이 늦은 와중에도 목구녕으로 밥이 넘어가는 비합리적인 인생관으로 살아가는 나란 놈이다.
버스비도 아낄 겸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면서 배를 꺼트린다. 가방에 들어 있는 것이라고 해야 달랑 도시락 2개, 점심용과 저녁용 하나씩. 야간 자율학습은 왜 자율적으로 할 수가 없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도 이젠 지친다. 원래 그냥 다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 나라의 교육과 타협을 본 자율학습에 대한 정의는, 그냥 저녁 도시락을 배불리 먹고, 불편하게 책상에 엎드려 <박소현의 FM 데이트>를 청취하는 시간,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이런 저런 상념들과 함께 걷다보니, 어느새 도착해버린 학교 앞. 이젠 서서히 마음이 졸여온다. 오늘은 과연 몇 대를 쳐맞을 것이며, 몇 분 동안이나 쿠사리를 먹게 될 것인가? 지각을 어쩌다가 하는 편도 아니고, 이제는 익숙해지고 무뎌져질 만도 하건만, 담임과의 대면은 늘 어색하고 익숙하지 않다. 어슬렁어슬렁 걸어온 발걸음은, 학교 정문을 불과 50미터 앞두고서는 더욱 더 어슬렁거려진다. 마치 물속에서 수압을 가로지르며 걷고 있는 것 마냥, 힘에 겨운 걸음걸음을 내딛으며 다가선 정문 앞에서, 땅이 꺼져라 한바탕 몰아쉬는 한숨. 확인한들 지금의 상황이 변할 리도 없건만, 교정 가운데 우뚝 솟은 시계탑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마침 교내에 울려 퍼지기 시작하는 3교시 시작종, 젠장! 담임에게 실컷 욕을 먹다가 도시락을 못 먹게 생겼다.
마음을 다잡고 가까스로 교문으로 들어서려는 찰라, 나의 지각을 가로막은 광경은 칭칭 감긴 굵은 쇠사슬 끝에 달린 큼지막한 잠물쇠이다. 잠긴 교문 가운데에는 더 큼지막한 공지문이 한 장 붙어 있다. 오늘부로 이 학교를 폐교하게 되었단다.
뭐야? 대체 무슨 일이지? 아니 이럴 수도 있나? 아무리 밥 먹듯 지각을 하고, 말썽을 많이 부리는 학생이라지만, 학생에게 폐교에 대한 일언의 정보도 알려주지 않은 상태에서 폐교라니... 종례시간에 담임의 전달사항을 귀 기울여 듣는 편은 아니지만, 이런 규모의 사건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무심하지는 않다. 어제는 분명 땡땡이도 치지 않았는데... 하지만 학교는 나 몰래 폐교가 되어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를 몰라 그저 학교 담벼락에 기대어 그 너머를 두리번거리고 있다. 그 순간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수위 아저씨가 다가와 굳이 호통을 치면서 말한다.
“너희 학교는 여기가 아니잖아! 다른 교복을 입고 와야지!”
뭐래? 분명 여기가 우리 학교가 맞는데... ‘너희 학교로 돌아가!’도 아니고, 게다가 폐교된 학교에 다른 교복을 입고 오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린인가? 고개를 들어 다시 넘어다 본 교정은 정말로 우리학교의 풍경이 아니다. 방금 전에 시간을 확인했던 시계탑도 온데간데없다.
하지만 이 말도 안 되는 황당의 순간에 여지없이 고개를 드는, 말도 안 되는 나의 긍정적 인생관. 나에겐 지각을 변명할 수 있는 핑계가 생겨버렸다. 학교에 도착해보니 우리 학교는 폐교가 되어 있었는데, 그 폐교된 학교가 우리 학교가 아니었다는... 그런데 지금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더군다나 이 변명을 위해, 먼저 변명해야 할 우리 학교를 다시 찾아다녀야 할 판이다. 도대체 이게 뭐야? 비합리적 긍정으로도 도저히 어찌해볼 수 없는, 이 비합리적 순간에 찾아든 합리가 짜증이 날 지경이다.
나는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우리 학교를 찾아 발길을 돌렸다. 어디로 가야하는 것인지도 알지 못한 채, 다시 어디론가 어슬렁어슬렁 걸어간다. 몇 걸음을 가지 않아 들려오기 시작하는 귀에 익은 멜로디.
난 너를 사랑해! 이 세상은 너뿐이야!
소리쳐 부르지만, 저 대답 없는 노을만 불게 타는데...
학교 앞 레코드 가게에서 길가로 내놓은 외부스피커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는 <붉은 노을>이다. 그런데 여기에 레코드 가게가 있었나? 언제 생겼지? 의구심을 밀어내며 점점 더 선명하게 들려오는 기억 속의 멜로디, 그런데 이문세가 아니라 빅뱅의 <붉은 노을>이다. 지금은 1995년, 내가 왜 이 노래를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의심 없이, 레코드 가게로부터 멀어져가는 더딘 걸음. 하지만 계속 나를 따라오는 듯한, 볼륨이 더욱 커지고 있는 듯한 빅뱅의 <붉은 노을>.
- 민이언, 다반, 소설 <붉은 노을>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