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역설
사장님 : ‘먹는다’는 기표와 근원적인 욕망이 붙어 있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경우 거식증으로 이어지거나, 혹은 폭식증으로 가는 거죠. 거식증이나 폭식증이나 똑같은 현상이에요. 거식증은 공백을 먹는 증상이에요. 안 먹는 현상이 아니에요. 정신분석에서는 그렇게 해석을 해요.
대표님이 미팅 중에 나온 ‘공백을 먹다’라는 문구에 꽂혀서, 책의 제목으로까지 염두에 두고 있길래, 나도 한 번 관련 자료들을 살펴봤다. 라캉 이론의 주된 주제는 언어와 욕망의 상관이다. 우리 안에 자리한 원형질로서의 욕망은, 안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고 차오르고 있다는 것은 느끼지만, 도저히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성질이다. 그러나 이성의 존재인 인간은 뭔가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증상은 곧 불안이다. 인과는 아닐망정 상관으로라도 해명이 되어야한다. 그래서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것을 기어이 언어의 체계로 해명하려 든다.
언어의 세계란 말과 글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언어를 도구로 하여 인식하는 세계 전반을 이른다. 이것이 라캉이 말하는 상징계의 속성이다. 언어는 그 사회가 공유하는 기호이기에, 이 언어가 타자의 담론을 실어 나르는 매개이기도 하다. 즉 라캉은 한 사회가 공유하는 메커니즘의 원인을 언어로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화 될 수 없는 근원적 욕망이 언어로 해석될 시, 그 사회가 공유하는 가치체계를 주체적이지 못한 태도로 욕망하게 된다는 것. 이것이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들끓고 있는 근원적 욕망을 명확히 해독할 수 없기에, 그 사회의 성원 모두가 욕망하는 가치들을 나도 욕망함으로써 느끼는 대리만족으로, 그 근원적 욕망이 해소되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대리물에 불과하기에 본질적인 해소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모색한다는 것이, 고작 그 대리물을 계속해서 바꾸는 것이다. 반복되는 이야기이지만, 라캉의 페이지에서 이것이 환유연쇄니 욕망 자체를 욕망한다느니 하는 증상이다.
실상 학생들은 등골브레이커 자체를 욕망하는 게 아니다. 그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관계의 문법으로부터 소외되지 않으려 누구나 욕망해야 하는 것이다. 이 평준화에서 자기 존재감을 확보하려면 구스의 함유량이 보다 높은 디테일로 치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실상 그런 돈지랄이 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것 이외에는 자존감을 확인할 수 있을 방법론을 잘 모르는 것이다. 특히나 조기교육에서부터 상징계적 문법으로 옭아매는 한국사회는 그런 방법론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그래서 그토록 공허한 욕망들만을 양산해내고 있는 것이다.
거식증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단다. 그 중 하나가 날씬한 체형을 선호하는 사회분위기가 투영된 갈망이다. 이는 곧 ‘날씬한’의 기표를 욕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언어적 욕망을 갈망하는 결핍감 자체를 계속 섭취하는 것. 때문에 거식증은 대부분 폭식증을 동반한단다. 체중 증가에 대한 두려움으로 먹고 토하고 먹고 토하다 나중엔 몸이 음식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수순이다. 그러니까 단순히 음식을 먹고 안 먹고의 문제가 아니라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공백이 몸을 상하게 하는 것. 사회의 증상이라는 점에서 그 사회도 아픈 것이다.
마네킹이 걸치고 있는 것들은, 쇼윈도 밖의 거리를 진단하는 체크리스트이기도 하다. 마네킹이 걸치고 있는 것들 중에, 내가 무엇을 지니고 있는가로써, 거리를 걷고 있는 군중들 안에서 자신의 좌표를 확인한다. 보드리야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쇼윈도는 건물의 안이면서도 동시에 이미 길로 나와 있는 공간이다. 마네킹이 지닌 바디라인부터가, 많은 이들이 그 기준에 근접하고자 운동을 하게 하는 우월적 평균치이다. 이로써 휘트니스 산업은 클럽들끼리의 경쟁이 심화될지언정 영역 자체는 유지가 된다.
분명 각자의 미학과 각자의 신체를 지닌 이들에겐 정당하지 않은 기준이다. 그러나 그것을 거부할 수만도 없는 이유는, 단순히 패션과 관련한 열정에 그치는 것이 아닌, 그 기저에 이미 이런저런 자본사회의 욕망이 얽혀있는 복합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그 사회 내에서 위계를 상징하는 기호이기도 하다. 아무리 그런 현상의 부조리를 비판해 봐야, 우리나라의 대학 서열을 평준화시키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사장님 : 인간은 누구나 자기 욕망의 체계 속에 결여를 지니고 있단 말이죠. 그 결여를 메우려고 한단 말이에요. 명품으로 메우려고도 승진으로도 메우려 해봐도 결코 메워지지 않죠. 나는 승진하면 좋아질 거야, 차를 바꾸면 좋아질 거야, 집을 사면 좋아질 거야 하지만 영원히 안 좋아지다가 절망하는 거거든요. 욕망이 잘 안 맞는 거거든요. 내 욕망의 체계와 세상의 규칙이 안 맞는 거예요. 내 욕망은 IBM인데, IOS가 깔려 있는 거예요. 세상이 살라고 하는 방식대로 살려고 하면, 내가 너무 힘이 든 거예요. 몸하고 맘하고 받아들이는 세계가 안 맞는 증상이죠.
현대자동차에 다닌다는 그 친구 놈에서 듣게 된 오빠차와 아빠차 개념. 오랫동안 중형세단의 대명사였던 소나타가 요즘에는 젊은 세대를 겨냥하는 디자인으로 출시가 된단다. 예전에 비해 가격이 많이 떨어진 외제차와 경쟁을 해야 하고, 또 아반떼 급은 잘 팔리지가 않는단다. 때문에 요즘은 소나타가 '오빠차'가 된 현상의 연장에서 그랜저가 '아빠차'가 되었다고….
경제는 어렵고 가계부채는 늘어나는 와중에도, 세상 어딘가에서는 오빠들과 아빠들이 예전보다 더 큰 극간으로 상품의 ‘기호가치’를 구매하는 시대. 내 개인적인 짐작으로는 ‘오빠차’, ‘아빠차’의 프레임도 자동차회사의 마케팅 전략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젠 사회적 지위를 증명하는 사물로서라기 보단, 다소 위계를 낮춘 오빠와 아빠의 기표로서 불황을 돌파하려는…. 더 이상은 '멋지게 사셨군요'라는 일생에 관한 문구가 아니다. 오빠로서 그리고 아빠로서 이 차를 소유해야 하는 것이라는, 일상으로 침투하는 담론이 관건이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던 보부아르의 테제를 뒤집은 경우라고나 할까? 남자도 시장에 의해 그 성숙도가 미리 지정된다. 오빠이거나 아빠이거나….
- 민이언/박상규, 다반, <우리 시대의 역설>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