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일화
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일화 하나. 한창 집필에 몰두하고 있는 시간에 작업실로 놀러오는 아이가 방해된다는 생각에, 그는 한 잡지에 실려 있던 세계지도를 가위로 조각을 낸 후 아이에게 맞추게 한다. 아이로 하여금 몰두하게 할 수 있는 퍼즐의 미션을 던져준 후에 자신의 시간을 갖겠다는 꼼수였다.
세계의 지형에 대한 선지식이 없던 아이에게 지도의 퍼즐조각 완성은 상당한 시간을 요구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아이는 짧은 시간 내에 과제를 완성한다. 아이에겐 세계에 대한 정보가 없었지만, 아빠가 지도를 조각내기 전에 세계의 지형 곳곳에서 사람의 형태를 발견하고 그 이미지화 된 기억으로 퍼즐을 맞춰나간 것. 보편적 표상으로서의 지식은 없었지만,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법(畵法)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이를테면 이 경우가 베르그송이 언급한 ‘이마주’의 사례. 영어로는 이미지, 사물 자체와 보편적 표상 사이에서 조금은 더 개인적인 심상. 우리가 일상에서도, 그가 어떤 표상이다의 경우와, 그의 이미지는 어떻다의 경우가 조금 다른 뉘앙스잖아.
그 구성력의 도구가 ‘시간’이다. 베르그송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미지란 현재인 동시에 과거다. 지각되는 현재 안에는 이미 과거의 기억이 존재하며, 현재의 우위는 사라진다. 현재는 이미 과거다. 시점을 바꾸어 표현하자면, 내 눈앞에 스치는 순간들이 곧 미래가 될 기억이기도 한, 하이데거로 설명하자면 ‘존재와 시간’이라는 것. (명리학에서는 편인/정인의 속성)
서양철학사에서 들뢰즈를 설명할 때, 흔히들 스피노자 - 니체 - 베르그송의 계보로 부연한다. 들뢰즈는 ‘표상’을 ‘이미지’로 대체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해결 방식은 어떤 모범답안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체화되어 있는 시간에 따라 그 해법도 다르다는 취지. 베르그송 철학에선 이런 순환의 양태가 ‘지속’ 개념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들뢰즈에게 와서는 ‘차이와 반복’이 되는 거지. 들뢰즈는 이 개념으로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와 니체의 영원회귀를 설명하기도 한다.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기억’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인식과 존재의 토대, 그 기억 안에서 세계는 새로운 기억으로 쌓여간다. 화가들이 겪어온 화풍의 변화를 예로 들자면, 그들의 손에서 발현되는 기술은 무의식을 경유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변화라는 것도 의식의 다짐만으로는 되는 건 아니겠지. 신체에 새겨진 기억은, 단지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 다분히 유물론적이기도 한 사물과의 교감, 그로부터의 기억, 그 대표적인 연대기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 관한 해석에 정신분석이 들러붙는 거. 그리고 베르그송이 프루스트의 사촌 매형인가 그렇다. 영향이 없었던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