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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편집장 Dec 13. 2022

미셸 푸코, 알쓸인잡 - 니체의 초인

들뢰즈의 노마드

... 이는 최근에 이루어진 인간의 출현에 우리가 너무나 눈이 멀어서, 세계와 세계의 질서 그리고 인류가 존재했지만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를 그리 오래전이 아닌데도 이제는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래지 않아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초인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임박한 사건의 형태로, 약속 겸 위협의 형태로 예고한 니체의 사유가 왜 전복의 힘을 지닐 수 있었고 지금까지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지 쉽게 이해되는데, 회귀의 철학에서 이는 인간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사라지기 시작했고 끊임없이 사라지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인간에 대한 우리의 근대적 사유, 인간에 대한 우리의 염려, 우리의 인본주의가 천둥처럼 요란하게 울려오는 인간의 비(非)존재 위에서 평온하게 잠자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 - 미셸 푸코, <말과 사물>, 이규현 역, 민음사, p441 -


  근대 이전의 전제는 신학이었잖아. ‘인간’을 연구하는 사회학, 심리학, 생리학, 문학과 철학으로서의 주제는 근대 이후에나 등장한 것들. 요새 ‘알쓸인잡(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인간 잡학사전)’이 방송되던데, 이런 자리에서 사해동포주의를 말하진 않을 거 아니야. 그렇듯 인류와 인간의 주제를 대하는 태도는 다르다는 거지.

  니체가 신에게 죽음을 언도한 이유는, 삶 저편으로의 연장을 고민하기 보단 차라리 유한성의 전제 안에서 신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남으로써 진정한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취지. 죽음 이후의 보상에 대한 기대로 인해, 한 번 뿐인 인생이기에 지금 그것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종교에 저당잡힌다는 거야. 물론 지금과는 많이 다른 당대의 기독교 사회였으니까. 


  그럼에도 니체에게선 ‘인간’은 하나의 클리셰다. 담론과 질서의 명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을 안정으로 끌어안는... 니체는 ‘중력’에 빗댄다. 그 반복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쟁취할 수 있는 초월의 역량을 ‘초인’이라고 말했던 것. ‘아모르 파티(Amor fati)’란 삶이 가져다주는 우연을 사랑할 수 있는 용기이기도 한 거야. 권태로의 회귀를 정당화하며 끌어안는 게 아니라. 하여 그 계보로서의 들뢰즈가 매사 ‘탈주’를 이야기했던 것. ‘노마드’도 그런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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