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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편집장 Dec 21. 2022

롤랑 바르트, <글쓰기의 영도> - 오르페우스의 꿈

해체주의

사유는 어떤 무(無) 속에서 말을 배경으로 행복하게 솟아오르는 것 같았는데, 이런 무로부터 출발한 글쓰기는 점진적인 응결의 모든 상태들을 통과했다. 우선 시선의 대상, 그 다음으로 만듦의 대상, 끝으로 파괴의 대상이었던 글쓰기는 오늘날 마지막 변신인 부재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글쓰기의 영도(零度)’라 불리는 그 중립적 글쓰기들에서 쉽게 식별될 수 있는 것은 어떤 부정의 운동 자체이고, 지속 가운데서 그 글쓰기를 완성할 수 없는 무력감이다. 마치 한 세기 전부터 계승 없는 어떤 형태를 통해 자신의 외면을 변환시키려고 하는 문학이 결국은 문학 없는 작가라는 저 오르페우스적 꿈의 완성을 제안하면서 모든 기호의 부재 속에서만 순수성을 발견하고 있기라도 하듯 말이다. 예컨대 카뮈의 글쓰기, 블랑쇼의 글쓰기 혹은 케롤의 글쓰기 같은 백색의 글쓰기, 아니면 크노가 말하는 글쓰기는 부르주아적 의식의 분열을 따라가는, 글쓰기에 대한 하나의 고유한 정열(Passion)에서 마지막 에피소드이다. 


- 롤랑 바르트, <글쓰기의 영도> 서문, 김웅권 역, 동문선 -



  제목은 익숙한데, 처음 읽어보고 있다. ‘오르페우스적 꿈’이라는 게 뭔 의미일까 싶어서 구글링을 해봤다가, 한 논문을 읽고서야 겨우...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오르페우스가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데려오기 위해 지옥으로 내려가,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앞에서 감동적인 연주로 간청을 했던 일화. 하데스가 아내를 풀어주며 내건 조건은, 지상에 당도할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것이었잖아. 오르페우스는 끝내 뒤를 돌아보고야 말았고... 이는 신에 대한 의심, 사랑에 대한 의심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죽음으로부터 삶으로의 해방을 이루지 못했다는 의미. 그러니까 오르페우스의 꿈이란, 그가 이루지 못한 이상을 의미한다. 롤랑 바르트의 글들을 대개 라캉을 경유한다. 라캉의 정신분석에서 ‘죽음 충동’이란 건, 문화적 사회적 타자적 클리셰로부터 탈주하여, 실재를 향유하고자 열망이다. 다시 말하자면, 담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상징적 죽음, 그것이 에로스적 가치라는 거야.


  글쓰기에서도 클리셰는 죽은 글쓰기라는 것. 당대의 세대가 공유하고 있던 해체의 기치.


  부르디외는 칸트의 미학을 부르주아의 미학으로 간주한다. 타인과 자신을 구별지으려는 본능, 그런데 개성으로 발휘되는 게 아닌 일부 계층에게 특권의 담론으로 소유되는 경우가 있다는 거지. 롤랑 바르트는 대표적으로 부르주아 문학을 예로 들고 있다. 어떤 모범으로 간주되는 것들을 공유하며, 각자의 가치로는 분열되지 않는 것. 그걸 해체하는 글쓰기. 


  그러나 하이데거가 말하듯, 시간과 기억으로 정립된 존재들에게 순수한 無가 가능한가의 문제. 하여 오르페우스의 꿈과도 같은 이상. 작가의 업을 열망하는 이들은 공감할 이상. 늘 그게 그거인 것 같은 자신의 클리셰를 벗어나고자 단 한 줄을 고민하는 시간들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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