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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편집장 Dec 23. 2022

롤랑 바르트 - 랑그, 빠롤, 문체, 문채

글쓰기의 영도

... 문체는 결국 은유일 따름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작가의 문학적 의도와 육신적 구조 사이의 방정식일 따름이다. (이 구조는 어떤 지속의 침전물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문체는 하나의 비밀이다. 그러나 그것의 근거의 침묵적인 측면은 언어의 유동적이고 끊임없이 유예적인 성격에 기인하는 게 아니라, 그것의 비밀은 작가의 육체 속에 갇힌 추억이며, 문체의 암시적 효과는 언급되지 않는 것이 여전히 언어의 대행 노릇을 하고 있는 파롤에서와 같은 속도의 현상이 아니라 밀도의 현상이다. 왜냐하면 문채(figures)들 속에 단단하게 혹은 부드럽게 결합된 문체를 통해 똑바로 심층적으로 버티고 있는 것은 언어에 절대적으로 낯선 어떤 현실의 단편들이기 때문이다. ... - 롤랑 바르트, <글쓰기의 영도>, 김웅권 역, 동문선 - 


  글쓰기에 관한 글인데, 이 양반의 글도 읽기가 만만치 않지? 프랑스 철학들이 대개 이렇다. 왜 그런 기억 있지 않아? 수능 영어 시험 보다 보면, 모르는 단어는 하나도 없는데 해석되지 않는 문장. 뭐 그런 느낌.

  신체를 언급했단 건, 그만큼 경험으로 체화하는 지분도 크다는 거지. 김수영 시인은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라 했으니... 그게 문체라는 것. 글쓰기란 언어의 조합만 따지는 게 아니라, 개인의 기억(문체)이 관여하는 작업이라는 것. 


  파롤이라는 건...

  “잘 하는 짓이다.”

  이 말의 의미가 ‘Good jod’은 아니잖아. 그런데 ‘잘 한다’는 의미로서의 언어적 구조는 전제되어 있는 거지. 랑그(langue) 개념은 구조에 관한 것이고 파롤(parole)은 맥락에 관한 것. 


  언어의 중요한 기능은 소통이지. 사용설명서를 바르트의 문체로 써 내리면 어디 사용하겠어? 물론 그런 글도 필요하지만, 또 어떤 장르의 글들은 의미의 소통(파롤)만 갖고 되는 게 아니잖아. 같은 의미를 자신의 미학으로 승화시키는 게 작가의 고민인 거고... 그래서 뒤이어 문채(文彩)가 언급되고 있는 거지.


  그런데 바르트가 말하는 글쓰기의 희열이란, 자신의 클리셰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채를 창조하는 순간에 있다는 거야. 물론 그것이 쌓이고 쌓인 후에 돌아보면, 또한 문체를 이루는 시간성이겠지만... 그래서 작가에게 희열은 순간이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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