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의 사고>
사실상 개념의 한계 설정이란 언어마다 다르다. 프랑스 백과전서에서 ‘명사’라는 항목의 필자가 이미 18세기에 정확히 관찰한 바와 같이 추상적 언어의 사용은 그것이 지적 능력의 수준을 나타내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민족사회 속의 특정 집단이 지니고 있는 관심의 차이에서 온다. ... 결국 이 장의 첫머리에서 언급한 이른바 ‘원시인의 언어’에 대한 관찰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것을 근거로 해서 그 언어들에 일반적 개념들이 결여되어 있다고 단정지을 순 없다. ‘참나무’, ‘너도밤나무’ 혹은 ‘자작나무’ 같은 말들이 ‘나무’라는 말보다 특별히 더 추상적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나무’라는 어휘 하나만을 갖고 있는 언어는, ‘나무’라는 어휘는 없지만 그 대신 수많은 개별 종과 변종에 대한 명칭을 가진 언어에 비해 개념들이 풍부하지 못한 언어라고도 할 수 있다. - 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 안정남 역, 한길사, p51 -
김영하 작가가 박경리 작가로부터, 넌 어떻게 식물 이름도 제대로 모르냐며 타박을 받은 적이 있단다. 그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단지 시적 표현으로만 이해할 것도 아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그 풍경 ‘산’이란 전체성으로 스쳐가진 않잖아. 나무와 나무 사이에 흐르는 모든 생명의 시간, 그 개체들의 총체인 거지. 반면 산에 별 관심이 없는 이들에게야 그냥 풀과 나무가 있는 거잖아.
어떤 원시부족에게는 ‘나무’라는 상위개념 없이, ‘참나무’, ‘너도밤나무’, ‘자작나무’처럼 개체를 지시하는 단어들만 있단다. 서구문명에서는 그 기저에 흐르는 개념과 원리가 중요했던 거잖아. 그 대표적인 영역이 과학과 수학이고... 때문에 서구의 기준에서 볼 때 원시부족의 언어 체계가 미개하다고 여겼다는 거야. 그러나 레비스트로스의 연구로는 그들의 생활 체계 내에서는 그런 상위개념이 필요치 않았다는 거야. 대신 문명의 언어보다 더 감각적이고 구체적이라는 거지.
이런 성향은 무언가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도 나타난다. 후설과 하이데거와 사르트르를 굳이 현상학과 실존으로 묶지 않는다. 그냥 후설인 거고, 하이데거인 거고, 사르트르인 거지. 일본의 아니메 화풍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이 다르고, 신카이 마코토의 빛이 다르고,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시간이 다른 것을...
인류학자로 분류되지만서도, 서양철학사가 실존주의에서 구조주의로 넘어가는 계기이기도 하다. 또한 서구 사유의 자기 반성이 시작된 계기이기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