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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편집장 Nov 20. 2021

밀란 쿤데라, <소설의 기술>

세르반테스와 데카르트

"나에게 있어 근대의 창시자는 데카르트만이 아니라 세르반테스이기도 한 것이다."


<소설의 기술>에 적혀 있는 구절. 그 해석은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철학적 소양을 지닌 문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문장이기도...


과학혁명으로도 이어지는 데카르트의 공로는, 당대 기독교 사회가 지니고 있던 신앙의 관성으로부터 이성적 사유를 분리해 낸 시도다. 그러나 실상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순간들의 지분이 더 많은 삶. 니체 이후의 현대철학들은 그런 무시간적 진리를 인간의 삶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는 관점주의를 표방한다. 우리는 원리 그 자체 보다는, 그것을 둘러싼 맥락을 살아간다. 이것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주제이기도...


쿤데라가 언급한 세르반테스는 비합리적이고도 모호한 경계를 살아가는 인간사에 대한 상징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망정, 우리도 적지 않은 삶의 순간에 돈키호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비합리적 착시로 고집스럽지 않던가. 쿤데라의 저 어록 뒤로는, 인문사의 어느 순간부터 그런 실존적 맥락을 문학이 맡아 살피기 시작했다는 부연이, 하이데거 철학의 인용과 더불어 적혀 있다.

철학은 그 비합리적이고도 주관적인 각자의 '차이'를 해명한다. 그러나 문학은 그저 보여준다. 문인들의 철학적 직관은 삶과 사람이 지닌 모순과 부조리를 그대로 서술할 뿐, 그에 대한 대답은 독자들이 스스로 고민하게끔 한다.


물론 시절이 다르고, 문학이 점하고 있는 지위도 다르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깃든 철학적 소양이 오늘날에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를 묻는 이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또 철학적 직관을 증명할 만한 문학적 레토릭은 다들 욕망하는 바, 철학과 문학까지는 아니더라도, 철인과 문인이 적어간 삶의 기술(記述) 정도는 읽어볼 필요가 있는 이유. 하이데거니 쿤데라니를 들먹이면 일단 폼은 좀 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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