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
無極而太極
끝이 없으면서도 가없는 끝이다.
송대 유학자인 주돈이(周敦頤)가 <태극도설(太極圖說)>에 적어 놓은 구절. 주돈이의 계보는 정호(程顥), 정이(程頤) 형제를 거처 주희(朱熹, 주자)에게로까지 이어진다. 성리학을 정주이학(程朱理學)이라고도 부르는 이유이기도... 성리학은 소위 도학(道學)이라고도 불린다. 공자와 맹자를 잇는 적통의 입지이지만, 성리학의 선구가 되는 주돈이부터가 도가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실상 도가 철학에 관심을 가졌던 유학자는 주돈이 뿐만은 아니다. 순자(荀子) 역시 도가 철학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고, 그의 제자인 한비자(韓非子)는 최초로 노자의 해설서를 남겼다. 주돈이 계열이면서도 유학의 ‘집대성’이란 브랜드파워를 지니고 있는 주자 역시 도가 철학에서 유학이 나아가야할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했다.
같은 계열에서도 이런 사유체계와 견해를 달리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육구연(陸九淵). 그리고 주희와 육구연의 이른바 ‘주륙논쟁’의 단초가 되는 구절이 바로 無極而太極이다. 육구연의 비판은 간단한 요지, 너무 이단의 학풍이라는 것. 無極이라는 단어 자체의 출처가 <도덕경>이고, 문장의 구조가 <도덕경>의 無爲而無不爲라는 구절이 연상될 정도로 비슷했기 때문이다.
현대적으로 서점가의 비유를 들자면, 라다크 사람들의 평화롭고 여유로운 삶을 적어 내려간 원고가 <오래된 미래>라는 제목으로 출간이 되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자, 업계의 라이벌이었던 출판사가 인디언들의 평화롭고 여유로운 삶을 ‘망각된 기억’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편집자가 우리는 자존심도 없냐며 브레이크를 건 격.
그러나 평화와 여유, 느림의 화법이 지배해버린 출판 시장에서 트렌드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던가. 주자 자신도 자신의 철학에 녹아 있는 도가적 색채를 자각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다만 주자가 활동한 송나라 시절에 이미 만연해 있던 트렌드에 발을 맞추고자 했던 노력이었다.
주류 지식인들의 질서는 유학으로 유지되고 있었지만, 불교와 교류하면서 한층 더 깊어진 도가의 관념은, 당시 지식인들에게 너무도 매력적인 사유였다. 시대의 화법을 모르는 것도 지식인으로서의 게으름일 수 있는 법, 그래서 주자는 도가와 불교의 사유를 빌려 공맹을 해설한다.
육구연이 순수유학의 기치로 시대의 흐름을 거부하기에는, 우리가 성리학의 키워드로 알고 있는 理 개념 자체가 불가에서 전해졌고, 氣 개념 또한 원래 도가의 것이란다. 비전공자들이 읽으면, 주자와 뭐가 다를 게 있나 싶을 정도로, 육구연의 사유체계도 상당히 관념적이다. 유교의 본질이 아닌 것을 비판하던 유학자의 논리 속에도, 이미 유교가 아닌 불순불이 섞여 있었던 셈.
나중에 가서는 공리공론으로 변질이 되기도 했지만, 조선조 성리학의 이기(理氣)와 성정(性情)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이다. 실상 공자와 맹자의 철학은 그다지 고도의 이해력을 요하는 텍스트는 아니다. 그보다는 삶으로 공감할 수 있는 금언적 화법에 가깝다. 그 금언의 화법을 해석하는 성리학적 방식들이 관념론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를테면, 해석이 그다지 어렵지 않은 니체의 금언을 들뢰즈가 칸트의 관념론을 빌려 저 자신의 '차이와 반복'으로 나아가는 식. 당대의 지성들에게는 얼마나 멋있는 사유였겠나. 그 고도의 관념론을 특화시킨 조선 성리학자들의 사유는 주자의 후학들도 감탄을 자아냈던 바. 이런 성리학의 기점이 되었던, 無極의 출처가 되는 <도덕경> 구절은 다음과 같다.
知其白 守其黑 爲天下式
爲天下式 常德不忒 復歸於無極
밝음을 알면서도 그 어둠을 지키면 천하의 모범이 된다. 천하의 모범이 되면, 항상 지키고자 하는 덕에서 어그러지는 일이 없을 것이니, 다시 무극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