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 번, '왼손은 거들 뿐'
아주 오랜만에 고등학교 친구들과 모여 술잔을 기울였던 어느 여름날. 친구 중 한 놈이 사회인 농구협회 임원을 맡아보고 있는 터라, 술자리에서 농구 이야기가 이어졌다. ‘왕년’의 추억에 취해 서로가 서로를 고무시키는 분위기가 불안하다 싶더니, 결국 술을 마시다 말고 농구를 하러 갔다.
모두가 농구광이었던 그때 그 시절에야 낯설지 않은 광경이었지만, 이 미친놈들은 아직도 지들이 17살인 줄 안다. 옛날에 곧잘 덩크도 작렬시키던 녀석은 이제 바닥으로부터 한 10cm를 뛰는 것 같다. 현란한 드리볼과 재빠른 돌파로 상대를 유린하던 녀석은, 잠깐의 질주에도 욕지기가 올라올 판이다. 외곽슛은 아무도 안 들어간다. 그래도 게임을 뛰다보니 보니 어렴풋이 옛날 가닥이 나온다. 여전히 몸이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서로가 서로를 대견해한다. 저 자신에 대해서는 더욱 대견한 듯.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았다는 듯 내내 즐거워하던 그 모두가 정말로 17살로 돌아간 듯 했던 아주 잠깐. 이젠 쏟아 부을 수 있는 열정이란 게 고작 그 정도다. 그저 몸이 기억하는 대로 충동에 충실해 보는 잠깐. 그 결과가 내일 아침의 근육통일지라도…. 아주 오래 전에 떠나보낸 여름날을 되찾아오기에는 이젠 너무도 후달리는 체력, 또 한 해의 여름을 보내주어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프면서도, 그래도 17살의 기분으로 37살의 여름을 놓아준 어느 날. 이젠 그날의 기억도 꽤나 멀어진 날들 속에 자꾸 잊어가는 우리의 옛 모습들.
내 또래들의 학창시절엔 그야말로 농구 열풍이었다. 체육선생님이 공만 던져주면 알아서 놀았던 시절의 교육과정에선, 농구골대를 차지하지 못한 녀석들이 축구를 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전교 1등과 전교 꼴지가 따가운 햇살 아래 미끄덩거리는 살을 맞대고 어울리던 유일한 시간이기도 했다. 나이키는 에어조던 시리즈 하나로 아디다스와 리복을 저만치 따돌리고 앞서가고 있었다. 뻔히 가지 못할 대학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연고전에는 어찌나 환호를 쏟아냈던지….
매주 화요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슬램덩크>가 연재되던 주간만화잡지의 발행일에는, 반의 모든 아이들이 야자시간을 기다렸다. 그날이면 열혈 독자였던 친구 한 놈이 석식 시간을 이용해, 학교 근처의 서점에서 이번 주의 이야기를 사들고 왔기 때문이다.
“서른 살이 되어도 우린 이러고 있을까?”
친구들 모두가 군에서 전역을 하고 다시 모였던 어느 날, 또 한바탕 내일이 없을 것처럼 열정을 불사르고 난 뒤 서로에게 던졌던 질문인 동시에 그 자체로 대답이었다. 미래의 모습도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거라는 한심함으로, 하지만 서른의 시간이 다가와도 서로가 서로의 곁에 있을 거라는 애틋함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깔깔대며 나누었던, 이젠 자못 먼 시간 너머에 두고 온 우리들의 대화.
그러나 서른 살이 되던 해에 우리는 ‘이러고’ 있지 못했다. 다들 저 사는 게 바빠서, 한 곳에 모여 ‘이러고’ 있을 수 있는 기회조차도 그 해에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던 기회를 통해 깨닫게 된 건, 그 순간이 ‘이러고’ 있을 수 있었던 우리의 마지막이었다는 사실. 이젠 그때처럼 자주 모일 수도 없을뿐더러, 모인다 해도 그 장소가 농구 코트는 아니다. 그 뜨거웠던 날들에 청춘의 온도만큼으로 불사르던 열정은, 이젠 지겹도록 반복하는 회상 속에서만 애틋할 뿐이다.
<슬램덩크>의 마지막 시퀀스에서는, 파노라마처럼 스치는 학교의 풍경들 사이로 채소연의 내레이션이 들려온다. 그런 일상성의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기에, ‘난 천재니까!’의 마지막 페이지가 더 뭉클했던 것 같다. 정말로 우리 곁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현실 같아서…. 이 만화의 연재가 종료되던 날, 마치 내 인생의 한 막이 끝나는 듯한 아쉬움으로 놓아주었던 기억. 이미 그리고 어느덧 벌써, 20여 년이 지나버린 이야기.
17살의 어느 날로부터 우리는 이렇게 멀어져가고 있는데, 다시 펼쳐본 페이지마다에서 강백호는 여전히 17살의 어느 날을 살아가고 있었다. 강백호와의 재회가 반가우면서도, 17살로부터 이렇게 멀어진 나의 시간이 서글프기도 했다. 초벌 원고를 마무리하고 다시 한 번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에는, 17살의 어느 날에 강백호를 남겨두고 나의 시간으로 떠나오는 듯한 아쉬움까지 느껴야 했다.
돌아보고 둘러보면, 학창 시절에 함께 했던 모든 것들이 시간의 뒤안켠으로 사라졌다. 푸른 열정 같은 건, 이미 세상의 잿빛 냉정에 식어간 지 오래, 우리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 있다. 꼴에 어른이다. 이젠 꿈이라는 말도 함부로 꺼낼 수가 없는 처지, 어깨에 짊어진 이런 저런 현실이 비상(飛上)의 꿈보다 무거운 중력이다.
그러나 가끔씩은 지금의 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을 꿈꿔보기도 한다. 꿈은 미래를 향한 것만은 아니다. 뒤돌아선 꿈, 나의 방법론은 <슬램덩크>였다. 공허하기도 애잔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그 꿈속에는 온전한 내가 있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몽상이고 망상일지언정 밝은 미래만을 상상하던 17살의 내가 있다.
저 푸른 허공에 그린 아름다운 포물선에 담았던, 지나간 날들의 꿈과 열정, 그리고 사랑과 희망. 한 번 쯤은 삶에 힘을 빼고, 딛고 있는 일상의 중력에서 벗어나 그리운 공간으로의 점프. 그 최정점에서 저 하늘을 향해, 다시 한 번 왼손은 거들 뿐!
- 다시 쓰는 <슬램덩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