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과 키에르케고르
여인에게 당장에 도달할 수 없는 남성은 ‘다른 것으로’ 그 여인에 대한 열정을 드러낸다. - 라캉 -
내 영혼의 텍스트 <슬램덩크>에서의 강백호가 대표적인 사례이지 않을까? 그가 농구부에 들어간 최초의 목적은, 오로지 농구를 좋아하는 채소연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 신화창조의 여정 내내 자신이 설정해 둔, 결코 ‘여기’로 다가오지 않는 이상에 시달린다. 가장 큰 시련은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이상의 지점이, 채소연이 짝사랑하는, 그래서 그토록 미워했던 서태웅의 모션이었다는 사실이다. 강백호에게 있어 서태웅의 존재는 농구의 안과 밖에서, 모션과 이모션 모두에서 갈망인 동시에 절망이었다는….
남자들에게서 발생하는 어떤 계기 혹은 동기가 ‘여자’로 인한 것일 때가 있다.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은, 혹은 불특정의 다수의 그녀들에게 환심을 사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되는…. 하여 라캉은 ‘여자를 남자의 증상’이라고까지 표현했던 것. 물론 나중에 가서는 그 의미가 변해가지만, <슬램덩크>의 초반에만 해도 농구는 강백호의 결핍감을 투영한 하나의 대리물에 불과했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우리의 안에서 들끓고 있는 근원적 열망에 가장 가까운 속성이 사랑이다. 위로와 대리의 성격이 아닌 그저 순수한 에로스로 이끌려가고 열어젖히는 세계. 때문에 정신분석 관련 저서들에서 ‘에로스’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에 대한 프로이트의 ‘남근’적 해석도 한참이나 철이 지난 담론이다. 그냥 우리가 겪는 사랑에 관한 모든 것들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 사람이 아니면 절대 안 되는 것. 그 사람과 함께 있어도 어찌 해야 좋을지를 모르겠는 것. 닿지 못하는 경우에는 그 주변을 맴돌며 그 사람의 환심이 내게 향할 것이라는 자기 전제 하에서 무언가로 부산을 떠는 앳된 심정에 관한 이야기. 다시 <슬램덩크>에 비유하자면, 농구가 아닌 채소연 그 자체에 대한 것.
‘여자는 남자의 증상’이라는 저 라캉의 어록에 대한 지젝의 해설을 덧붙이자면 ‘남자의 평균화된 욕망이 여자’라는 것. 쉽게 말해 남성성의 이미지는 여자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심리가 발현되는 증상이라는 것.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사랑의 힘을 실존적 상황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가 말하는 ‘실존 (existence)’이란, 가능성과 확장의 의미이다. 이를테면 나의 지금을 넘어서게 하는 ‘뮤즈’의 존재의미 같은 것.
나중에 가면 강백호는, 채소연이 매개가 되었던 농구에 보다 심취하면서 이따금씩 채소연을 잊는다. 그의 열망은 이제 농구 자체이다. 그에 비해, 그 궤를 함께해 온 송태섭에게 한나는 여전히 뮤즈다. 그녀에게 닿고자 하는 마음으로 매 경기마다 거듭나는 단신 가드에게 있어, 정말이지 닿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몰두하는 심적 동력. 모자란 기럭지만큼으로 끝내 닿지 못 할 수도 있는 자리, 그럼에도 나의 성장을 가능케 했던 한 사람을 위한 마음으로 신체에 새겨진 시간. 그녀가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는 항상 NO.1 가드이고 싶었던 단신 가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