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강릉과 부모님이 현재의 나에게 가르쳐준 것들.
(이 브런치/포스트의 시작 부분(대학교입학 전까지)은 본인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꽤나 많이 포함되어 있고, 어떤 인사이트를 줄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현재를 살아가는 제가 과거를 기록하고 그에 대해 돌아보기 위한 글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경험과 선택들을 통해 현재의 사람이 되었는지를 찾기 위한 글이기도 합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연애를 늦게 시작했다고 했다.
나를 낳으실 때에는 어머니가 36세, 아버지가 38세였다.
출생은 서울이었지만 1~2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강원도 강릉에서 자랐기 때문에 나는 기본적으로 한국에서 보자면 지방 출신이며 환경적, 정치적인 이유로 그리 주목받지 못했던 강원도 강릉에서 나고 자란 셈이다.
어릴 때의 기억은 크게 자연, 그리고 학교로 나뉜다.
다른 지역은 잘 모르겠지만 강원도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라면 아마 자연과 많이 친숙할 것이다.
강릉이라는 도시는 강원도 내에서는 춘천과 원주를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타 큰 도시들과 비교해보면 개발도 덜 되어 있었고, 정말 자연과 가까워질 수 있는 경험들을 많이 가져다주었다.
기본적으로 동해바다를 끼고 있기 때문에 여름에는 4~5번씩 가족들과 함께 해수욕을 하러 갔었다. 또한 지리적으로 다설지였기 때문에 겨울에는 아버지가 항상 "눈 구경 가자~"라는 말과 함께 차를 타고 대관령 굽이길(당시에는 대관령 고속도로가 없었다.)을 드라이브하며 말 그대로 눈들이 뒤덮인 설산을 구경했다.
강릉에서 '대관령'이라는 의미는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의미가 매우 크다. 5살 때 고모가 해주었던 말이 기억이 난다.
" 옛날에 율곡 이이 선생님이 과거를 보러 한양에 갈 때 대관령을 넘으려 곶감을 99개를 들고 갔었는데 대관령의 골짜기를 하나 넘을 때마다 곶감을 1개씩 먹었단다. 그런데 대관령을 다 넘어가니 그 곶감을 다 먹었다고 한다."
고모가 해주신 말이 진짜인지는 아직도 모르지만 고속도로가 2000년대 초반에 생겼기 때문에 그 이전부터 강릉에서 살던 사람들은 서울을 가야 할 때 꼭 넘어야 할 '령' 중 하나가 바로 대관령이었다. 그 때문에 나 또한 강릉은 어쩌면 국내의 다른 지역과는 심리적으로 더 많이 분리되어 있고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내 또래의 많은 고향 친구들이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어렸을 때 대관령을 넘어 서울을 가는 이유는 외가댁을 가거나 뮤지컬을 보러 가는 것이었다. 외가댁을 갈 때에는 강릉에 없는 '백화점'이라는 곳에 가끔 가서 옷이나 장난감 등을 선물로 받았다. 하지만 그런 경험보다는 뮤지컬들을 보았던 것이 내 가치관 형성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처음으로 보았던 뮤지켤은 '명성황후'였다. 강릉에서 약 3시간이 조금 넘게 걸리는 거리를 차를 타고 가며 나는 " 뮤지컬이 뭐예요? "라고 연신 물었다. 그럼 어머니는 " 연극이 음악과 함께 잘 짜인 공연 "이라고 말씀해주셨다. 나는 전혀 감이 오지 않았었다.
명성황후는 예술의 전당에서 앙코르 공연을 진행했었는데 뮤지컬 배우 이태원 씨가 명성황후 역할을 맡았었다. 우선 예술의 전당의 스케일에 놀랐고, 뮤지컬 명성황후가 주는 여운에 두 번 놀랐다. 그 어린 나이에 내가 드는 생각은 신기하게도 민비의 죽음이나 뮤지컬의 예술성과는 별개로 "나도 나중에 서울에서 살면 이런 것들을 더 자주 볼 수 있을까?"였다.
그 이후에도 여러 번 뮤지컬을 보았었는데 그중 운 좋게도 배우 조승우가 초연을 맡은 '지킬 앤 하이드'가 포함되어 있었다. 지킬 앤 하이드를 보았을 때에는 배우 조승우의 연기력과 책으로만 보았던 작품을 다른 채널을 통해 보고 느끼는 점을 배웠다.
브런치에 첫 번째 글을 쓰면서도 약 15년 전의 이야기가 이렇게 세세하게 떠오르는 것이 그때의 경험들이 얼마나 인상 깊었는지 다시 한 번 느껴져 신기하기도 하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우리 가족은 국내외로 여행을 정말 많이 다녔었다. 우리 가족은 국내 여행도 소위 말하는 유명한 관광지들을 가는 것들을 포함해서 강화도, 안면도, 신안군, 울릉도와 같은 육로로 이동하기 힘든 곳들도 여행하는 것을 좋아했다. 항상 아버지는 펼쳐볼 수 있는 큰 지도와 책으로 된 지도를 한 개씩 차에 두고 다니셨고, 여행을 다닐 때마다 그것을 펼쳐 보이며 해당 지역에 대한 설명, 음식, 지리적인 특성 등을 설명해주셨다. 여행을 가서도 (그때는 정말 싫어했지만) 아버지는 사람들에게 말 거는 것을 참 좋아했었다. 일부러 시장이나 허름한 가게, 식당에 들러서 물건을 파시거나 음식을 주시는 분들에게 말을 걸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셨다. 덕분에 예상치 못했던 에피소드도 많이 생기고 여행을 다니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환경에서 지내는지 더 잘 알 수 있었다.
해외여행도 꽤나 많이 다녔었는데, 부유하지 않은 우리 집의 환경에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부모님의 영향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대학을 보낸 이후로는 자식들이 독립하기 원하셨지만 그때까지는 정말 많은 '경험'을 전달해주시기 원했던 것 같다. 해외여행을 가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예컨대, 중국이나 일본을 갈 때에는 정말 과거부터 우리나라와 복잡한 관계를 맺던 두 나라의 이야기를 해주시며 앞으로 우리나라와 계속 이러한 이해관계를 가질 나라라는 설명과 함께 많은 것들을 배워보자고 하셨다. 아시아를 비롯해 북미나 뉴질랜드에도 여행을 다녔었는데 너무나도 다른 환경과 풍경, 그리고 사람들이 어린 시절의 많은 상상력들을 자극했다. 많은 것들이 달랐지만 인간으로서 커뮤니케이션하며 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냥 뮤지컬 몇 개 본 게 뭐라고?' 혹은 '어릴 때 여행 몇 번 다녀온 게 다야?'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성장기에 경험한 이러한 경험들이 20대 이후에 보다 다양한 사고를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초석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지방에서 나고 자란 것은 특이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적어도 지금까지 만난 지방 출신의 친구들 중 일부는 대도시에서 자란 친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신의 (물리적, 환경적) 주변 환경 외에는 관심이 없거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하지 않는 경우들이 많다. 이러한 가치관이나 생각이 나쁜 것은 전혀 아니다. 태생적인 성향이 그러할 수도 있고, 자신의 주변일을 다루고 처리하기도 바쁜 경우도 많다. 또한 그들이 그렇게 하기로 선택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더 좋다 나쁘다, 혹은 바람직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들은 조금 더 다양한 라이프 스타일이나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가 찾지 않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배우고 경험했기 때문일 것 같지만) 조금 더 생각이나 경험의 스펙트럼이 넓은 사람들과 만나고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그들과 관계를 맺으면 다양한 관심사나 트렌드에 점점 더 가까워지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사람은 인생에서 여러 가지 중대한 선택을 한다. 한국에서는 대학을 진학할 때 (혹은 하지 않는 선택), 취업, 배우자를 만나는 일 등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선택들을 할 때에는 사람들이 말하는 '어떤 (충격적인) 사건이나 감정을 겪어서' 혹은 '원래 그런 성격이야'라는 이유는 너무나도 표면적으로 느껴진다. 어쩌면 과거부터 자신을 만든 정말 사소한 경험의 연결들이 그러한 선택을 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한 번씩 깊게, 그리고 자세히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이런 시간들은 분명히 자기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을 알게 해주리라고 믿고 앞으로의 선택과 의사결정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