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2015년 3월 29일 오후 10:34

by Keninsing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것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영화 '달콤한 인생'의 오프닝에서 선우 (이병헌 분)의 내레이션으로 듣게 되는 영화의 도입부다. 봄날 나뭇가지가 흔들리듯 선우의 마음도 흔들리게 될 것이라는 예고의 멘트이기도 했다.


▼ 기구한 것은 이 영화에는 그런 선우의 흔들리는 마음을 귀신과도 같이 읽어 내는 선우의 보스, 강사장 (김영철 분)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일은 우리에게도 흔히 발생한다. 그렇지 않은가? 나도 상대방도 서로 알고는 있고, 느끼고는 있는 일이지만 서로 더럽고 치사하고.. 등등의 이유로 말조차 꺼내지 못하는 그런 사소하다면 사소한 일들 말이다. 예를 들어 A는 B의 영어 실력이 형편없다고 생각하는데 A도 굳이 그 얘기를 하지 않고, B도 A가 자신의 영어실력이 형편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아는 척하지 않으려는 그런 시답지 않은 일들 말이다.

▼ 강사장의 입장에선 선우에게 설마 "내가 여자 친구 좀 살펴보라고 했건만 그 아이를 좋아하게 됐나?"라는 소름 끼치는 얘기는 할 수 없었을 것이고, 선우의 입장에서 강사장에게 "그래요. 맑고 청순해 보여서 잠시 좋다는 생각 했어요. 그게 뭐 큰 일인가요?"라는 덜떨어진 말 또한 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두 사람은 끝장이 날 때까지 싸우는 한이 있어도 더럽고 치사한 얘기는 하기 싫었던 것이다. 게다가 보스의 여친을 건드린 것도 아닌데 말이다.

▼ 선우는 자신의 마음이 휘날리니 보스의 여친의 마음도 자신에게 휘날릴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보스의 여친 생각은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그래서 보스와 선우는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는 것이고...

나는 바르게, 강직하게, 솔직하게, 열심히 99가지 일을 수행하고, 어쩌다가 실수로 1가지를 놓쳤는데 나에게 죽자고 달려드는 사람이 있다면 대개 "나한테 왜 그랬어요?"라고 물을 것이다. 영화에서 선우가 보스에게 물었듯 말이다. 그런데 때로는 99가지 잘한 일이 1가지 실수와 전혀 연관성을 지니지 않는다고 느끼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게 인생이라는 걸 감독은 얘기하려 했나 보다.


▼ 영화에서 선우는 계속 뭔가 달콤한 것들을 먹는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여지없이 씁쓸한 맛을 지니는 초콜릿 케이크, 에스프레소와 같은 것들이다. 진한 에스프레소에 설탕을 넣어 달콤함을 느껴보려 하지만.. 에스프레소는 결국 에스프레소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은 '달콤한 인생'이지만 영문 제목은 '달콤 쌉싸름한 인생'이 아닌가 싶다.

어느 깊은 가을밤, 잠에서 깨어난 제자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스승이 기이하게 여겨 제자에게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제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영화의 클로징도 선우의 내레이션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나뭇가지가 흔들려 보이는 이유는 자신의 마음이 흔들림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법도 한 제자는 스승에게 다시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대한 얘기를 한다. 마음이 흔들릴 때는 언제고, 시간은 봄에서 가을로 변했을 뿐이건만, 그는 이미 자신의 달콤한 꿈이 이룰 수 없는 꿈이라고 단정 짓는다.

▼ 스스로 마음이 흔들려 달콤함도 맛보았다가 이룰 수 없는 꿈이라며 울기도 하는 한 제자의 귀여운 호들갑을 보면서 그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일 것이다. 다만 그 인생이 '달콤한 인생'인 것인지, '달콤할 것 같은 인생'인 것인지 '달콤 쌉싸름한 인생'인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 그저 다시 가을이 왔을 때 나의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울고 있다며 스승님을 찾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만이 들뿐이다. 게다가 그런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스승님을 모시고 있는 그 제자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그리고 영화가 개봉됐던 2005년에 내가 왜 이 영화를 그렇게도 감정 이입을 하면서 봤는지를 10년이 지난 지금 깨달으며 나의 우매함에 다시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By 켄 in 도곡동 ('15년 3월 29일)


* 이 글에 사용된 이미지/동영상에 대한 저작권은 영화 '달콤한 인생' (제작사 영화사봄/배급사 CJ E&M)에 있으며 이미지의 출처는 네이버영화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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