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에 잠들어 있거나 잠들 예정인 글감이 마침내 글로써 깨어나게 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이 글이 누구에게든 닿기를, 그래서 그네들 마음 동하기를, 그리고 그 떨림이 공간의 울림 되어 글쓴이에게 돌아오기를 바라는 그런 때가 아닐까?
[ ]을(를) 쓰다.
빈칸에 자연스러운 단어는 ‘편지’ 혹은 ‘글’ 일 것이다. 편지는 글이 이루니 의미의 중복일 수 있겠지만, 편지의 형식에 글만 있는 것은 아니니 구분 못 할 것도 없다.
글의 생산과 소비를 위한 플랫폼은 작가와 글, 독자가 이룬다. 작가가 곧 독자이기도 하지만 모든 작가가 독자는 아니다. 그리고 작가가 그렇듯, 독자엔 열혈 독자와 아닌 독자가 있다. 어느 쪽이든, 독자는 여러 방법으로 작가의 글에 공감하고, 그 흔적을 남긴다.
작가의 입장에서 독자는 글의 이유이자 목적이다. 그러므로 독자를 생각하지 않는 글은 목적의식이 결여된 글이 될 것이고, 스스로조차도 한 번도 들추지 않을 일기이거나 끄적이는 낙서와 비슷할 것이다. 어록이 될뻔한 멋진 말도 혼잣말이면 나중에 기억조차 못할 것이다. 반면, 미리 연습하지 않아도, 기가 막힌 명언은 아니어도, 들어줄 사람이 있을 때 화자의 말은 이야기가 된다. 이야기는 공감이 되고, 또 다른 글의 동기가 된다. 글이 연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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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발견하는 것은 우연일 때가 많다. 자전거를 주제로 한 그의 글이 좋았고 공감의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이어진 필담은 글감이 되어, 휴대폰 메모장에 차곡차곡 쌓인다. 예전 같으면 채 글 되지 못한 찌꺼기에 불과한 것들이 이제는 글이 되어 또 다른 공감의 시작이 된다.
새로운 글이 올라갈 때마다 연락을 주는 고마운 이도 있다. 늘 글 잘 보고 있다며 인사하고, 막 올린 글에 대한 감상과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안 좋은 일에 대한 글에는 위로도 건네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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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공감의 흔적이나 반응은 다시 그 글을 들춰보게도 한다. 들춰보는 것은 방금 세상에 나온 글이거나 오래도록 잊고 지내던 ‘그때’의 글이다. 어느 쪽이든 이미 과거가 된 글로 작가를 다시 데려가는 그것을 ‘공감버튼’이라 부르고 싶다. 공감버튼은 작가 현재의 모습, 생각, 주위의 사건들이 담긴 글로 모두를 소환하는 초인종이 되기도, 표지에 뽀얗게 내린 먼지 걷어내고 다시 그때를 추억하게 하는 먼지떨이개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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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 받는 칭찬이 좋아 더 정성스럽게 글을 쓰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다. 선생님 덕분에, 다른 숙제는 다 미뤄도 글짓기 숙제만큼은 늘 열심히 했었다. ‘ㅇㅇ은 글 참 재미있게 잘 써’라며, 칭찬하던 선생님은 학우들 앞에서 종종 숙제를 읽어주곤 했다. 부끄러우면서도, 그 숙제만큼은 옆집 바보 균만이네에 놀러 가는 것보다 우선순위였다. 숙제로 글짓기를 하면서 선생님을, 선생님한테 받고 싶은 칭찬을, 그리고 그걸 보고 놀리듯 손뼉 쳐줄 급우들을 생각했다. 그들과의 공감이란 열매는 먹지 않아도 시큼하고 달콤한, 작가로서 앞으로 더 나아가게 하는 매실 같았다.
편지를 쓴 것이 아닌데 메시지가 전해진다. 편지를 쓴 것이 아닌데 답장이 온다. 그렇게 편지 아닌 글 주위에, 글을 좋아하고 글을 사랑하는, 글을 짓고 읽는 사람과의 교감이 시작된다. 그리고 아주 작지만 소중한 확률로 글이, 그들을 잇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