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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니스트리 Jul 26. 2022

四필귀정

필진으로부터 바로 서게 된 작가라는 목표

최근 필모그래피라는 것을 써보며, 새삼 작가라는 세계에서 나의 정체성이 궁금해졌다. 필모그래피는 보통 배우나 영화감독의 프로필로 대중에게 공개하는 목적으로 쓰이는데, 출판업계나 언론계 등에서 글의 지은이를 독자에게 소개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기도 한다. 담기는 내용은 보통 이름(필명)과 간단한 이력, 그리고 독자에게 소개하는 한마디 등이다. 필모그래피를 제출한 곳은 어느 인사(人事, HR) 관련 플랫폼으로, 최근 이곳에 필진으로 참여해 글을 쓰게 되며 처음으로 ‘기고(寄稿)’라는 것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브런치와 사내 블로그 등에 글은 써 왔다. 하지만 글의 내용, 양, 빈도에 강제성이 적어 기고와는 달랐다. 그러니 기고를 하게 된 것은, 자율적이면서 적극성은 결여된, 비생산적 글을 주로 써오던 나에겐 새로운 경험인 것이다. '어쩌면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삶 속 하나의 이벤트이자 터닝포인트가 될지 모른다'라고 생각하니 필모그래피부터 대충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간단한 이력과 아이덴티티, 철학을 녹여낼 필모그래피를 적는 과정에서 문득, 내가 어쩌다가 글을 쓰게 됐을까 궁금해졌다. 그러자 너무 자연스럽게 네 가지 단어가 떠올랐다. 필력, 필요, 필진, 그리고 필모. 공교롭게도 네 가지 동음자로 시작되는 키워드들로부터 단서를 찾아볼 수 있을까? 끊지 못해 쓴(written things) 이 달콤한 중독의 원인을.




필력(筆力)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전부터 자주 접하던 단어였다. 그땐 지금과 같이 무제한 메시지 소통의 시대는 아니었다. 카카오톡은 아예 있지도 않았고, 페이스북도 국내에 이용자가 얼마 없어 '다음 카페'가 커뮤니티의 대세인 시절이었다. 그때 어떤 계기로 몇 번 학내 게시판에 글을 남겼었는데, 그걸 본 한 선배가 “니 글에는 설득력과 호소력이 있다”며 자주 칭찬하며 필력이란 단어를 썼었다. 그리고 직전에 다니던 다른 회사에서도, 동료가 자주 '글에 필력이 있다'며 추켜세우곤 했다. 그렇게 들으면서도 사실 필력의 진짜 의미는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칭찬이라고 생각되었고 듣기 거북하지 않아 더 길게, 디테일하게 글을 발전시키게 된 동기가 됐었다. 구조를 짜고, 쓰고, 잇고, 붙이는 그 과정이 쉽지 않았지만 기꺼이 더 많은 노력을 들이게 했다. 또 그 결과물의 즐거움도 알았다. 필력이란 단어가 주는 묘한 에너지가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글 짓는 것을 곧잘 했던 것 같다. 초등학생 시절 은사님은 내게 ‘글을 참 잘 쓴다’며  칭찬도 자주 해주셨다. 내가 모르는 사이 따로 어느 신문사 백일장에, 숙제로 제출한 글을 접수해 상을 타게 해주시기도 했다. 또 어쩌다 부모님께 혼날 때, 억울해할 말은 많은데 속으로 자꾸 삼켜 체할라치면 나름의 입장과 반성을 편지로 써 드리는 것을 곧잘 했었다. 어린아이의 문장력이 좋아봐야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나중에 들은 이야긴데, 나는 어릴 때부터 말도 기승전결과 논리에 입각해 '조리 있게' 잘했다고 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또 사회인이 되어서도 어쩌다 글을 쓸 계기가 있었지만 지금처럼 직업상 글을 많이 쓰게 된 시기를 포함해 공감의 대상은 늘 한정적이었다. SNS와 같은 열린 공간은 너무 많지만, 거기 모인 이들이 바라고 바라보는 것들은 나의 글 같이 어떤 의미를 좇는 것이 아닌, 좀 더 실질적인 네트워킹 소재이거나 좀 더 힙(hip)한 자극이 되는 것들이다. 그들에겐 내가 늘어놓는 말들은 곧 글자 무더기, 스크롤 낭비, 스킵 유발, 또는 TMI일 뿐일 것이다. 카카오톡으로 대표되는 인스턴트 메시지도 마찬가지다. 갈수록 진심 담긴 소통은 줄고 짧은 대화 속 가벼운 주제가 보통인 세상이다. 의례적인 대화 끝은 늘 공허하고 아쉽다. 논리보단 공감이, 팩트 보단 위트가 더 환영받는 환경. 그곳을 벗어나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공감이란 카타르시스적 보상이 뒤따르는 공간이 필요했다. 가십거리와 센스 있는 유머 대비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경험과 의미를 가득 눌러 담은 일장연설과 같은 감동 스토리도 제 자리를 찾아야 했다. 그러니 새로이 필력이란 힘을 꺼내 써야 할 어떤 기회가 있다면, 그것은 나의 글이 제 자리를 찾는 기회이길 바랐다. 직업적으로 써야 하는 글 말고, 나의 경험과 생각을 담은 그런 글로써.


마치 비의 경계를 넘어가고 한참이 지나서야, “어, 언제 비가 그쳤지?” 하는 것처럼, 정확히 그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취미로 글을 쓰다 어느새 회사의 문화 콘텐츠 작가 겸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그리고 이젠 공감의 가능성 높은, 특정 분야의 독자가 많은 채널에 기고를 앞두고 있다. 난 전문적인 작가일까? 아직은 그렇다고 확실히 답하기에 망설여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모호함이, 예전부터  자주 듣던 필력이라는 단어를 달무리처럼 감싸고 있음은 분명하다.


필요


필요에 의해서만 써야 했던 글에는 진심과 의미를 정성스레 담기 어려웠다. 그것을 기획할 때 필요한 의식의 흐름조차 참 버거웠던 기억이다.


몇 해 전 어느 회사의 커뮤니케이션 팀에서 일을 할 때, 매일 아침의 루틴 한 업무 중 하나는 업계의 동향을 정리한 뉴스레터를 전사에 송부하는 것이었다. 계약된 업체에서 수집해 보내오는 업계 동향 뉴스 목록을 검토하고 보정해 전사에 배포하는 것이므로, 사실 크게 일이랄 것도 없이 단순하고 쉬웠다. 갖출 형식도 변화라곤 없이 매일 같았다. 전날 보냈던 메일을 '전달'로 복제하고, 이메일 제목과 날짜만 실수 없이 수정하고, 업체가 분류한 메일 목록을 그 형식에 붙여 넣고, 'send' 버튼을 누르면 끝나는 일이었다. 모두 똑같아 보이는 호떡 하나도 반죽과 누름, 뒤집음에 나름 신경을 써야 하는데, 그런 디지털 복제품을 매일 아침마다 하고 있으니 쉬운 일이면서도 목마름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관심을 가지고 보지 않으면 어제도 오늘도 차이를 알 수 없는 전봇대에 매달린 벼룩시장처럼, 실제 매일 아침 오는 똑같은 제목의 뉴스레터를 관심 있게 살펴보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정성이 결여된 결과물은 디지털 세상에서도 딱 그만큼의 가치와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것을 알아갈 때쯤, 필요에 더해진 충분함의 결과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메일 서두에 다양한 주제로, 매일 달라지는 몇 단락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스무자 남짓의 글을 더했다. 이후엔 마흔 자. 어쩌다 두 문단 정도의 글을 덧붙이기도 했다. 대체로는 인사로 시작해서, 그날의 날씨, 출근길, 이슈, 누군가와의 짧은 대화를 소재로 한 글을 덧붙였다. 마무리는 늘 같았다.


'... #월 ##일 업계 동향 뉴스레터입니다'


특별한 기사가 있다면 해당 기사문을 요약하기도 했다. 집에서 회사로, 다시 집으로 오가며 떠오르는 생각은 메모장에서 글감이 됐고, 글감은 글이 됐고, 글은 매일 반복되는 일을 어제와 다르게 만들었다. 오늘을 지금(present) 답게 만드는 것은 어제와 다른 무언가가 아닐까? 선물을 누군가에게 전달하기 전에 좋아하는 패턴이 그려진 포장지와 리본으로 포장을 하듯, 그렇게 꽤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썼다. '복붙'은 기계와 다를 바 없는 일이지만, 사람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주체적 행동의 증명이 그 몇 줄의 글인 셈이었다. 글-공감-대화로 이어지는 선한 글의 영향으로, 전날 좋은 글감이 떠오르면 그것을 써낼 다음날 아침 9시 50분이 기다려질 지경이었다. 루틴이 이벤트가 되는 것은 하루가 멀다 않고 서로 잘 모르던 동료들조차 보내온 공감과 격려의 메시지가 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였던 것 같다. 그들이 전한 후기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은 ‘라디오’였다. 아침에 메일을 열며 오늘은 어떤 에피소드가 전해질까, 기대하며 그 재미없던 뉴스레터를 읽기 시작했다고 전해왔다. 그런 후기를 들을 때면 감사하고, 또 뿌듯했다.


이 경험은, 나에게 주어진 업무를 조금 더 발전시키고 주체적으로 관리하는 오너십의 효과와, 일방향성 정보전달 업무를 양방향 소통 업무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뉴스만은 나와 관계가 없어 흥미가 떨어져도, 거기 덧붙인 회사 안팎의 일상의 스토리들은 동료들이 관심 갖기에 충분했다) 스토리가 양방향 소통의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 저널리즘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자 한 계기도 되었다. 또 이 경험은, 매일 꾸준히 글을 적으며 소재에 대한 고민과 완성 과정이 담긴 연습장이 2년 치가 쌓이고 그로부터 일반 마케팅 기획자에서 콘텐츠 마케터로 업무 범위를 조금 더 좁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뉴스레터를 자체 운영하다 보니 필요한 다양한 그래픽이나 웹 퍼블리싱 관련 툴들을 배워 활용할 기회도 되었고, 또 이로부터 나만의 문집을 만들고 언젠가는 출간을 하고 싶다는 목표를 세우게 되었다. 매일 이어진 메일 속 대화는 그렇게 나 스스로와 동료들과의 약속이 되었고, 책임과 꿈이 되었고, 소통과 교류가 되었다.


“메일의 라디오 같았던 글을 읽으며 새삼, 우리 회사가 참 따뜻하고 좋은 회사였구나 느꼈어요”

그날이 회사에서의 마지막 날인 동료가 떠나기 전 남긴 말이었다.


관련 포스트: 매일 메일 대화


필진(筆陣)


필진이란 키워드는 비교적 최근에 원티드라는 한 HR 플랫폼에서 접하게 되었다.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른 이 단어는 한동안 ‘새로움’과 ‘책임’이란 방에 머무르게 될 것 같다. 이로부터 나도 집단의 지성과 필력이 모여 완성되는 글의 보(洑), 혹은 저수지로 흐르는 물줄기의 일부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크게 인기나 반향 없는 글들을 드문 드문 쓰는 것으로, '기록함'이 전체 목적의 7할 정도였던 이 일이 이번 계기로 조금 더 좁혀진 주제의 틀 안에서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을 줄 수 있다면 큰 보람이 될 것 같다. 사실 서랍 속 글 조각들을 꺼내어 세상에 내보내는 이런 시도는 브런치라는 플랫폼에서도 충분했지만, 이상하게 해소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경험에 의한 사실적 전개에 살을 붙여 감성을 더하는 방식으로 완성하는 내가 쓰는 글은 인기 있는 소설이나 웃음코드 가득한 콘텐츠와는 거리가 멀었다. 나의 취미생활과 회사생활, 삶을 이루는 두 개의 큰 축을 겉도는 글들을 맥락과 두서없이 늘어놓았던 것 같다. 돌이켜 보니, 삶에 조금 더 가까이 있는 글의 반응은 좋은 편이었고, 아무래도 대중의 관심과는 거리가 먼 개인적 생각이나 철학이 주제인 글들은 큰 호응은 얻지 못했다. 마치 별이 아닌 별무리를 좇는 여행자처럼, 다양한 주제를 맥락 없이 선택해 써 내려간 글들은 패턴이 불명확했다. 정한 기한과 양의 목표가 있는 직업상의 글쓰기와 다르게, 인생의 목표인 ‘좋은 글’에 다다르기 위해선 사실 대중성도 필요할 텐데, 더는 별무리만 좇아선 동기마저 잃겠단 생각이 들던 차였다. 걷다 걷다 조금 지치는 느낌이랄까? 아니, 걷다가 쉬는 시간이 너무 많아 지루해진 느낌이었을까? 후자가 내가 글을 더 이상 잘 쓰지 않았던 핑계로 더 적절한 것 같다.


필모


필모, 또는 필모그래피(filmography)는 필름(영화, film)과 전기(傳記, biography)의 합성어로, 주로 스크린, 포털, 매체 등에 노출되는 영화감독이나 배우의 이력을 말한다. 영화에서 비롯됐지만, 지금은 작가나 만화가 등 작품 세계에서 확장적으로 사용되는 듯하다. 아마도 감독이나 배우, 작가의 이력으로부터 작품 자체의 신뢰를 높이는 용도인 것 같다. 이번에 원티드에서 직무 관련 집필진이 되며 처음 이 필모그래피라는 것을 써 보게 되었다. 일전엔 바이라인(byline), 즉 기사와 같은 글에 공인력을 더하기 위해 처음이나 말미에 해당 글을 쓴 작가의 이름을 배치하는 것은 접해봤어도, 좀 더 자세한 이력이나 한 줄 인사말과 같은, 독자 소통의 단초로써 사용될 이 필모그래피는 제대로 써 본 일이 없는 것 같다. 쓰다 보니 참 이 세월 살며 그럴듯하게 꾸미는 것 이외에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할 이력 하나 없나 싶어지기도 했다. 해당 플랫폼에서 필모의 모습과 기준에 대해 운영진에게 문의해 본 결과, 실제 독자들이 궁금해할 이 글을 쓴 사람의 전문성, 즉 지난 이력과 현 회사는 되도록 실제 명칭으로 밝히는 것을 추천한다는 의견이었다. 그 기준에 따라 필모를 작성하고, 한 줄 정도에 나의 정체성을 담아보려 했다. 그런데 쉽지 않았다. 회사를 여러 번 옮겼고, 직무도 좀 특이하게 전환된 탓에 딱 한 문장으로 정리하는 것이 어려웠다. 쓰고 지우기를 여러 번. 그렇게 스스로의 정체성을 정의해 봤다.


‘조직을 이루는 사람과 공간, 공감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씁니다. … 스토리텔러의 마음으로 콘텐츠를 만들고, 마케터의 사고로 소통을 합니다’


마케터 출신으로 인사팀에 소속되어 컬처 브랜딩을 담당하는, 다소 모호하고 복잡한 이력을 한 줄로 정리해 간단하게 스스로를 설명하기 어려웠다. '스토리텔러의 마음'이니, '마케터의 사고(思考)'니 모두 역시나 정리된 느낌이 아니다. 이럴 땐 더 단순하게, 내가 무엇을 쓰고자 하는지를 깔끔하게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 마케팅 소통방식과 브랜드 저널리즘에 기반한 문화 사례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시리즈로 펼칠 이야기의 주제의식이 잘 소개됐기를. 필모를 써본 경험은 그렇게 목적이 분명한 글을 쓰게 된 필진으로의 시작을 실감하게 함과 동시에, 스스로를 한 번 되돌아보고 정체성을 고민해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필귀정(四筆歸正)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성어의 원래 뜻은 ‘일이 올바른 이치로 돌아간다’이다. 사실 음(音)만 빌려오려 했는데 쓰다 보니 글 제목과 의미도 통한다고 여겨졌다. 그간 제한된 환경에서 제한된 목적으로 글을 쓰는,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작가인 나는 아직 꺼내지 못한 소재를 엮어 세상에 내놓을 이야기가 너무 많아 길을 헤매던 중 네 가지 요소로부터 작가의 목표를 바로 세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티드라는 플랫폼에 필진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분명 글을 쓰는 행위에 또 다른 목적과 의미를 갖게 하는 변화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마치 별 무리를 바라보다 별자리로 좀 더 시야를 좁혀 바라보는 것과 같이, 좇는 목표의 윤곽이 조금은 또렷해졌다고 할까. 나와 비슷한 목적으로, 자신의 다른 본업이 있으면서도 글이 좋아 쓰는 사람들과,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머물며, 누군가의 공감을 먹고 더 크게 자라나는 그런 작가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길을 걷고 있을지 보고 싶었다. 또 그들의 글을 적는 방식과 주제 선정의 노하우도 궁금했고, 내가 쓸 글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감이나 도움이 될지도 궁금했다. 이 기회가 시험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원티드 인살롱 필진은 두 번 만에 자격을 얻은 ‘브런치 작가’보다는 더 큰 책임의 무게라고 느낀다.


인살롱 필진은 또 그냥 끄적이는 노트가 아닌 어느 정도 쓰는 규칙을 지켜 써야 하는 원고지의 느낌이다. 채워지는 것은 나만의 이야기와 언어가 되겠지만, 이번 언어는 예술 아닌 디자인의 모습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 채움을 허락하고 채워진 결과물을 바라보는 이들은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이기 때문이다. 또, 더 많은 이들이 읽고 공감할 글 이란 재료와 시간이란 약속으로, 오래 쉬며 뒹굴던 나의 의지를 다시 바로 서게(歸正) 할 동기가 될까? ‘필진’이라는 집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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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사진: UnsplashKelly Sikke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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