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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니스트리 May 10. 2019

매일 메일 대화

매일 아침 10시, 라디오 또는 커피 같았다는 소통

돌고 돌아 결국 들려온 이야기는, 내가 하던 그 일을 상사는 '질리도록' 싫어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회사에서 내부 커뮤니케이션 담당자로 일했던 주요 직무 중 하나는 아침 10시, 업체에서 취합해 보내오는 뉴스들을 살펴보고 약간의 검열(?)을 거쳐 직원들과 이메일로 공유하는 것이었는데, 그 틀은 정해져 있어 사실 크게 일이랄 것도 없었다. 매일 메일을 열고, Ctrl+C/V, 날짜 바꾸고, 보내기 버튼 클릭. 기계적인 일을 기계적으로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가 정말, 기계가 될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큰일이다. 기계는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녹이 슬지 않는데 난 부지런하지 않으니, 이러다가 녹이 슬어 폐기되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기계에게 생각은 어울리지 않으니까, 똑똑한 인공지능(AI) 기계들에게 금세 대체되어버릴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니었다. 하루 거의 가장 먼저 열어보게 될지도 모르는 뉴스에 아침 인사 정도는 조금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2018년 어느 날의 뉴스 첫머리였다.


2017년 5월, 뉴스레터의 공유를 시작하며 덧붙인 앞머리 글들은 AI도 할 수 있는 일만 하기 싫었던 이유가 컸습니다. 사람만 할 수 있는 이야기, 즉 사람의 생각으로 감성을 담는 일에 감사하게도 많은 분이 관심을 주시며 궁금해합니다. 직접 쓰는 것이 맞느냐? 본인이 경험한 것이 맞느냐? 대부분 직접 한 경험이나 생각을 바탕으로 하지만 궁금함을 채우기 위해 다른 이들의 글을 참고하여 작성하기도 합니다. 소재를 정하는 것은 정해진 때가 없습니다. 그중 잦은 빈도는 출퇴근길 혹은 사람 사이의 대화입니다.



글의 유형


2018-06-12 (화) 오전 10:50

이상한 일상, 이상으로 가득한 일상, 일상 속 이상, 일상이 된 이상. 일과 이의 차이 정도로 다른 두 단어가 닮은 것엔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도곡동은 ‘맑음’입니다.

외근 중이신 분들이 보는 하늘도 같을지 궁금합니다. 오늘 업계 주요 뉴스 아래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글의 유형은 다양했다. 아래와 같은 재미 없는 주제와 형태가 있었고,


우(右)는 한국어로 오른쪽, 영어로는 right을 뜻하며 모두 ‘옳은 방향’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오른’이라는 단어가 ‘옳다’이면 ‘왼’은 ‘그르다’는 의미의 고어(古語)인 ‘외다’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동서양 모두 왼쪽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된 원인은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톨릭에서 왼쪽은 악마의 영역으로 북쪽을 가리키고 라틴어로 왼쪽은 sinister, 즉 ‘부적절하고 불길한’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동양의 종교에서도 음양오행설에 의해 양(陽)과 음(陰)을 각 오른쪽과 왼쪽에 배치하며...
 (중략)


아래처럼 짧은 글도 있는가 하면,


시간(時間), 공간(空間), 인간(人間). 삶을 이루는 모든 것들은 본래 ‘사이(間)’가 좋은가 봅니다.


이런 이상한 시도 있었다.


밟히고 찢겨도 꺾이지 않는 넌, 잡초
밟히고 뭉개져도 시간에 순응한 난, 와인
- 포도의 편지-


어느 날은 사람과의 끊임없는 갈등, 일방적 소통에 목이 타 이렇게 적기도 했다. 때마침 봄이었으므로,


꽃은 미운 사람 앞에서나 고운 사람 앞에서나 제 철에 펴고 때가 되면 집니다. 경우에 따라 마음을 열고 닫는 건 사람뿐인가 봅니다.


휴일을 제외하고 매일 하다 보니 의외의 회신이 오기 시작했다. 일방적 두드림에 문이 살짝 열린 느낌이랄까? 원래 그것을 바란 것은 아니었는데, 기뻤다. 이런 게 소통인가 싶었다.



긍정적 변화


뉴스레터 앞머리에 글을 연재하고 나서 몇 가지 긍정적인 변화가 생겼다. 매일 반복하는 일이 지겹지 않게 되었고 집이 멀어 오가는 버스나 정류장에서 많은 소재를 발견해 메모장에 적어두는 일이 잦아졌다. 스마트폰 들여다볼 시간에 창밖을 바라보거나 지나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생각을 좀 더 많이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소재가 고갈되어 멍하게 모니터만 한참 쳐다보다가 아무 말이나 늘어놓기도 했다. 주제나 형식의 경계가 없었지만 대체로 관계, 언어, 소통, 현상의 이야기를 많이 한 것 같다.


어쩌다 회신이 오면 그분들과 소통하며 인사를 하고, 이전엔 몰랐던 분과 점심을 먹기도 했다. 어딜 가나 목에 걸린 출입증 사진과 다소 다른 얼굴은 몰라봐도 이름은 대체로 알고 반가워했다. To-be 리스트에 없던 ‘작가’라 불러주는 동료도 생겼다. 대부분의 동료들이 평소 그냥 받기만 하던 뉴스를 궁금증에 한 번씩 열어보게 된다고 했다. 어느 날은, “오늘 글에는 꼭 회신을 해야 할 것 같아서”라며 인사를 전해오기도 했다.


누군가는 그 것을, 커피, 클래식 카메라, 혹은 라디오 같다고 했다 (사진: pixhere)



비판의 목소리도


회신이 모두 긍정적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읽을 뉴스도 많은데 글을 저렇게 많이 적어놓으니 피로하다”라는 의견도 있었고, “글씨가 너무 작다, 노안이라 침침하니 키워달라”며 농담처럼 진심을 전해오기도 했다. 처음에 조금 불편한 기분이었던 것이 사실이나 “무언(無言) 보다 비판이 낫다”라고 하지 않던가? 소중한 의견에 따라 분량을 줄이고, 글씨 크기는 이메일 스탠더드 10포인트로 맞췄다. 간혹 오타나 표현의 오류도 누군가의 관심으로부터 줄여갔다. 모두 변화와 발전의 디딤돌이었다.


하지만 상사였던 매니저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오며 가며 들으니 뉴스레터에 쓸데없는 내용이 너무 많다 하던데…” 라며 우회적 비판을 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의 관점에서는 지극히 이상한, 시간낭비같은 이 짓거리를.


시간낭비처럼 보일 수 있지만 내 기준엔 그 일을 그냥 일처럼 하는 것이 시간낭비였다. 뉴스 목록을 전해받고 이를 검토해 보내는 일은 20분이면 충분하지만, 그 20분에 가치를 더하는 다른 시간이 없다면 원래의 20분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0 혹은 마이너스가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원래의 20분에 가치를 더하는 다른 시간의 길이는 대체로 10분, 많게는 20분이 소요된다. 할 일이 없어서? 시간이 많아서? 이런 오해도 있을 법하다. 어차피 밥 먹고 커피 마시는 시간, 흡연자의 힐링타임, 멍하게 있거나 여기저기 브라우저를 들춰보는 시간 등 일 하는 사이사이 오아시스 같은 쉼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나? 정신없이 바빠 야근까지 이어지는 하루가 아니라면 그 20분은 나에게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았던 나만의 힐링타임이라면 어떨까?


그렇게 1년 6개월을 지속하니 2만여字, 보통 에세이북 분량의 글이 쌓였다. 그것을 모두 모아 하나의 문집으로 엮어봤다. 첫 번째 제목은  <익숙한 것과 익숙하지 않은 것>. 그런데 이 제목이 이미 출간된 어느 마케터의 책 제목과 형식이 유사해 <계절의 기록>이라 바꿔 지었다.



마지막 메일


이번 회사에서의 경험을 마무리하며, 반강제적 독자(=동반자)가 되어주었던 동료들께 매일 했던 메일 소통에 대한 감사와 사과의 뜻을 전했다.


기억의 억(憶)은 마음(心)의 의미(意).

빛과 구름에 가려져도 별은 그곳에 있습니다. 문을 닫고 나와도 공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름 걷히고 문이 열리듯 우리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각자의 이야기는 모두 다르고, 문득 차가워진 공기에 맑은 하늘의 오늘은 매주 돌아오는 또 한 번의 금요일일 뿐입니다. 그간 허락 없이 모두의 공간 멋대로 채웠습니다. 죄송스러웠고, 행복했습니다. 제가 드리는 마지막 업계 주요 뉴스 아래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p.s. ‘Send’ 버튼이 이렇게 무거운지 몰랐습니다.


그러자 누군가에게 회신이 왔다.


멋대로 채운 공간 충분히 멋스러웠습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선물


얻은 것이 딱 내 값어치만큼의 소박한 연봉과 연차뿐이었을까? 동료들의 과분한 관심과 응원 그리고 몇 줄 글에 담긴 이야기들이 진짜 선물이었다.


계속 글을 쓰고 싶다는 동기(動機)도.


소재는 그때그때, 떠오르는 대로 하는 메모의 연결과 확장 (사진: rawpix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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