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체크인 #2
맑았다. 적당히 시원했다. 현지에 사는 사람에 의하면, 요즘 며칠은 독일 베를린의 일 년 중 가장 좋은 날씨라고 한다. 날씨의 신은 이로써, 한 여행자의 이 도시에 대한 기억 속 흐린 잔상을 영화의 밝은 빛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참 포기할 줄 모르는 신이다.
국제 영화제로 유명한 베를린은 독일의 수도다. 하지만 한국에서 바로 가는 비행기 직항 편이 없어 터키의 이스탄불이나 독일의 다른 도시 프랑크푸르트를 거쳐야만 갈 수 있다. 때문에 사람들은 독일의 수도가 프랑크푸르트라고 오해하곤 한다. 베를린은 단일도시로 유럽 최대의 인구 (약 370만 명)가 거주하고, 유럽 역사 속 가장 영화 같은 변혁을 경험한 도시이며 (실제로도 많은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한국과 독일은 서로가 근현대사를 통해 가장 많은 공통 관심사를 갖는 문화적 자본적 중요 교역국이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독일의 수도 베를린으로 바로 가는 항공편이 없다는 것은 의아하다. 아마도 항공 노선의 상업적 수요가 부족하기 때문인 듯하다. 혹자에 의하면, 독일 자체가 국내 여행사들이 팔았을 때 인기 있을만한 여행지가 아니라고. 하지만 두 번 다녀온 여행자로써 독일의 베를린은 타 도시와 비교해도 분명 매력적인 여행지라고 생각한다. ‘화려함과 낭만은 파리나 피렌체에서, 그리고 역사의 겸허함은 베를린에서’ 라면, 베를린의 다른 매력이 조금은 설명이 되려나. (이렇게 적고 보니, 썩 매력적인 여행지가 아닌 것 같기도)
베를린 방문은 이번이 두 번째다. 한 번은 오래전 배낭여행이었고 이번엔 업무상 출장이다. 두 번의 베를린행 사이에 21년이라는 긴 시간이 있었다. 같은 장소에 같은 사람이 왔지만 분명 시간은 많은 것들을 변화시켰다. 유럽은 대체로 도시의 외형 변화는 크지 않다. 그래도 같은 장소의 공기와 분위기가 21년 만에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 스스로의 관점이나 생각의 변화 때문일지도. 업무의 일상 속에서도 틈틈이 베를린을 담아보려 애썼다. 이번에 돌아가면 또 언제 다시 올지 기약이 없으므로, 아침마다 숙소 주위를 달리고 저녁엔 걸으며 최대한 도시의 곳곳을 살펴보려 했다.
달리기를 말하니 베를린 현지에서 만난 B 씨가 떠오른다. 격일로 아침마다 집 주위 공원을 달린다는 그는 그런 습관의 계기가 할아버지라 했다. 너무 사랑한 할아버지를 떠나보내며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던 중, 우연히 할아버지 유품 속 메모 한 장을 발견했다고. 메모에는 할아버지 생전에 하루하루를 소중히, 충실히, 충만히 보내고자 하는 소소한 실천 목록이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고 한다. B 씨는 이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도 스스로 정한 습관을 매일매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모든 변화에는 계기가 있다. B 씨의 계기는 ‘기억’이었다.
기억은 습관이다. 어떠한 사실도 습관화되지 않으면 곧 잊힌다. 사람들은 대체로 아픈 기억은 쉬이 잊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기억하고 또 성찰하기 위해선 계기에 열정과 의지가 필요하다. 그런 열의가 재료로 더해지면, 습관이란 결과물이 노릇노릇 잘 구워진 소시지처럼 늘 우리 곁에 함께하게 되는 셈이다. B 씨의 일상 속 달리기처럼.
전날 행사장에서 B 씨로부터 전해 듣고는 다음날 아침에 거리를 달리며 찾던 것이 있다. 알고 있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는 거리의 기념물 스톨퍼스테인(Stolperstein)은 보도블록 사이에 한 개, 혹은 여러 개가 함께 자리한다. ‘걸려 넘어지는 돌’이란 의미의 스톨퍼스테인에는 그 장소에 살았었지만 나치 독일에 의해 희생된 이들의 이름과 생년, 그리고 사망한 장소가 기록되어 있다. 대체로 유대인들이다. 스톨퍼스테인은 베를린 시내에만 수천 개에 달한다. 이름과는 다르게, 실제로는 그리 높지 않아 행인이 걸을 때 방해가 되진 않는다. 그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과거의 희생자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추모하자는 의미로 쾰른 출신의 조각가 군터 뎀니히 (Gunter Demnig)가 1992년부터 시작한 캠페인이며, 자원봉사자들이 주기적으로 이 돌을 관리한다.
베를린 동쪽 끄트머리에 이스트사이드갤러리(East Side Gallary)가 있다. 이름처럼 철거하다 만 베를린 장벽 콘크리트 벽에 전 세계의 아티스트가 그린 정치와 역사적으로 의미를 담은 벽화가 가득하다. 여러 벽화들 중 가장 눈에 띄고, 또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이 러시아의 화가 드미트리 브루벨이 그린 ‘형제의 키스(Fraternal Kiss)’다. 키스의 당사자는 레오니트 일리치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에리히 호네커 동독 공산당 서기장이다. 브루벨은 이들이 이런 해괴한 세리머니까지 하며 지키고자 했던 공산주의가 결국 무너진 것을 해학적으로 묘사하며, ‘신이시여, 이 치명적인 사랑에서 저를 구원하소서’란 문구를 벽화에 함께 남겼다. 현재는 이스트사이드갤러리에 들르는 관광객들의 필수 포토스폿이 되었다. 우리와 같은 분단을 겪은 나라, 그러나 우리와 다르게 통일을 이룬 나라. 세상의 많은 장벽 중 독일 베를린에 있는 장벽은 거의 유일하게 많은 이들에게 의미를 전하는 역사적 유물이자 예술의 영감이다.
베를린을 다닐수록 독일인들이 두려워한 건 역사적 오욕이 아닌 ‘잊힘으로 다시 반복될지 모를 과오’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찰은 대체로 인정으로부터 시작된다. 감추고, 가리고, 좋은 것만을 드러내거나 그리 보이도록 포장하는 것이 미덕인 시대에, 자신들의 치부를 이곳저곳에 온통 드러낸 베를린에는 낭만 대신 잊지 않기 위한 노력인 박물관, 스톨퍼스테인,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등이 있다. B 씨의 할아버지가 남긴 메모는 삶을 변화시킨 습관이 되기도 하고, 소중한이를 기억하고 추억할 시간의 단서가 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독일인들에게 걸려 넘어지는 돌은 장애물이 아니라, 설령 걸려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 미래를 향해 한 걸음 더 내딛을 수 있는 기억 혹은 도약의 초석 (礎石, 주춧돌)인 셈이다.
마지막 날 베를린에서 산 엽서에 베를린에 대한 소회를 적어 한국으로 보냈다. 전기와 인터넷이 끊기면 없는 것과 다름없는 디지털 기록보단, 펜으로 적은 엽서는 보관만 잘하면 사라지지 않지만, 인스턴트 메시지에 길든 탓인지 즉시성이 없으면 꼭 수신인에게 전달될 거란 보장이 없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 막연한 바람이나 희망이 언젠가는 닿겠지 하는 베를린을 향한 나의 마음 같아 이 여행의 마무리로 ‘엽서 보내기’가 꼭 들어맞는 기억의 마지막 퍼즐 조각 같았다.
잊지 못함이 괴롭고, 잊힘이 두려운 요즘 나를 기억의 도시로 이끈 건 우연일까, 필연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