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들이여! 별을 주워라!
장문충이라는 지적을 몇 차례 당한 이후, 댓글을 쓰지 않는다.
쓰지 않다보니 자연스레 보는 일도 줄었다.
장문충이라는 말이 생겨나서 받지 않아야 할 비난을 받은 것이라 여겼다.
그게 옳다 믿었고, 그래야 속 편했다.
오늘 오랜만에 정치 관련 기사 댓글을 보며, 난 다시 확신했다.
난 장문충이 아니다.
그저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려다 보니 글자수가 남 보다 조금 늘었을 뿐,
5w1h를 모두 밝히지 않고 핵심만 던지려 해도 몇 문장은 필요했다.
읽지 않으면, 쓰지 않게 된다.
적게 읽으면, 적게 쓰게 되고,
그마저도 하지 않은 자가 쓰려하면, 깊이가 없어진다.
난 그런 자들과 대화하고 싶지 않다.
물론 읽지 않았거나 쓰지 않은 이들 중에, 깊고 오랜 생각을 해온 사람은 예외다.
그들에게는 나름의 철학이라는 이야기 거리가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여전히 인터넷 댓글창에 대해선 불만이다.
특히 노출 우선순위에는 더 큰 불만이다.
나는 오늘 내가 느끼는 출판 시장의 위기와 이유를 주장하는 장문충이 되려고 한다.
얼마 전부터 작정한 일이다.
그저께였나?
브런치 스토리 홈화면에 올라온 글 제목이 눈에 띄었다.
경수필과 중수필, 그 어느 카테고리에도 포함하기 민망한 일기장 같은 '에세이'들이 넘쳐나는 이곳.
레시피와 요리가 등장하기 시작하더니 이젠 맛집 소개까지.
그래서 여기 이름이 브런치인가?
블로그가 싫어서 왔건만......
어쨌든 그 글 역시 깊이는 없었다.
다만 본문에 내 예상과 맞아떨어지는 통계를 다뤘고, 날 생각하게 만들었다.
출판 시장의 전체 매출액, 그 상당 부분은 교과, 참고서란다.
그럴 줄 알았다.
새벽에 일어나 문득 떠오르길래 검색해봤다.
감소하고 있으리라는 추측도 여지없었다.
출판 업계가 그러 했으니 그런 결과는 당연하다는 장문충의 비아냥이 시작됐다.
진입 장벽이 낮아졌다.
누구나 글을 쓰고, 출판하고, 노출될 수 있는 시대다.
문학의 민주화.
그런데 이상하다.
경향이 짙어질수록, 문학의 향기는 점점 더 흐려지고 있다.
내 고민은 이랬다.
플랫폼은 알고리즘을 내세우고, 에디터는 이를 무비판적으로 따른다.
‘에디터 픽’이라 불리는 큐레이션은 이제 깊이를 골라내는 손이 아니라, 즉각적 소비에 최적화된 글을 '장바구니에 담는 손'이 되었다.
여기만 봐도 그렇다.
홈화면의 글들은 대개 ‘맞춤법’ 지키는 수준의 작은 감정 뻥튀기요, 몇 문장으로 마무리 지을 만한 아픔과 평범한 일상들.
그래도 그들은 쓰는 사람이니 동지, '생각'의 시간을 갖는 그 고귀한 인재들에게 격려와 위로와 감사를 전한다.
(기술의 발전이 삶을 이렇게나 편하게 만들었건만, 얼마나 바쁘게 사는 지 길을 걷는 시간 조차 스마트폰에서 눈을 못떼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 바쁜 세상에 '글을 쓰다'니...... 어찌 대견스럽지 않을 수 있겠나?)
오늘 내 타겟은 편집자들이다.
편집자들이 문제다.
외국 어느 출판사 편집자가 이런 황금을 내뱉었다.
"편집자란 별의 잔해에서 우주를 조립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지금 그들은 별 대신 반짝이는 플라스틱을 주워 모으고 있다."
그의 말대로 한때 편집자는 별의 잔해로 우주를 조립하려 했으나, 요즘의 편집자들은 반짝이는 플라스틱을 주워 쇼츠처럼 진열하려 한다.
쇼츠가 그렇듯 ‘가볍고 읽기 쉬운 글’은 많지만, 읽고 난 후 기억에 남는 문장은 점점 줄어든다.
문학은 원래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장르다.
김동리는 신념과 광기의 경계를 그렸고,
박완서는 사적 기억을 통해 시대의 폭력을 고발했다.
지금의 글은 어떤가?
‘공감’을 강요하고, ‘편안함’을 팔고, 기껏해야 “좋아요”를 받게 하려는 이모티콘 모음집에 그친다.
문학의 장벽이 낮아졌다면,
그 문을 지키는 경계병, 즉 에디터의 역할은 더 막중해졌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의 에디터는 큐레이터가 아니다.
트래픽 관리자에 가깝다.
글쓴이에게 SNS 사용 여부를 묻는가 하면, 일찌감치 마케팅을 위한 SNS 활용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고 조언하기도 한다.
그 결과는 뻔함이다.
뻔한 서사, 뻔한 감정, 뻔한 위로.
책이 주는 감동이 약하니, 사람들은 차라리 도파민을 폭발시키는 숏폼으로 눈을 돌린다.
책을 사서 읽으려는 여러 번의 시도가 없었을까?
모든 상품들이 그렇듯, 재구매 재시도는 감흥에서 비롯한다.
감흥이 기대 이하였거나, 없었던게지.
문학은 이제 유튜브에 비할 바 못된다.
출판, 문학 시장이 자기를 버린 결과다.
깊이를 포기하고, 팔릴 만한 책을 내려 안간힘 쓰는 사람들은 과거에도 많았다.
하지만 '에디터의 픽'을 통해 책을 낼 수는 없었다.
요즘은 뭐 웬만하면 작가다.
누가 내게 본인을 브런치 작가라 소개하더라.
웃으며 대꾸했다.
"나도 가끔 거기에 글 쓴다."
편의점에서 라면 끓인다고 셰프되는 건가?
작가라는 말은 고귀해서가 아니라, 무겁기 때문에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더욱이, 작가라는 말의 격이 아니라, 클릭 수의 경제학만 남은 현실에는 속이 상한다.
좋은 글을 고르고, 상의하고, 다듬고, 책으로 만들어 내는 직업.
그들이 편집자다.
편집자는 문학이라는 이름 아래 직업 소명의식이 확고해야 할 사람이다.
판매를 위한 전략을 짜는 건 영업전문가가 할 일.
잘 팔릴 글을 고른다는 착각이 책 읽기를 취미로 하는 독자를 멀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요즘 사람들이 그래서 그랬다'는 식으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로 물타기할 게 아니다.
요즘 사람들을 그렇지 않게 만들고, 진정한 문학에 심취하게 만드는 책임을 가져야 할 당사자가 누군지 따진다면 답은 명확하다.
불편한 글을 외면하고 안전한 글만 고르려는 경향을 버리기 바란다.
고전을 다시 읽고, 본분을 더 깊게 새기기 바란다.
그래서 부디 문학을 콘텐츠로 소비하게 하지 않았으면 한다.
지금 이 순간도 문학은 피가 묽어지며,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
당신들이 살리기 바란다.
"문학은 결코 대중을 따라잡으려 해서는 안 된다.
대중이 문학을 따라잡도록 해야 한다."
- Ernest Hemingway
과거에는 심지어 화장실 벽에도 글이 있었다.
깊이 있는 글도 많았다.
근래에는 발기부전제나 온라인 도박을 비롯한 여러 광고 스티커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화장실 벽의 명문장을 돌려달라는 심한 요구까지는 하지 않을테니,
판매부수, 클릭 유도에 연연하지 말고,
제발 글 다운 글을 좀 골라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