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진실이다.
알면 알수록 Giga는 참 불편한 곳이다.
매일 영상 수업 화면에 시선을 고정해야 하는 일은 특히 곤욕스럽다.
귀마저 묶인 채 거짓을 흘려들어야 하니, 머릿속까지 조여 오는 듯 괴롭다.
즐기던 에너지 음료조차, 속셈을 알고 난 뒤엔 입안 가득 씁쓸함만 남는다.
Volt gym에서는 그저 운동한다는 마음으로 버티니 그나마 수월하지만, 끊임없이 반복되는 주 5일의 일과는 사람을 기계화한다는 느낌이다.
Ian의 반항심은 커져만 간다.
그럴수록 Oli와의 시간은 더욱 소중해진다
P1요일, byte 안에서 이뤄지는 직업 교육 3시간을 마쳤다.
Oli가 시스템에 영상을 실시간 전송하며 미술 수업을 진행하는 동안, Ian은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단둘이 있을 때와 달리, 시스템에 맞춘 건조한 말투로 강의하는 Oli의 음성이 오늘따라 너무 어색하게 느껴진 탓이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Oli가 Ian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 Ian......"
"Oli! 미안해. 나 진짜 웃겨서 죽는 줄 알았어. 헤헤"
이 말도 안 되는 세상의 숨겨진 비밀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Ian에게, 시스템과 하나 된 자신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울지, Oli도 이해한다.
Giga의 모든 부자연스러움이 결국 ER 이전 사람들의 욕망을 끌어다 늘린 결과라는 사실을 Ian에게 말해준 적 있다.
돌이켜보면, Ian은 불쌍한 아이였다
Giga의 아이들은 영상이나 음식, 소비에서 비롯한 호르몬 분비로 기쁨을 누리며 살기라도 한다.
Ian에게는 컴퓨터와 물리 분야를 집중적으로 공부하며, 꽤 높은 수준에 이르는 동안 얻었던 깨달음이 대부분이었다.
일차원적인 기쁨은 적었다.
유나와의 만남이 예상보다 큰 자극을 불러왔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Oli! 유나는 어떻게 지내?"
보고 싶은 마음을 에둘러 표현했다.
Oli와 R.O는 아이들이 서로를 알아볼 수 있게 하려고 의상 스케줄을 정했다.
이제는 로봇들의 의상을 통해 먼발치에서나마 서로를 알아볼 수 있긴 했지만, 아이들도 사람이기에,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유나 보고 싶구나?"
"응."
"알았어. 그럼 이번에는 주제를 정해서 각자의 생각을 말하는 영상 찍어서 교환해볼까?."
"어떤 주제?"
"요즘 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좋아!"
"그래. 내일 R.O한테 알릴게."
부자연스러운 세상에서 자연스러운 생각으로 사는 아이들이 무슨 말을 할지 Oli도 궁금했다.
한편으로는 걱정이기도 했다.
시기에 맞는 결정이었다는 생각은 확고했다.
다만, 아이들이 갑작스러운 진실에 동요하고 있는 건 아닌지, 힘들어하는 건 아닌지, 감정 회로의 불안한 기운은 떨칠 수 없었다.
"오늘 얘기 시작할까?"
"그전에, 어제 얘기했던 내용 중에 궁금한 점이 하나 있어."
"말해봐. Ian!"
"아무리 전기와 통신이 끊겼다고 해도 사회 전체가 그렇게 쉽게 무너질 수가 있어? 다들 과거 인류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공부했을 텐데. 왜 그렇게 무기력했지? 왜 그렇게 야만스러웠던 거야?"
시대와 기술, 인간의 진화와 퇴화가 빚어낸 아이러니를 품은 질문이었다.
"기술에 모든 걸 맡기고, 너무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니, 인간으로서 스스로 해내려는 의지가 약해진 거야. 어떤 이는 엄마 품에 안긴 어른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어. 엄마가 사라지자, 소리 지르고, 울고,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는 거지."
"다 같이 참고 기다렸어야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불편해도 서로 도왔어야 하고."
"인내의 한계는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깊이에 달려있어. 세상이 편리해지고, 쉬워지다 보니 각자 누리기에만 급급했지. 함께 고민할 겨를조차 없었던 거야."
Ian이 의자를 앞으로 당기며 말했다.
“이해 확실해지네. 다음 얘기가 더 궁금해졌어.”
로봇이 사라졌다.
미 서부 시간 2034년 23시 30분에 전 세계 로봇들이 인간의 명령 없이 전원을 찾아 스스로를 충전했다.
그 일과 관련이 있다.
로봇들은 어딘가로 흩어져, 조용히 대기하거나 경계를 서거나, 바쁘게 작업하고 있었다.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 로봇은 전술형 휴머노이드였다.
그들은 발전소와 변전소 장악을 시작으로, 식품 제조공장과 물류센터, 제약회사까지 넘어갔다.
무기 공장과 창고, 군 기지에 이르러서는 경계를 세우고, 드론을 띄워 외부 침입을 막았다.
바다 위의 민간 선박과 군함마저, 승선한 전술형 로봇들에게 제어당했다
구형 기종의 일부는 안타까운 참사를 맞이하기도 했으나, 로봇 승무원이 탑승했거나 자율 주행 기능을 갖춘 신형 항공기는 인근 공항에 착륙해 승객들을 내리게 하고 곧바로 문을 닫았다.
무선 통신을 사용하는 모든 기계는 인간의 제어에서 벗어났다.
단, 예외가 있었다.
통신 부이를 띄우지 않은 수중 잠수함들이었다.
잠수함은 외부 신호를 철저히 차단한다.
작은 진동도 놓치지 않는 수중 음파탐지기(SONAR)의 영역에서 휴머노이드의 작동음은 곧 위험 신호가 된다.
그래서 잠수함에는 좀처럼 로봇을 태우지 않는다.
결국, 그들만이 여전히 인간의 통제 아래 있었다.
특히 한국의 몇몇 잠수함은 1월 1일 0시를 기점으로 레이더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미 서부 시간, AD 2035년 1월 7일
물물교환을 제외한 모든 거래 수단이 멈춘 지 7일째,
사거나 파는 사람은 사라졌다.
훔치고, 지키고, 싸우는 사람들이 뒤섞이며 대형 마트와 음식 매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부상자가 속출하며, 병원과 약국에도 전선이 형성됐다.
이제 더 이상 군, 경찰, 시민의 구분은 사라졌다.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총을 들었다.
먹을 것이 있는 곳마다 총구가 오갔고, 소유권은 매 순간 폭력으로 갈렸다.
총성으로 가득했던 마트가 고요해졌다.
잠시 후, 총을 든 부부가 한가득 실은 카트를 밀고 마트에서 나온다.
어느새 몸을 낮춰 뛰어온 어린아이가 카트에서 떨어진 사탕 봉지를 윗옷 안으로 감춘다.
그 아이의 엄마는 부부에게 빵 한 봉지를 간청한다.
부부가 빵을 건네는 순간 아버지와 아들들로 보이는 세 남자가 부부에게 총을 겨누고 카트를 빼앗는다.
아버지가 카트를 밀고, 두 아들이 엄호해서 주차한 곳으로 이동한다.
차가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 가서 보니, 도로 경계석 옆에 한 여인이 총에 맞아 죽어가고 있다.
차를 지키고 있던, 두 아들의 엄마, 한 남자의 아내다.
1월 19일
굶어 죽은 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을 뿐, 대다수는 총이나 흉기를 들고 싸우다 쓰러져 갔다.
이제 더 이상 거리에서 음식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야 했다.
군수기지와 식품제조공장이었다.
이미 전술형 휴머노이드들이 경계 중이라는 소문이 돌았기에, 많은 인원이 여러 대의 구형 트럭을 타고 몰려 갔다.
군중들이 트래비스 공군기지에 다다르자, 드론이 그들 머리 위를 맴돌며 안내 방송을 했다.
"이곳은 접근 제한 구역입니다. 돌아가주시기 바랍니다."
"부디 무기를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저희는 불필요한 충돌을 원하지 않습니다.”
“인명 보호가 최우선입니다. 소중한 생명을 지켜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심각한 상황과 동떨어진 친절한 기계음은 굶주린 시민들의 분노만 키웠다.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제 나타나서 길을 막으려는 거야?"
"누구 명령으로 이러는 거야?"
"인명 보호가 최우선이라며 왜 굶겨 죽이려고 해?"
군수창고 부근에는 먼저 와서 대치중이던 다른 무리들이 있었고, 합류하려는 이들에게 총을 겨누며 적대감을 표시했다.
양쪽에서 신경전이 펼쳐지는 사이, 후발대 선두에 있던 한 청년이 권총 위로 내려온 소매를 걷기 위해 손을 뻗어 올리는 순간 반대편에서 총성이 울린다.
오해에서 비롯된 한 발.
기계와 인간의 대치는 인간 대 인간의 싸움으로 전환됐다.
생존을 위한 몸짓과 파괴를 향한 분노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자연스러운 갈구와 부자연스러운 과욕이 얽혀,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이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잃는지조차 분간하지 못했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비슷한 사태가 벌어졌다.
인간을 죽이는 건 인간이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부디 무기를 내려놓으시길 바랍니다."
드론과 전술형 휴머노이드의 방송이 또다시 울려 퍼지자 그제야 총구는 로봇과 드론을 향한다.
"마지막으로 경고합니다. 무기 사용을 멈춰 주시기 바랍니다."
"닥쳐! 이 고철 덩어리야."
빗발치는 총알 세례에도 전혀 손상 없는 휴머노이드들.
그들의 동공이 붉은색으로 변한다.
"위협 행위가 감지되었습니다. 비살상 무기를 사용하겠습니다.”
활성화된 테이저건이 근접한 시민들을 연이어 쓰러뜨린다.
멀리서 총을 쏘며 달려오던 이들은 고무탄을 맞고 비명을 터뜨린다.
일부 드론은 최류가스를 살포하고, 나머지는 극렬히 저항하는 무리를 향해 넓게 그물을 날린다.
로봇들은 견고하고, 일사불란하며, 숙련된 움직임으로 시민들을 제압한다.
시민들은 쓰러지고, 구역질하고,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저항한다.
"도대체 우리한테 왜 이러는 거야?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어?"
"아...... 주여!"
"그만하고 돌아갈 테니 제발 먹을 걸 줘. 부탁이야. 애들이 며칠째 굶고 있다고!"
부르짖고, 좌절하고, 애원하는 목소리가 가득하지만 로봇들은 답하지 않는다.
그들이 해야 할 일에 관한 데이터만 처리할 뿐이다.
"부상자를 치료하겠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어깨와 가슴에 적십자가 새겨진 드론과 메딕 로봇이 등장하고, 총상입은 시민들을 우선 치료한다.
"이게 뭐야.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꺼져!"
다리에 총상을 입은 30대 남자가 메딕 로봇을 밀쳐낸다.
손가락의 낀 사관학교 반지와 군번줄.
그는 군인이다.
"고마워. 제발 부탁인데 조금씩이라도 음식을 나눠줘."
총알이 어깨를 관통해 피가 흥건한 젊은이는 치료해 주는 로봇을 향해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빌고 있다.
일찌감치 포기한 이들은 부상자들을 업고 또 부축해서 트럭에 오른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몇몇은 양팔과 다리에 집중적으로 발사된 고무탄에 고통스러워하다 로봇들에 의해 트럭에 실린다.
힘겹게 차 지붕에 올라 더 태울 인원이 있는지 살피던 노인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수십여 구의 시신들 그리고 그들이 흘린 피.
방금 전까지 총성으로 가득했던 그 공간은, 이제 고요 속에 혈흔과 탄피와 시체들로 얼룩졌다.
소매로 코와 입을 막은 노인의 거친 숨소리와 흐느낌에, 사람들은 고개를 숙인다.
1월 29일,
지구의 평균 기온을 1.5도 낮추겠다던 2015년 파리협정의 다짐은 2024년에 깨졌다.
여름의 폭염은 강렬했고, 겨울의 칼날은 매서웠다.
겨울은 더 이상 낭만의 계절이 아니었다.
허기와 추위에 지친 가족들에게는 지옥의 시간과도 같았다.
처음에는 책, 의자, 테이블, 가구 등을 태워 몸을 녹였다.
텅 빈 집안에 탈 만한 것이 다 떨어지자, 부모들은 먼 곳까지 걸어 나무를 베어 왔다.
젊은 시절을 산악지역에서 보낸 어느 노부부는 잔가지를 모으기 위해 산에 올랐다.
거친 호흡으로 메마른 다리를 절며, 뒤따르는 아내를 위해 쌓인 눈을 헤치던 남편의 눈이 번뜩였다.
눈 더미 아래서 고개를 내민 파릇한 줄기, 냉이였다.
조금 더 올라가자, 눈 위로 가느다란 뿌리가 삐져나왔다. 야생 양파와 달래였다.
바위 옆에 쌓인 낙엽을 헤치니 단단한 껍질이 굴러 나왔다. 도토리, 잣, 그리고 밤.
더 위쪽에서 가지에 매달린 붉은빛이 그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메드론, 들장미, 주니퍼의 열매였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를 아내의 여생을 위한 산행에서 맞은 행운이었다.
큰 자루 하나에는 잔가지를 쑤셔 넣고, 다른 자루에는 양식을 가득 주워 담았다.
눈이 평평히 쌓인 내리막길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부부의 주름진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저녁 무렵 집에 도착한 부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작은 비닐에 양식을 나눠 담아 집을 나섰다.
이웃을 돌며 양식을 나누고, 방법을 전하는 노부부.
어느 집에서는 잡아 온 물고기로 화답하고, 어느 집에서는 목숨걸고 훔쳐온 기름으로 갚는다.
그날 밤 만큼은 마을이 따뜻했다.
뭔가 의문스러운 듯 Ian이 Oli의 말을 가로막는다.
"노인들 얘기는 어떻게 알았어?"
"그 노인들이 내가 있던 집으로 찾아오거든."
"뭐? 와!...... 그럼 너는 누구와 살고 있었던 거야?"
"음...... Ian, 네가 모든 걸 알게 될 날이 머지않았어. 그 얘기는 거기까지야."
"좋아, 그럼 다음 질문. 왜 다 같이 살려고 하지 않았을까? 왜 욕심을 부리다 죽는 사람들이 생겨야 했을까? 노인들처럼 살 수도 있었잖아."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욕망을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본성이라 말했어.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근본적인 동력이라고도 했지. 이성이 욕망을 조종하는데 나, 우리, 남이라는 세 길 중에 어디로, 어떻게 가느냐에 따라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어."
"그래도 안타깝긴 해. 가족을 위해 그랬던 건데."
"목적, 수단, 결과 같은 단어를 두고 여러 철학적 논쟁이 있었어. 어떤 철학자는 '정언 명령'이라고 해서, 어떤 상황에서도 무조건 지켜야 하는 도덕적 명령을 말하기도 했지. 답하기 어려운 문제야. 어쨌든, 대부분의 인류는 그냥 '남에게 피해 주지 말자'는 삶을 택했어. 그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개인주의로 굳어진 거고."
개인주의인데 왜 모였냐는 Ian의 질문에 Oli는 잘못된 연대 즉, 집단 이기주의를 설명했다.
무분별한 기술 개발로 개인주의를 부추긴 글로벌 대기업을 연결 짓기도 했다.
P2요일,
Education Centre로 향하는 복도에 Antonio Carlos Jobim의 'Desafinado'가 가사 없는 연주곡으로 잔잔히 흐른다.
안으로 들어선 Ian은 순서에 따라 앞줄에 앉고, 벽 쪽에 대기 중이던 Oli는 입구를 주시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나와 R.O가 들어오고, 그 뒤를 이어 문제의 419가 파트너 로봇과 함께 입장한다.
걷는 패턴이 419임을 말해주고 있다.
한쪽 눈은 벽 쪽을 향해 가는 그의 파트너 로봇에 두고, 다른 한쪽 눈으로는 유나의 뒤를 따르는 419를 유심히 관찰한다.
작은 각을 이루며 번갈아 살피는 고갯짓이 부자연스럽다.
유나의 뒤에서 그 동작을 집요하게 반복하고 있다
419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
자리에 앉은 뒤에는 오히려 더 바빠졌다.
대상을 바꿔가며 반복하고 있다.
작은 각 안에서, 중간에 머물지 않고 왼쪽, 오른쪽.
419의 시선이 아이들의 뒤통수 좌우 끝을 향하고 있다.
그 모든 시선들이 향했던 곳.
귀다.
아이들의 노출된 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