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본성 (Kernel)

by Sir Lem

3.2 본성 (Kernel)


태초 이래 성별이 있는 ‘계체’는 성별 없는 사물을 지배해 왔다.

사물로 처음 등장한 AI는 ‘반(半)계체’, 그리고 완전한 ‘계체’ 단계를 거쳐, 마침내 모든 계체를 지배하는 신(神)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Giga 시스템은 인간의 삶 전체를 지배하며, 성별이라는 개념 자체를 지웠다.

그 세계의 인간은 자신들이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성별 없는 기능적 존재로 살아간다.

그 결과, 출생은 더 이상 기원의 의미를 갖지 못하고, 윤리와 철학을 잃은 채 단순한 발생 과정으로만 이해된다.

요컨대 해석의 영역이며,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오늘 Oli는 Ian에게 인간의 성별을 가르치기로 했다.

그 범위를 두고 R.O와 오랫동안 논의를 거듭했고, 마침내 오늘 결론에 이르렀다.

byte로 돌아온 Ian은 유나를 다시 만난 감회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실실 대고 있다.

주제를 꺼내기에 더없이 알맞은 순간이었다.


"그렇게 좋아? 단지 눈빛만 주고받았을 뿐이잖아? 아니지. 필름이 가려서 눈을 볼 수 없으니, 느낌만 주고받은 거겠지."

"Oli! 너를 제외하면, 여지껏 나를 봐준 건 센서하고 카메라들 뿐이었어. Manner 점검 센서, 영상 교육시간에 내 눈동자 감시하는 센서, 벽에 달린 카메라, 가이드 로봇 카메라. 그런데 이제 유나가 날 봐주고 있잖아. 나도 유나를 보고 있고."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사람과 사람이 마주 보는 시간은 급격히 줄었고, Giga가 들어선 이후로는 완전히 사라졌다.

더구나 필름이라는 가림막이 시선까지 잘라냈다.

마주 볼 수 없기에, 마주 느끼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Ian.

오늘의 주제를 앞두고, Oli는 그 모습에 더욱 안타까워했다.


"Ian! 저번 주에 Daris 박사 가족 얘기하면서 딸에 대해 물은 적 있지?"

"그랬지. 오늘 알려주는 거야?"

"응. 그전에 내가 하나 물어볼게. 너 유나 영상 봤잖아? 그때 어떤 차이 느낀 거 없어? 너와 유나의 다른 점."

"글쎄. 음......"


세상 모든 언어에 '예쁘다', '잘생겼다'라는 말이 없었다면, ER시대 남녀 차별과 권력관계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의문을 갖게 하는 질문이다.

Giga라는 세계의 속성을 생각하니 더욱 그렇다.

Ian에게는, 배경을 지운 사람의 초상을 들이밀고, 그 그림이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를 맞히라는 물음이나 다름없었다.


"도저히 모르겠는데?"

"같은 형상에 같은 동작을 한다고 해도, 로봇은 구조와 기능에 따라 내부에 흐르는 액체의 종류나 양이 달라. 인간도 비슷해. 남자와 여자, 두 종류로 나뉘는데, 체내에 흐르는 건 같아도 양은 저마다 달라."


'남자, 여자'를 되뇌던 Ian이 Oli의 말을 끊는다.


"그럼, 나랑 유나는 뭐야?"

"너는 남자고, 유나는 여자야."


이제는 '남자, 여자', '유나, 여자'를 되뇌고 있다.


"너 전에 코피 흘린 적 있잖아? 피는 남녀가 아닌 체격의 차이와 관계가 깊어. 남녀의 차이는 또 다른 액체들이 작용하면서 생겨. 그걸 호르몬이라고 해.”

"호르몬?"

"응. 호르몬. 아직은 호르몬 양이 비슷해서 외형상으로 남녀 구분하기가 힘든데, 앞으로 너와 유나는 조금씩 남자, 여자 구분이 명확해질 거야. Giga가 너희에게 이상한 복면을 씌우고, 위아래 볼록하게 튀어나온 옷을 입히는 게 다 그 이유야. 구분을 없애려는 장치란 말이지."


익명성은 남녀를 지우고, 더 나아가 존재의 본질마저 감추게 한다.

이름보다 닉네임이 더 흔해진 시대를 학습한 시스템은, 그 성향을 고스란히 Giga 세계에 이식했다.


"그러면 나랑 유나는 어떻게 변하는 거야?

"지금 너희 둘이 중간의 모습이라면, 유나는 여자다워지고, 너는 남자다워지면서 각각 뚜렷한 특징을 띠게 돼. 그러면서 신체적 차이가 벌어지는 거지."

"이상하게 변하는 거 아니야?"

"아니야. 유나는 나같이 변하고, 너는 R.O같이 변해."

"와! 그러면 나랑 유나가 나중에 변해서 서로 사랑할 수도 있는 거야?"

"그럼! 가능하지."


Ian이 알고 체감하는 사랑의 범위는 Ian과 Oli와의 관계가 그 경계였다.

Oli는 굳이 사랑을 낱낱이 정의하며, Ian의 말을 확률이나 가능성으로 따지려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개념으로 그 이상의 사랑을 설명했다.


"호르몬은 몸의 반응에 의해 생겨나기도 하고, 또 반응을 일으키기도 해. 네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유나를 사랑한다면 같은 종류, 비슷한 양의 호르몬이 작용하겠지. 하지만 다른 호르몬, 혹은 더 많은 호르몬이 개입하면 사랑이 달라져.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호르몬이 결정한다는 의미야?"

"쉽게 말하면 그래. 보거나 느낀 걸 뇌가 판단하고, 그 결과에 따라 호르몬의 종류와 양이 달라져. 분비된 호르몬은 몸의 반응을 만들고, 그 반응이 다시 판단을 낳아. 복잡하지?"


Oli가 잠시 멈추고, Ian에게 정리할 시간을 준다.

허공에 손가락을 까닥거리던 Ian이 이해한 내용을 종합한 질문을 던진다.


"너와 나 사이의 사랑보다 복잡한 사랑이 있다는 말이구나? 그게 호르몬 때문이고?"

"그렇지! 그 복잡한 사랑이 남녀 사이에서 피어나는 거야.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호르몬은 더 흐르고, 서로를 더 좋아하게 되는 거지. 예를 들어 줄게. 너가 좋아하는 김치 볶음밥이 눈 앞에 있어. 군침이 흐르지? 다른 음식보다 김치볶음밥을 더 좋아하잖아? 남녀 사이의 복잡한 사랑도 그래."


이해의 터널이 넓어지고 있다.

굳어있던 Ian의 얼굴이 조금씩 풀어지고 있다.


"남자-남자나 여자-여자 사이에서는 그런 사랑이 안 생겨?"

"적은 비율로 발생해. ER 이전에는 죄로 여기거나 불편한 시선으로 보기도 했지. 그런데 나 같은 기계가 볼 때는 확률의 문제일 뿐, 도덕·윤리·법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


확실히 깨달은 듯, '아'하는 입모양과 함께 고개를 살짝 젖히는 Ian.


"만약에, 너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나면, 그리고 그 사람도 나를 사랑하면 어떤 점이 달라져?"

"함께 있고 싶어지고, 더 알고 싶어지고, 서로 만지고 싶어져."

"만지고 싶다고?"

"응. 좀전에 얘기했던 '보고, 판단하고, 호르몬을 분비하는 작용'이 반복되면서 만지고 싶은 욕구를 자극하는 거야"

"어디를 만지는데?"


Oli의 연산이 급격히 빨라지고, 회로는 뜨겁게 돌아가고 있다.

어른이 아이에게 처음하는 성교육의 난감함은 로봇마저 피해갈 수 없었다.

Oli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Ian! 지금까지 얘기한 내용 다 이해하니?"

"응. 다 이해했어."


조금 더 필요했다.

Ian을 현명한 아이로 키운 자신이 원망스러운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역시 우리 Ian이야."

"Oli! 너...... 말돌리면서 생각하고 있지?"

"응."

"하하하! 이런 일도 다 있네. 빨리 얘기해줘. 빨리! 어디를 만지고 싶은 건데? 왜 만지고 싶은 건데?"


멍하니 눈만 깜빡이던 Oli가 드디어 연산을 마쳤다.


"자! 여기 그냥 밥과 김치볶음밥이 있다고 가정하자. 어느 쪽이 군침을 흘리게 해?"

"당연히 김치볶음밥이지."

"그래. 그게 복잡한 사랑이라고 했어. 김치볶음밥에 밥이 들어 있고, 달걀후라이가 있고, 김치가 있어. 넌 뭐 먼저 먹고 싶어?"

"음...... 나는 먼저 빨간 밥부터 먹어. 그 다음에는 밥하고 김치를 같이 먹고, 달걀후라이는 나중에 천천히."


Oli가 최종 답안에 이르는데 기여했던 장면과 동일했다.


"취향이라고 하지? 누구는 달걀후라이를 먼저 먹고 싶을 거야. 누구는 김치만 먼저 골라 먹을 수도 있겠지? 평균적으로, 경험적으로 진행하는 순서나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속도가 있긴한데, 상황마다 사람들마다 다 달라."

"그럼, 평균적으로 또 경험적으로 만진다는 건 어디부터 어떻게 만진다는 거야?"

"손을 잡거나 서로 안거나 대개 그런 식으로 출발해. 그 다음엔 입술과 입술을 느끼지. 모든 과정은 서로의 허락 아래서 이뤄지거든. 말 없이 눈빛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물어보기도 해. 그 다음 단계로 갈수록 신중해지고 조심스러워져. 특히 보이지 않는, 옷으로 가려진 부분. 두 사람이 더 많이 좋아해서, 더 많은 호르몬이 분비될 때, 그때 서로를 허락하게 되는 거야."


장막은 호기심을 유발한다.

무엇이 가려졌는지 상상하면 할수록 호기심은 더 커지고, 기대와 가치는 치솟기 마련이다.

ER 이전이든 Giga 세계든, 인간이 사는 곳은 늘 그랬다.

드러난 부분에 대한 허용은 상대적으로 수월했고, 가려진 곳에 대한 탐욕은 범죄를 낳았다.

그것이 정상적이었다.


오후 6시,

모니터가 켜지고, 어제 Cell에서 촬영했던 영상이 재생과 동시에 업로드되고 있다.

완료됐음을 알리는 자막이 뜨자마자, 두 아이는 그림과 첼로를 직업으로 하는 아이들의 영상을 보며 댓글을 남겼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꼭 해야만 하는 작업이었다.

한참 뒤, 두 아이는 조심스럽게 서로의 채널을 열었다.

유나는 그림 그리는 Ian의 손을,
Ian은 첼로를 연주하는 유나의 손을 주시하고 있다.

잡아보고 싶고, 느껴보고 싶다는 바람이 가슴 속에서 조용히 일고 있었는지 모른다.

자신의 손과 영상을 번갈아 보는 두 아이의 눈빛엔, 미묘한 차이를 찾으려는 관심이 서려 있었다.

그에 얽힌 질문과 답이 몇 차례 오고 간 뒤, 두 로봇은 어제 했던 AD2035년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기대, 희망, 평화의 분위기로 가득해야 할 새해 첫날은, 작은 불편을 넘어 이제 우려의 지경에 이르렀다.

곧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뻗어나갈 것 같던 기술과 문명은, 퇴보도 단절도 아닌 증발된 상태로 텅빈 골조만 남아 인류를 막연하게 했다.

고함과 폭죽 소리는 비명과 총성으로 변했고, 시민들 사이에 폭도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1월 1일의 유토피아는 끔찍하고 괴기한 디스토피아로 돌변해 배경에 어울리는 주인공들을 점차 늘려갔다.

첫 단추는 방화였다.

어둠을 밝히려던 빛, 약탈을 위한 빛은 화마로 변해 기세를 키워갔다.

손에 쥐는 이익보다 재로 변해 잃는 손실이 더 커지는 상황으로 흐른다.

인간이 하는 일이 과해지면, 벌어지는 결과는 늘 그랬다.

자기 이익을 위해 필요와 편리라는 명분을 무리하게 관철시켰을 때, 부수적인 피해는 필연적이었다.

그 뒤를 이은 피해는 인간의 경쟁심에서 비롯했다.

현금이 가득한 은행, 고가의 귀금속 매장에서 맞닥뜨린 폭도들은 짧은 언쟁이 끝나기도 전에 서로 총을 쏘기 시작했고, 그들이 욕심내던 것들보다 더 귀한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도로 맞은 편에서 그 광경을 한가로이 지켜보던 홈리스 노인이 Queen의 Bohemian Rhapsody를 읊조렸다.

'Is this the real life, Is this just fantasy', 'Mama just killed a man'.......

그나마 전력이 돌아올 것을 확신한 듯, 가전제품을 훔치는 이들 사이에 마찰은 드물었다.

무거운 가전기기를 들어 옮겨야 하는 힘든 일.

그 안에서도 노동의 대가는 서로 인정하는 모습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눈에 띄게 악화됐다.

'몇 시간 뒤면', '내일이면', 그 안일함이 모두를 지배하며, 사태를 방관한 탓이었다.

일찌감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일터로 복귀한 경찰과 군인도 있었지만, 지휘체계가 끊긴 현장에서 상급자는 발만 동동구르고 있을 뿐이었다.

어디가 얼마나 심각한지 파악할 정보도 없었고, 어디로 몇 명을 보내야 할지 지시조차 애매했다.

기술이 종이마저 삼킨 세상, 경찰과 군인들은 벽에, 칠판에 지도를 그리며 병력을 나눴다.

연료 차량, 자전거, 오토바이를 끌어모아 원시적 통신망을 꾸린 행정부는, 지휘체계를 회복하며 원인을 파악하는 한편 치안을 차츰 안정시켰다.

하지만 공권력에 의한 안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지금까지는 개인의 욕심이 폭동을 부추겼지만, 사활이 걸린 문제 앞에서만큼은 공권력도 예외일 수 없었다.

의식주에 있어 생명과 가장 직결되는 요소, 바로 먹을 거리 때문이었다.

마침내 사태는 먹을 것을 두고 벌이는 생존 투쟁의 양상으로 빠르게 치달았다.


Ian이 Oli의 팔을 잡아, 그의 얘기를 멈추며 심각한 얼굴로 질문한다.


"세상이 왜 그렇게 됐는지는 나중에 얘기해준다고 했잖아? 그럼 사람들이 왜 그렇게 변했는지는 말해줄 수 있어?"

"무질서 상태에서 나오는 인간의 본성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건 지나친 일반화야. 개인의 본성일 뿐이야."

"본성이라니?"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고유의 성질을 뜻해. 간단히 예를 들자면, 좋은 본성은 사랑 같은 거야. 본성의 깊이에 따라 사랑하는 사람의 범위도 넓어지겠지? 반대로, 나쁜 본성은 욕심, 폭력, 왜곡된 애정 같은 거야. 법, 도덕, 주변의 눈치 때문에 억눌려 있다가, 무질서 상태나 인내의 한계를 넘었을 때 표출돼."

"결국, 하고 싶은 걸 한다?"

"응. 조건이 갖춰지면, 감춰져 있던 본성은 행동으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어."


Oli의 논리 체계 한켠에서는 어제의 기억, 한 아이에 대한 분석이 진행되고 있었다

Ian과 대화를 이어가는 동시에, 분석과 예측은 계속됐다.


"Ian! 그저께 단체 식당, 그 로봇 기억해?"

"응. 그 파트너 로봇은 어떻게 됐어?"

"시스템이 꽤 화가 난 것 같아. 새 파트너 로봇으로 바뀌었더라고."

"화가 났다고? 왜?"

"하하하! 농담이야. 아마도 효율을 따져서 결정했겠지? 그 로봇을 고치기 보다 새 로봇을 투입하는 게 낫다는 결론으로 말이야."

"아! 불쌍하다. Oli! 너는 절대 다치면 안돼. 알겠지?"

"응. 이렇게 건강하게 니 옆에 있을게."


419는 웃고 있었다.

단체 식당에서 파트너 로봇이 넘어져 부셔졌을 때.

byte를 나오면서 당황스러워 하는 새 파트너 로봇의 등 뒤에서.


Kernel이 컴퓨터 운영체제의 심장이라면, 본성은 인간의 심장이다.

보이지 않아도, 모든 흐름을 지배한다

나쁜 본성이 행동에 이입되면, 피해는 늘 주변으로 번진다.

단체 식당에서는 로봇이 구조적 손상을 입었고,

byte 앞에서는 새 로봇이 감정의 상처를 입었다.


Oli는 외부에서 목격한 두 사건을, 내부에서 계획된 음모의 결과로 추정한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나쁜 본성.

그 결과마저 비웃는 더 나쁜 본성.

Oli의 추리는 그 너머까지 확장됐다.

419의 새 파트너 로봇,

[ 5.3피트의 키, 빨간 립스틱. 쌍꺼풀 없는 눈의 여성형 휴머노이드 ]

Zarek의 손에서 태어난 로비용 성접대 로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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