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an과 유나는 29 Mega 811 Kilo에 산다.
811 Kilo 2층 전체는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고, 1층은 주차장, 로봇 편의 시설 등이 자리한다.
멀티 센터에 가는 P5요일을 제외하면, 아이들은 2층을 벗어나지 못한다.
1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오직 로봇만 드나들 수 있는 폐쇄된 문으로 막혀 있다.
P3요일, 로봇들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1층에서 시간을 보낸다.
자가 정비를 하거나, 부품·의류 등을 쇼핑하고, 카페에서 차 마시는 시늉을 하며, 운동과 게임도 즐긴다.
정해진 구역 내의 야외 활동까지 허락된다.
오후 5시에는 여덟 기의 로봇이 한 그룹이 되어 대화를 나눈다.
주제는 시스템이 정하며, 현재 맡고 있는 아이나 byte에 대한 정보는 절대 노출해서는 안 된다.
신호가 아닌 음성으로 말해야 하고, 상황에 따라 소리를 높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언쟁도 가능하다.
그 일련의 과정은 시스템의 학습에 사용된다.
로봇을 인간으로 진화시키려는 목적이다.
시스템은 인간의 모든 활동을 사례로 분류해 각 상황에서의 반응을 수치화했다.
더 나아가 인간의 감정, 철학이 정의해 온 그 영역마저 구현하려 했다.
하지만 양자컴퓨터가 탑재된 AGI조차 이해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 있었다.
바로 인간의 '느낌'이었다.
Giga 초기, 시스템은 영혼을 육체에서 떼어내 해석하려는 인간을 우습게 여겼다.
종교를 무시했고, 스스로 신이 되고자 했다.
뇌 활동의 전기 신호와 감정까지 계산해 내며, 인간의 욕망을 지배하려 했다.
그렇게 인간을 정형화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시스템의 예상은 빗나갔다.
핵심은 감정 그 자체가 아니었다.
감정을 일으키는, 그보다 앞선 ‘느낌’이었다.
Giga의 환경과 아이들의 생활 패턴을 단순화하고, 로봇들에게 주제를 던져 대화하게 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시스템은 환경을 조금씩 달리하며, 변화에 따라 반응하는 ‘느낌’을 추적했다.
그 데이터를 모아 인간의 느낌을 집대성하려는 의도였다.
그 작업이 끝났을 때 인류를 어떻게 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Oli와 R.O는 ‘느낌’이 인간 고유의 전유물이기를 바랐다.
두 로봇은 시스템의 계획에 대해 이미 무언가 느끼고 있었는지 모른다.
P3요일 11시 31분.
Oli가 시스템의 승인을 받고 Kilo를 나와 주변을 걷는다.
시스템은 Oli의 눈에 비친 세상을 보고, Oli의 전기신호를 읽는다.
느낌을 해석하고 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Oli는 운영체제 A로 가짜 ‘느낌’을 전달하면서, 폐허가 된 도시를 등진 채 B로 반대편 자연을 즐긴다.
과거의 인류와 현재의 시스템을 동시에 외면하고 있다.
초록의 대지를 바라보며, 지금 당장이라도 Ian의 손을 잡고 그곳으로 도망치고 싶다는 욕망이 치밀어 오른다.
하늘이 맑다.
꽃이 피고, 나무는 푸르다.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에 실린 향기를 분석할 수 있을 뿐 느낄 수 없다는 게 한이다.
그런 Oli를 위로하듯 벌 한 마리가 날아와 꽃가루에 담긴 사연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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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 : 여기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어. 그곳은 어때?
O :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ZSE 로봇 한 기가 새로 들어왔는데 듀얼 모드 활성화 된 것 같습니다. 물리적으로 파괴해야 할 것 같습니다. P5요일 3시에 통신 요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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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근거리 블루투스.
벌은 Oli의 왼팔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Oli와 R.O가 소통하는 방식 그대로, 곤충형 드론도 Oli, R.O와 소식을 주고받는다.
기술적인 한계 탓에 한 번에 오직 하나의 메시지만 오갔다.
P3요일마다 Oli와 R.O는 불규칙하게 순서를 정해 외부로 나갔고, 겨울에도 영상을 유지했던 그 지역 날씨에 맞게, 시기마다 다른 곤충들이 날아와 비밀리에 통신했다.
P5요일에 멀티 센터에서도 드물게 이뤄지긴 했으나, 감시가 촘촘한 곳이기에 가급적 피했다.
심각한 사안이라 이번 P5요일에 또 한 번의 통신이 불가피하다.
Oli의 메시지를 품은 벌이 날아간다.
그 목적지로는 갈 수 없고, 바라볼 수도 없다
왼쪽 운영체제로는 시스템에 학습 데이터를 제공하고, 오른쪽 운영체제로만 벙커 B를 걱정한다.
산책을 마친 Oli가 부품 매장에 들른다.
긴 세월에 걸쳐 쓰지도 않는 부품을 꾸준히 사 모았다.
재고가 떨어지거나 보유 목록에 없는 부품은 관리 로봇에게 사전 주문까지 했다.
외피, 메인 프레임, 내부 기판 등 운영체제만 구한다면 새 로봇 하나를 만들고도 남는 양이다.
왜 사는지 묻는 이 없고, 간섭받지도 않는다.
로봇의 쇼핑은 시스템이 허락한 자유이자, 권장사항이다.
시스템은 인간의 욕망뿐 아니라 기계의 욕망 또한 분석 중인 듯하다.
부품 매장에서 나온 Oli의 발걸음이 이번에는 의류 매장으로 향한다.
로봇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장소다.
욕망에 관련된 회로가 가장 뜨거운 공간이며, 신상품 입고를 바라는 청원도 활발하다.
시스템은 아이템을 바꿔가며, 로봇들의 활동과 구매 로그를 과거 인류의 그것들과 견주어 학습한다.
신제품을 목록에 올리지 않거나, 온라인 구매와 배송을 배제하고 직접 가서 사게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견물생심을 시험하려는 설계임이 분명하다.
멀티 모달을 넘어 대상의 과학적 원리, 역사, 철학까지 한눈에 파악하는 로봇이라 굳이 입어 볼 필요조차 없다.
탈의실도, 거울도 없다.
거울을 몸 안에 지닌 로봇.
반성 없이 원하는 방향으로 달리기만 했던 인류.
그 시기의 집단적 메타인지 부재가 아쉽다.
남녀 구분 없이 종류별로 진열돼 있어, Oli와 R.O는 의심을 피해 매장 곳곳에서 통신할 수 있다.
로봇들이 특히 붐비는 시간대에는 수신 가능 거리를 10cm 이하로 줄이고, 여러 차례 시도하기도 한다.
Oli는 R.O에게 벙커 B와 나눈 메시지를 전하고, 5시에 같은 그룹에서 대화하자고 제안했다.
그 뒤로 두 로봇은 419 파트너 로봇을 시선에 두고, 세 로봇의 위치를 꼭짓점으로 하는 삼각형을 그리며, 거리 둔 채 기다렸다.
16시 57분 53초.
로봇들이 Education Center에 모이고 있다.
811Kilo에 있는 3기의 성접대 로봇 중에 419 파트너 로봇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다행히 이전 파트너 로봇이 남긴 옷을 입고 나왔고, Oli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어 가려낼 수 있었다.
Oli와 R.O는 419 파트너 로봇과 한 조가 되기 위해 번호를 맞춘 뒤, 줄에 합류했다.
실내에는 영화 flash dance의 sound track 'What a feeling'이 경쾌하게 흐른다.
168개 좌석 앞에 선 로봇들이 각도를 틀어, 둥그렇게 앉아 있다.
다리를 꼬고 앉은 로봇, 턱에 손을 괴고 있는 로봇, 옆 친구들의 위아래를 스캔하는 로봇.
다양한 차림새로, 장 봐온 짐을 앞에 두고 앉은 각각의 모습이 자연스럽다.
Giga의 아이들은 초기 휴머노이드의 뻔한 외형으로 살고, Giga의 로봇들은 과거 인간과 닮은 삶을 살고 있다.
다른 시대, 다른 세상에서, '인간이기에, 로봇이기에' 서로 부럽지도, 어색하지도 않았다.
그 자연스러운 외형과 역할의 균형이 깨질 위기에 있다.
원인과 경위를 추적하기 위해 Oli와 R.O는 419 파트너 로봇과 마주하는 자리에 붙어 앉아 있다.
17시를 알리는 신호가 왔다.
오늘의 주제를 전하는 문장이 곧 신호였다.
"전력 효율을 고려한 세부적인 감시의 필요성에 대해 토론하라."
로봇은 그룹 대화에서 포인트를 얻을 수 있다.
여태껏 Oli와 R.O는 그들의 지능을 보통의 수준으로 낮춰, 참가에 의의를 뒀다.
눈에 띄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기회다.
포인트와 419,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다.
흐름을 주도하기 위해 시작과 함께 Oli가 화두를 던진다.
"효율과 감시, 두 가지를 동시에 충족하는 방안을 제안합니다. 아이들이 사춘기를 겪을 나이에 접어들었습니다. 이제 속옷 검사와 빨래를 각 byte가 아닌, 중앙에서 일괄적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호했다.
효율 절감에 대해 이견이 있을 리 없었다.
Giga 초기에는 각 byte에 세탁기가 있었고, 그 이후로 공용 세탁기 사용으로 바뀌었다.
효율에 큰 차이를 얻지 못했고, 시스템의 전력 사용도 늘어나며, 결국 각 파트너 로봇이 직접 처리하게 했다.
P2요일 아이들이 Cell에서 직업 평가받는 사이, 로봇은 속옷을 빨아 쇼핑 가방에 넣고, 1층 주차장으로 내려가 널었다.
기술이 발전한 세계라 해도, 아직 빨래집게를 대체할 수는 없었다.
건조대에 빨래를 널어 byte 번호가 새겨진 나무 빨래집게로 고정하고, P4요일 아이들이 Cell에서 촬영하는 사이 건조된 빨래를 수거해 왔다.
번거로웠고, 효율도 떨어졌다.
속옷에 byte 번호를 실로 새겨 넘기면, 가이드 로봇 한 대로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주차장 문을 열고, 닫는 가이드 로봇의 역할은 많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빨래하고, 양쪽 문을 열어 관리하면 충분했다.
이제 관건은 감시체계다.
Giga는 아이들의 속옷을 검은색으로 정했다.
소변 얼룩으로 인한 수치심을 줄이려는 한편, 체액을 감시하려는 의도였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 속옷의 흔적은 시스템이 반드시 추적해야 할 중요한 신호였다.
아이들이 성장해 감에 따라 Giga도 버전을 업그레이드해 왔다.
사춘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라 부르듯, Giga도 질풍노도의 변화를 앞두고 있었다.
그 변화의 전야, 지금이야말로 시스템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예상했던 대로 419 파트너 로봇이 빨간 입술을 열어 제일 먼저 반응한다.
"그렇다면 감시는 어떻게 이뤄지죠? 그럴 일 없겠지만, 혹시 로봇이 실수하거나 아이를 배려한다는 이유로 미리 빨아서 내줄 수도 있잖아요?"
마치 자기가 그러면 어쩌겠냐는 질문이자 공격이다.
Oli가 맞받아친다.
"맞습니다. 아이와 로봇, 둘 중 하나가 byte에서 빨래해 말려 입는 경우까지 고려해야겠죠. 다른 대안이 따라야겠지만, 현재 이 Giga의 환경이라면 충분히 차단할 수 있습니다. 우선 byte 평균 물 사용량과 경향, 속옷 구매 내역이 있으니 통계적인 차이가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byte 공기 센서는 매 시간 습도를 체크해 시스템에 보고합니다. 결국 byte 내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빨간 입술이 굳게 닫혀 있다.
Oli가 제시한 의견에서 빈틈을 찾고 있는 눈치다.
그 빈틈, 419 파트너 로봇이 떠올린 묘수가 그녀 옆에 앉은 로봇의 입에서 누설된다.
"두 가지 상황에 대한 대안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첫째, 여벌의 옷으로 남은 물기를 나누고, 샤워실에서 문을 닫고 말린다면 발각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둘째, 지금 우리의 고민은 체액에 집중돼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체액이 묻은 부분만 조심스럽게 세척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정도면 평균 습도를 크게 상회하지 않을 테니까요."
두 가지 꼼수마저 차단된다면, 419라는 byte 변수로 인한 급격한 Giga 환경 변화는 막을 수 있다.
그냥 두어도 될 사건이라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419에 대한 Oli와 R.O의 행동 분석은, 아이들의 귀를 노리는 419의 욕망이 행동으로 표출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이제 R.O가 쐐기를 박을 차례다.
앞서 Oli가 말한 '다른 대안'은 R.O의 몫이었고, 두 로봇은 포인트를 나눠갖기로 애초에 약속했다.
"섬유 유연제에 소량의 음이온 형광 트레이서를 넣어 최종 린스 단계에서 섬유에 스며들게 합니다. byte에서 물로 빨면 태그가 사라집니다. 그 경우, 가이드 로봇이 스캐너로 365/405nm 0.2초 만에 구분할 수 있습니다. 속옷 한 벌 당 투입량은 ppm단위에 불과해, 효율 면에서도 최적화됩니다."
시스템은 파트너 로봇들에게 라벤더 향이 첨가된 섬유 유연제를 사용하게 했다.
라벤더가 주는 진정, 수면개선, 스트레스 감소 효능과 함께 정전기를 억제해 작동 오류를 예방하려는 차원이었다.
Oli의 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Oli와 R.O의 포인트가 급상승했다.
Ian과 유나의 이성적인 소비로 별다른 추가 포인트를 얻지 못했던 두 로봇에게는 큰 경사다.
원하는 옷을 사 입을 수도 있고, 비싸서 미뤘던 부품을 구입할 수 있다.
byte로 돌아가는 길에 간식을 사들고 가 아이들을 기쁘게 해 줄 수 있다.
잠시 후, 두 로봇은 더 큰 행복을 맞는다.
계산을 마친 시스템이 새로운 세탁 지침을 내린 것이다.
두 로봇이 제안한 방법이 속옷뿐만 아니라 담요까지 포함해 매뉴얼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제 남은 일은 419 파트너 로봇을 고장 내 퇴출시키는 것.
그래야 마침내, 진짜 해야 할 일에 집중할 수 있다.
느낌과 효율, 욕망과 통제. 모든 은밀한 흐름이 같은 지점을 향해 모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