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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작가 시점

by Sir Lem

미국의 철학자 해리 G. 프랭크퍼트가 말했다.


'거짓말쟁이는 진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숨기려고 하지만, 개소리를 하는 사람은 진실에 대한 관심 자체가 없다.'


자신을 과장하거나, 상대방의 환심을 사거나, 논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진실 여부와 관계없이 말을 꾸며낸다고도 했다.

미국 직장인들 사이에 가장 흔한 거짓말이 '좋은 아침'이었다는 장난 섞인 통계도 기억난다.

좋은 아침이라는 인사가 주술로 변해 동료를 일깨울 가능성은 희박하다.

대다수 직장인의 아침은 늘 피곤하다.

인사의 의미를 따지며 무용론을 펼치려는 건 아니다.

인사는 문장의 뜻과 별개로 그 자체의 가치를 가지는 미덕이다.

가치를 품지 않은 수작과 그 경향을 따지려는 오늘 나의 논점과는, 품격과 차원이 다르다.


며칠 전, 어느 글쓰기 플랫폼에 몇 개월 간 작업한 소설을 올렸다.

1.1절부터 2.8절까지 총 11개의 절, 전체의 절반 분량이었다.

업로드되자마자 알림이 울렸다.

나 같이 찾는 사람 드문 글쓴이에게는 그 울림 하나하나가 감동이다.

뭉쳐진 큰 감동을 한 번에 만끽하기 위해 쌓이길 기다렸다.

예닐곱 번 속삭이더니 그 뒤로 멎었다.

늘 그렇지 뭐.

일단 확인했다.

그리고 약 올랐다.


"에라 이......"


올린 지 10분도 안된 7만 자 분량 소설 마지막 절에 '좋아요'가 웬 말인가?

지금 확인해 보니, 2.8절에만 13개에 나머지 절은 한두 개.

이래서 미국의 철학자 얘기를 꺼낸 거다.

개소리를 하는 사람은 진실에 관심이 없다.

그들의 '좋아요'는 개소리였다.

자신을 과장하거나 상대방의 환심을 사려고 진실 여부와 관계없이 말을 꾸민다.

감정이라는 껍데기를 던져 자신의 프로필을 클릭하게 하려는, 품앗이 유도였다.

그놈의 디지털 품앗이.

상부상조 미덕이 그렇게 변질되고 있었다.

조상님들의 밭은 풍성했고, 곡식을 일구는 손길은 정성스러웠다.

반면 개소리 한 사람들의 밭은 초라했고, 작물은 메말랐다.

그들의 관심은 수확이 아닌, 초대에 머물러 있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흔적은 역력했다.

어떤 이는 천 명 단위 구독자에 댓글도 주렁주렁 달렸고, 후원도 탐스러웠다.

하나 부럽지 않았다.

작가라는 판 말석에도 끼지 못하는 중년의 지망생 눈에는 문학은 보이지 않았고, 숫자만 거슬렸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들은 서로를 작가라 부르며, 칭찬하기에 바빴다.

내가 꿈꾸는 '작가'라는 단어는 내 일과를 바꾸고, 내 건강마저 저울질하기에 꽤 무겁게 느껴진다.

심지어 출간한 사람들조차 내 기준으로 거르고 있다.

나는 작가가 되기 위해 숨이 차는 험난한 길을 걷고 있다.

그들이 사뿐히 걷는 그 길처럼, 꽃향기 흐르면 좋겠고, 열매도 따먹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괜찮다.

그냥 개소리가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 보이고, 누구나 다 아는 그놈의 개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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