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대학에 입학한 인천 출신 불량 학생은, 낯선 환경과 관계 적응에 애를 먹고 있었다.
공간과 사람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역색은 어색하고, 불편했다.
교내 곳곳에서 신입생을 핀셋처럼 집어 전략적 전도활동을 펼치던 종교 동아리 복학생들은 두렵기까지 했다.
이른 나이에 담배를 물고, 술을 마시며 거칠게 살아온 나는, 낯설고 선량한 사람들의 접근을 경계했다.
그들의 방식으로 부드럽게 거절하는 태도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터.
그때 제세를 만났다.
고등학교 동창 제세는 모태신앙을 이유로 교련 수업을 거부했다.
대학 갈 마음도 없다고 했다.
그래도 성적은 좋았다.
품성도 좋은 아이였다.
친하게 지내지 않았지만, 왠지 다가가 묻고 싶고, 이해하고 싶었던 친구였다.
그랬던 제세를, 전도 활동이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던 이과대 앞에서 우연히 만났다.
반가움이 압도한 나머지, 얼마전 나를 붙잡고 기도하려던 복학생 아저씨도 눈빛으로 제압할 수 있었다.
"제세야! 너 왜 여기......"
종교를 피해야 하는 동시에, 종교를 물어야 하는 자리였다.
주제가 조심스러워 완성된 문장을 던지지 못했다.
뜻밖의 재회가 만들어낸 시각적 자극에 몰입돼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제세도 나를 많이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성적이 우수했던 친구가 급히 타락해가는 과정을 보고 들었을 테니, 서울에 있는 나름 상위권 대학에서의 만남은 의외였으리라.
삐삐번호를 교환하고 약속을 정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로 기억한다.
학교 어딘가에서 만나 마을 버스를 타고 노량진역으로 갔다.
승객이 많은 버스 안에서는 대화가 없었다.
지금과 다르게 당시 대중교통수단 안에서는 기사 아저씨가 선호하는 라디오 채널의 음파가 전부였다.
또한 대부분 각자의 생각에 접속해 있었다.
역에 도착해 우선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학과와 관심있는 동아리에 대해서만 짧게 얘기를 나눈 뒤 커피숍으로 옮겼다.
우리만 있는 작고 조용한 실내는 다음 주제를 위한 적합한 공간이었다.
제세는 가족과 종교 얘기를 스스럼 없이 꺼냈다.
궁금하지만 묻기를 주저하는 나를 위한 배려였다.
시작부터 안쓰러운 가족사였다.
아들이 대학에 진학하길 바라던 제세 아버지는, 결국 제세를 데리고 집을 나오셨다.
신심이 가득했던 어머니와 두 누나는, 이별 이후에도 제세에게 끊임없이 연락하며 종용했다.
지금의 사정은 모르겠으나, 당시 그 종교는 대학 교육이 신앙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고등 교육을 권장하지 않았다.
입시를 준비하는 급우들 사이의 긴장 그리고 설렘이 자아내는 분위기에 제세의 종교관은 묽어졌고, 마침내 아버지와 대학을 택했다고 한다.
흔히 이런 상황의 주인공들은 '담담하다'라는 무채색 형용사로 묘사되곤 하는데, 제세는 오히려 생생했다.
일어났던 각 사건들, 그 시절의 감정을 얼굴에 갈아끼며, 의식의 흐름을 되살려 설명했다.
내게 자신의 내면을 알리려고 했다.
무성 영화의 변사가 전하는 슬픈 사연을, 가슴이 아닌 머리로 들었다고나 할까?
나는 제세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대화의 긴장이 풀리고 말이 길을 넓히며, 마시고 있던 커피도 주제에 올랐다.
제세의 성격이 여실히 드러나는 설명이 이어졌다.
제세는 본질을 중요하게 여기는 친구였다.
커피의 기원을 시작으로, 처음 그 쓴맛을 마주했을 때의 감각, 지금은 왜 마시는 지를 또박또박 짚어 나갔다.
커피 농장에서 죽어간 수많은 아프리카 노예들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주었다.
커피보다 술과 먼저 친해지고, 술에 더 밝았던 나에게는 유익하고 신선한 정보였다.
손가락이 아닌, 발과 정성으로 정보를 찾고 얻어야 했던 시절.
그날 난 제세를 이해하고, 커피에 눈을 떴다.
교수님에 대한 주위의 인상은 무서운 분, 깐깐한 분, 누구에게는 나쁜 놈이었다.
대학원 연구실 선배, 동기, 후배들 역시 학위라는 목적으로만 교수님을 대하는 분위기였다.
성격이 다소 거친 분이시긴 했지만, 난 교수님과 그의 지도 방식이 좋았다.
일본 오사카 대학의 엄격한 지도 교수 밑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교수님은, 학문과 예절에 늘 진지하셨다.
내 꼰대질 중 일부는 그에게서 흘러온 가치관의 잔재인지도 모른다.
분리된 공간에서 벗어나 며칠 일정으로 현장 견학이나 여행을 떠나야 할 때면, 모두가 교수님과 거리를 두려 했다.
식사나 술자리에서는 낮은 차수를 강압하거나, 가위바위보로 교수님 테이블에 동석할 희생자를 정했다.
차량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교수님 옆자리에 앉아 긴 여정을 고분고분해야 했던 박사 과정 실장 형을 불쌍하게 여기며, 죄다 좌석 등받이 밑으로 몸을 숨겼다.
그랬던 양반들이, 한 사람씩 마이크를 돌리며 노래 부를 때는 어찌나 열정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어필하던지.
인물, 공간, 행위의 아이러니는 다시 떠올려도 웃음이 난다.
그들의 교수님 거리 두기 성향은 각성을 일으키기도 했다.
함께 한라산을 등반하던 날, 교수님을 따돌리려고 선배 여럿이 달리듯 호기롭게 출발했다.
조만간 펼쳐질 장면이 눈에 선했다.
매일 연구실에 처박혀 툭하면 짜장면 시켜 먹던 저질 체력들이 오죽하랴?
금세 지쳐 우웩거리며, 곧 쓰러질 것 같은 백색의 얼굴로 바위에 쓰러져 있는 모습들.
실장과 함께 교수님을 모시고 오르던 내 눈과 마주치는 순간, 그들은 마치 셔츠를 찢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수퍼맨인양 날쌔게 산을 올랐다.
그러다, 그들의 기피 에너지도 이내 동이 나고, 결국 해발 1,500미터 지점의 대피소 앞에서 모두 널브러졌다.
꾸준히 오르시던 교수님도 힘이 부치셨는지, 잠시 쉬어 가자 하셨다.
실장에게 뭔가를 따로 주문하셨고, 널브러진 자들에게는 각자 마시고 싶은 음료수를 고르라 하셨다.
누구는 이온 음료를, 누구는 탄산 음료를 집었다.
난 선택권이 없었다.
교수님 별도의 주문 내용에 내 것도 포함돼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실장이 흰 물체를 들고 종종걸음으로 매점에서 나왔다.
종이컵 세 잔이었다.
당연히 차가운 음료를 예상했다.
'오렌지 주스? 식혜? 수정과? 그게 아니면 지역 특산 과일 슬러시?'
교수님이 먼저 건네 받으셨다.
"호오~~"
뜨거운 음식을 식히는 소리.
끓는 물을 방금 부어서 탄 믹스 커피였다.
이온을 보충하고, 탄산으로 짜릿해진 널브러졌던 자들은, 교수님의 눈을 피해 나를 비웃었다.
어떤 인간은 꽁꽁 언 손을 입김으로 녹이는 명연기를 펼치기도 했다.
어이상실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을 삭이며, '호오~~' 불어 한 모금 마셨다.
'딩동댕'
천국의 종이 울렸다.
제세가 내게 말해준 커피의 기원 중 하나가 떠올랐다.
에티오피아 목동 칼디, 춤을 추듯 날뛰는 염소, 빨간 열매의 전설.
몸에서 오라가 발산하듯 '부~~우'하는 느낌에, 머리속은 간지럽듯 맑아지고, 시야가 확 트이는 기분.
쥐뿔도 모르면서 좋다고 날뛰는 널브러졌던 자들.
언제 1500미터 고지를 올랐냐는 듯 여유로운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우리 세 사람.
교수님은 아셨다.
우리가 직면했던 문제의 본질과 해법을 정확히 알고 계셨다.
목마름이라는 직관적 욕망만을 채웠던 널브러졌던 자들은, 정상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널브러졌다.
잠든 인간도 있었다.
그들을 내려 보는 세 사람, 현명한 교수와 참된 두 제자는 느긋했다.
우리는 느긋하게 절경을 즐겼다.
단체 사진 속 그들은 찡그렸고, 우리는 웃었다.
유학 사업을 하는 동안 세 번 이사했다.
새 사무실로 옮길 때마다 직원들과 함께 우리 손으로 꾸몄다.
그렇게 해서 성공했다는 기억으로 마지막 사무실을 공사하던 날이었다.
벽에 구멍을 뚫으려는데, 드릴은 멀쩡히 있건만 드릴 비트가 보이지 않았다.
있을 만한 곳을 한참 뒤지다 포기하고, 직원과 함께 오피스텔 1층 철물점으로 내려갔다.
"아저씨! 드릴 날 요만한 거 있나요?"
출퇴근할 때, 점심시간에 멀리서 보던 아저씨의 근엄한 풍모가, 가게 안에서는 더욱 진중하게 느껴졌다.
절도있게 뒤돌아 가시더니 드릴 비트로 가득한 공구함을 통째로 들고 오셨다.
눈에 힘을 주고 살피시더니, 곧 하나를 집어 내밀며 말씀하셨다.
"미제"
풍채에 어울리는 두꺼운 목소리로 핵심을 던지는 간결함.
받아든 직원과 나는 똑같이 반응했다.
"오!"
그 한 글자에는 아저씨와 미국 제품을 향한 강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방금의 장면들을 떠올리자니 부끄러웠다.
얇은 목소리로 손가락 두 개를 비겁하게 오므리며, '요만한'이라고 말하던 나는, 장수 같은 아저씨에 비하자면 쫄병이었다.
참고로 지금 내 목소리는 그때의 회한과 흡연으로 조금은 성숙해졌다.
사무실에 도착해 드릴에 비트를 꽂았다.
경쾌하고, 활기차게 벽을 뚫고 나가는 미제 드릴 비트는 강대국의 위세를 실감케 했다.
"우우웅~~~~"
아저씨의 음성처럼 소리도 중후했다.
못을 끼워 넣고, 액자를 걸려는 찰나.
두 가지 사실이 떠오르고 밝혀지며, 날 당황스럽게 했다.
첫째, 비트보다 싼 콘크리트 못을 샀어야 했다. 우리에게는 망치가 있었다.
둘째, 액자 밑에 비트가 있었다. 어제 우리는 오늘의 우리에게 친절했다.
두번 째 구멍을 뚫기 직전, 의문이 피어올랐다.
주유소에서 기름 넣고 받은 쿠폰, 그 쿠폰들을 모아 교환한 국산 공구 박스.
과연 그 안의 약소국 비트와 강대국 비트는 어느 정도 차이일까?
민족 자존심 서린 손으로 비트를 꼽고, 꼿꼿한 기개를 떨치듯 드릴을 수직으로 세웠다.
"위이이잉~~~~"
비트가 돈다.
먼지가 날린다.
'요만한'을 말하던 내 목소리와 비슷했지만, 애는 날렵해 보였다.
원하는 깊이에 도달해 스위치를 끄고, 비트를 확인했다.
다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애는 꿋꿋했다.
속도는 약간 느리고, 내구성은 다소 떨어지지만, 그런대로 쓸만했다.
남아 있는 비트도 여러 개.
일반인이 일생을 살며 원 없이 뚫을 수 있을 정도였다.
넉넉히 챙겨준 제조업체의 세심한 배려가 고마웠다.
그 후로, 대체 불가능하지 않은 이상 난 국산을 선호하게 됐다.
녀석이 없다면, 내 여가는 단조롭게 녹아 없어질 게 뻔하다.
힘들게 살아보자는 각오로, 뒤늦게 오토바이를 배워 배달하던 시절.
지내던 강남의 한 고시원에서 용억이를 만났다.
내 우주에서 녀석은 늘 적당함 안에 살았다.
서로 거처를 옮겨도 적당한 거리였고,
대화를 나누어도 의견은 언제나 적당한 원 안에 머물렀다.
나를 챙기겠다고 2인분을 내야 하는 과소비를 제외하면, 녀석의 가계부는 적당한 소비 일색이었다.
어제, 우리 적당한 용억이가 차를 몰고 와서, 내가 가고 싶어하던 연안부두로 데려다 줬다.
추억과 현재를 비교하고, 다시 그날을 꿈꾸며, 희망을 채워 왔다.
휴대폰 갤러리에 배와 바다와 하늘과 갈매기도 가득 잡아 왔다.
주차비 500원.
신포동으로 옮겼다.
짬뽕밥을 시키면, 맨밥 대신 볶음밥을 준다는 중국집으로 갔다.
잡채밥·짬뽕밥 곱배기로 시키고, 리뷰 이벤트로 군만두까지 얻어 먹었다.
녀석이 처음으로 밥을 남길 만큼 많은 양이었다.
맛도 좋았다.
밥값 21,000원.
용억이를 만날 때마다 알량한 보답으로 커피를 산다.
누나 카드를 긁고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4,000원.
커피를 마시며, 며칠 전 두 사람이 겪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날도 내가 커피를 사고, 용억이가 밥을 사고, 내가 사는 월곶으로 돌아오는 차안이었다.
녹은 얼음물마저 빼앗기고, 빨대만 품고 있는, 책임을 다한 플라스틱 커피 잔.
집에 처박혀 글만 쓰고 있을 게 뻔한 커피 애호가를 위해, 또 다른 애호가가 누나에게 전화했다.
용억이는 누나가 외국 커피 브랜드 쿠폰 10장을 선물 받았다고 했다.
"누나! 나 쿠폰 두 장만."
"싫어!"
"알았어."
"언제 와?"
"좀 있다"
"알았어."
공짜가 쌓은 기대는 무너졌지만, 남매가 나눈 대화는 재미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웃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동네 도착 즈음에 커피 쿠폰이 날아왔고, 그 브랜드 매장으로 향했다.
당당히 쿠폰을 내밀고, 영수증을 받은 용억이.
만사에 불만이고, 비평 늘어놓기를 좋아하는 독설가에게 내밀었다.
제일 작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4,700원.
제세라면 찾아서 알아내고자 했을 그 정보를, 바리스타에게 물었다.
"어떤 원두에요?"
MZ들의 Staring이란 건가?
내가 실수한 건가?
날 빤히 쳐다보는 그 눈빛에는 어떠한 감정의 색깔도 보이지 않았다.
내 안의 민망함이 색을 드러내려는 순간,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입술만 움직였다.
"우리 거 써요."
남의 것을 훔치지 않았다는 결백을 말하는 건지, 우리나라 원두를 쓴다는 애국심을 말하려는 건지......
X세대는 혼란스러웠다.
커피를 받고 한 모금 당겼다.
심정을 담기에 '빨았다'는 부족해 보인다.
기억하는 맛, 아는 맛이었지만 왠지 더 씁쓸했다.
모텔로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반쯤 남은 커피, 미지근하고 산폐된 커피가 담긴 큰 잔 옆에, 4,700원짜리 외소한 커피잔을 나란히 놓았다.
검색해보니 두 브랜드 모두 고품질 아라비카 원두 사용을 주장했다.
흠을 잡고 싶었다.
로스팅 날짜, 포장 기술, 풍미저하 등 전문가들의 의견을 취합하며 내 불만을 합리화하고 싶었다.
내 신세가 이래서 그러는 게 아니라, 다들 한번쯤은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냐는 권유문을 만들고 싶어서 그랬다.
제세가 내게 말한 열강의 침략과 커피 농장 노예가 떠올랐다.
지금의 커피 열강과 자영업자들을 그에 빗대 보기도 했다.
바티칸에 공급한다는 커피도 마셔 보고, 커피 하나 때문에 몇 백 킬로미터를 달린 적도 있다.
부득이 편의점에서 인스턴트를 사마셔야 할 때도 특정 원두를 쓰는 커피를 찾기도 한다.
그럼에도 내가 아직 커피를 잘 몰라서 이러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보다 커피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들이, 비싼 외국 브랜드 커피를 마시려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굳이 그 이유를 알고 싶지는 않다.
내게 들어맞거나 어울리도록 알맞은 세상,
그 안의 것들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가끔 용억이와 담을 넘어 적당한 세상 밖으로 나가 보기도 하지만, 얼마 못 가 다시 돌아온다.
적당함이라는 모호한 단어로 이뤄진 세상이 더 따뜻하고, 편한 탓이다.
제세는 적당한 선택과 적당한 지식 안에서 즐기며 살았고,
교수님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찾아 적당하게 소비하셨으며,
용억이는 내게 적당한 동반자다.
미제 드릴 비트는 강했지만, 국산 드릴 비트는 적당했다.
제세는, 교수님은, 철물점 아저씨는 어떤 커피를 마시고 사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