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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퇴고]

by Sir Lem

"내가 기도를 하기를 했냐, 누구한테 도움을 받기를 했냐? 내가 잘해서, 내가 고생해서 성공한 거지."


잘 나가던 시절 이야기에는 여전히 그 믿음이 묻어 있었다.

왜 망했는지에 대한 답의 주어에 그는 없었다.

떠난 이들의 이름과 죄목만 나열할 뿐이었다.


'내가 이대로 죽을 것 같냐?'

'응. 사업 아이템 찾고 있어.'

'충분히 쉬었으니까 이제 재기해야지.'


이따금 걸려오는 전화 속 여유와 자신감은 묽어져 갔다.

그래서 전화가 줄었는지, 전화가 줄어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연락할 만한 사람도, 전화 요금 낼 만한 여력도 없는 처지로 비칠 뿐이었다.

자존심 한 조각 버리면, 몇 달치 생활비를 줄만한 이들이 있었고,

내뱉은 몇 문장 주워 담으면, 일 년은 살 수 있을 만했다.


"연락해서 사정 얘기하시면, 그 형님 성격에 몇 백은 해주시지 않을까요?"

"미친놈. 야, 나야 인마. 나, XXX야!"


전화마저 신호가 끊겼다.

휴대폰 기능 하나가 사라졌다.

그래도 휴대폰은 노래했다.

가난한 자에게 간헐적 흡연을 종용하는 알람.

기다린 자에게 상을 내리는 종소리.


"술 끊었으니 다행이지. 술까지 쳐마셨으면 어쩔 뻔했어? 흐흐흐"


혼잣말이 늘었다.

첫 모금 길게 빨아 일등석에 앉고,

두 번째 호흡으로 스위트룸에 눕는다.


"아...... 좋았지."


빨고, 뿜고, 그린다.

감은 눈과 벌려진 입에 묻은 기억,

기억이 웃는다.

검은 티에 떨어진 담뱃재 한 덩이.

좋다고 웃는다.


"오! 안 묻었어."


한 손으로 받치고, 다른 손으로 옷을 당겨 손바닥에 떨궜다.

아직 꼿꼿한 담뱃재.

콧노래를 부르며 세면대로 가서 물을 틀었다.

부서지고, 녹아서, 사라진 담뱃재.

엄지 만한 비누를 집어 두 손으로 비볐다.

내친김에 세수하려 했지만, 거품은 보이지 않고 손만 뿌득거렸다.

물 묻힌 지 하루가 지난 얼굴이 궁금했다.

대하기 꺼려지는 거울 그리고 사람.


"등신 같은 새끼."


노래를 부르다 제 얘기인양 울먹이고,

영화를 보다 제 사연인양 눈물 흘린 자가,

유독 마주하는 그에게는 냉정했다.

그는 늘 잘잘못을 따지려 했고, 굳이 심판하려 했다.

이해하고 용서하는데 품이 넓었지만, 사과는 꼭 들으려 했다.

그가 그를 미워하는 건 당연했다.

추억을 함께 했던 이들 앞에서는 당돌했고, 낯선 이들에게는 겸손했다.

지하철에서는 눈을 감았고, 길에서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는 동안 글감을 긁어내려 했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고, 다문 입으로 미소 지으며 시선을 내릴 때마다,

그의 입은 새 문장을 더듬고 있었다.

얼마 전 그는 중국산 키보드를 사고, 담배 사러 나간 새벽에 버려진 의자를 주워왔다.

그는 글에 재미를 붙였다.

옛날로 돌아가 자신감을 챙길 수 있고, 잘하면 돈을 벌 수도 있을 거라고 말했다.

새해 운세에 ‘자신이 주도하는 일을 통해 재물을 거둔다’는 괘도 뒤를 받쳤다.

당장의 형편에는 글이라 생각했다.

돈이 들지 않아서 좋았다.

가지고 있던 노트북은 멀쩡했고, 모텔 화장대는 알맞았다.

남는 베개를 등에 받치고, 철 지난 옷을 자리에 깔고 앉았다.

재를 터는 종이컵을 자주 갈았고, 창문은 종일 열어 두었다.

빗소리가 심한 날에는 글을 쓰지 않았다.

글을 쉴지언정 창문은 닫지 않았다.

이어지던 가을비가 가고, 날씨가 조화로웠다.

화창한 낮에 생각을 묶어, 고요한 밤에 글로 풀었다.

떠오르지 않는 단어는 기계를 더듬어 찾았다.

떠오르지 않는 기억이 머리를 긁게 했다.

이튿날부터 두 손으로 더 세게 긁었다.

걸어야 했다.

목적이 있어야 걸었는데, 걷는 게 목적인 세상으로 변했다.

기억으로 쓰려던 수필은, 창의적인 소설로 바뀌어 갔다.

당했던 과거는 복수극으로 흘렀고,

비웃던 자들은 무릎 꿇고 빌었다.

마침표를 찍을 때마다 날숨 섞인 웃음이 터졌다.

어둑한 새벽을 지나 따뜻한 정오.

짧은 영웅소설 한 편이 끝났다.

배를 채우고, 글감을 모을 시간이다.

그는 천 원 주고 산 섬유 탈취제가 대견스럽다고 말한 적 있다.

위아래로 뿌려대며 향을 마셨다.

모텔 밖으로 나갔다.

햇살에 구겨진 인상 그대로, 고개 숙였다.

운동화 언덕에 내려앉은 온기에 찬 숨을 불었다.

검은 운동화에 숨어, 찢어진 틈으로 숨쉬는 흰 양말.

사방으로 터진 실밥을 쓸어 구멍을 메웠다.

콧노래를 부르며, 그늘로 걸었다.

1,500원짜리 아메리카노를 사들고, 그 옆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로 갔다.

카스텔라 1,000원, 콘 1,400원.

봉지를 뜯고, 카스텔라를 뭉쳐 한입에 넣었다.

식사가 끝났다.

왼손에 커피를 들고, 오른손에 디저트를 핥았다.

콘 포장지를 주머니에 구겨 넣고, 포구 산책로로 향했다.

난간에서 멀리까지 펼쳐진 뻘이 밀물에 가라앉고 있었다.

산책 나온 사람들의 시선은 물을 당겼고, 그의 눈은 갯벌을 지켰다.

그는 여러 보석을 빗대며 다녀온 여행지를 자랑하곤 했다.

보석이 아니라면 갯벌이 낫다는 말로 눈앞의 바다를 깎아내리기도 했다.

목줄을 쥔 주인의 딴청에 강아지 한 마리가 그의 운동화를 맞대고 킁킁 거렸다.

눈을 맞추고, 색깔 없는 음성으로 질렀다. 찔렀다.


"가, 인마!"


그를 올려다보는 똥그란 눈동자에 한마디 더했다.


"내가 나쁜 놈이냐?"


통화를 마친 주인이 강아지 이름을 부르며 줄을 당겼다.

고개를 들어, 견주의 뒷모습에 대고 중얼거렸다.

그러다 소리 없이 움직이던 입술에 곧 욕과 음이 실렸다.

쿵짝쿵짝 힘겹게 걸어오는 여인 앞을, 강아지와 견주의 관계가 팽팽하게 막아섰다.

길을 막아선 두 존재와 그 관계를 번갈아 보는 여인의 얼굴에 웃음기가 흘렀다.

강아지가 줄을 따라 길을 내줬다.

그제야 그의 눈에 힘이 풀리고, 치아의 거센 바람이 잔잔해졌다.

넓은 시야 왼쪽 구석에 그녀를 두고, 조금씩 시선을 옮겼다.

마루로 된 바닥과 그녀가 다투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다른 걸음, 다른 박자.

시선이 갯벌을 정면으로 할 즈음, 그가 고개를 숙였다.

눈앞을 지나는 분홍색 운동복, 하얀색 운동화.

천천히 그리고 불규칙하게 멀어지는 환한 형체의 등 뒤에서, 그가 다시 중얼거렸다.


"신이 있어서, 저런 사람이 저렇게 걷냐?"


멀어지는 형체를 대신해 박자에 맞춰 혀를 찼다.

형체의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려는 찰나, 조각난 환한 물체가 땅으로 떨어졌다.

벤치에서 일어나 마루 옆 콘크리트 바닥을 따라 달렸다.

흰 테두리 안에 선홍·연갈색 꽃들이 가득하게 핀 손수건.

떨어진 파편을 주우려 허리를 숙이다 멈칫했다.

마지막 담배를 어느 손으로 폈는지 가물가물했다.


"에이 씨!"


오른손 새끼, 약지로 집어 그녀를 향해 달렸다.

그녀를 10여 미터 지나치고 나서야 삐걱거리는 마루 위로 서서 기다렸다.

입술을 문 힘겨운 표정으로 걷던 그녀가 그를 발견했다.

풀려난 입술이 작은 미소를 만들다 말고 소리를 냈다.

"어머!"


말없이 손가락으로 주운 위치를 가리키고, 손수건을 내밀었다.

손가락 사이에 껴 매달린 손수건과 주먹.


"아! 이거, 그... 담배 냄새 때문에......"

"오! 너무 감사합니다."


여인은 손수건을 받아 들고 바로 이마로 가져갔다.

다음날 새벽, 그는 그 장면을 그녀의 시늉이라고 썼다.

콘크리트 위에서 달리기부터 손수건을 내밀 때까지, 배려의 전말을 그녀가 다 이해했을 것이라고도 적었다.

그녀가 보답으로 건네준 사탕을 혀 밑에서 녹이며, 쓴 대목이었다.

새는 발음으로 소리 내 읽기도 했다.


"나는 됐으니까, 제발 그런 사람 소원 좀 들어줘라. 편하게 걷게 해 주라고."


낯빛이 달랐다.

돈 많고, 영향력 있는 남자 이야기를 마치고, 피식 웃음으로 일어섰던 그였다.

현실의 자신을 받아 적은 그날은, 줄곧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꾸미고 덧댈 일 없는 에세이는 빨랐고, 남자를 벗겨 놓은 여운은 진득했다.

한 개비, 또 한 개비.

가슴을 두드리고, 눈을 찡그렸다.

알람이 울렸다.

부추기던 알람이 역할을 바꿔, 줄담배 중인 그를 말렸다.

유일하게 간섭하는 친구의 성화에, 한 모금 길게 빨고 짓이겨 껐다.

1시에 후배를 만나기로 했다.

옷가지 냄새를 연달아 맡고, 하나를 골라 입었다.

거울 앞에 서서 머리의 윤곽을 째려보고, 턱을 바짝 내밀어 수염을 살폈다.

면도기를 집었다가 한숨 쉬며 놓았다.

검은 양말에 운동화를 구겨 신고, 모텔을 나섰다.

햇살이 눈과 가슴을 찌르고, 머리를 때렸다.

편의점 앞 나무 테이블에 앉고 나서야 콧등의 주름이 펴졌다.

제시간에 도착한 후배가 오토바이를 길가에 세우고 마주 앉았다.


"와! 그새 할아버지가 되셨네."

"흐흐흐 이 쌍놈의 새끼."

"뭐 드실지 정하셨어요?"

"아니."

"에이, 미리 정하시라니까."

"......"

"뭐 드시고 싶은 거 없으세요? 아니면 그냥 소고기 드실래요?"

"형이 이 새끼야...... 아니야 인마, 그건."


먹고 싶은 게 떠올랐다며, 밖에서 안이 보이는 근처 중국집으로 데리고 갔다.

짜장면을 비비다 젓가락이 부러졌고, 탕수육을 입에 넣다 침이 떨어졌다.


"형님! 와...... 아니 어쩌다 우리 형님...... 참."

"왜? 형 거지 같냐?"

"네, 뭐...... 비슷해요."

"여기 지나갈 때마다 환장하겠더라."


그릇을 모두 비웠다.

눈감고 입 벌린 채 천장을 향해 소리 없이 웃는다.


"형님! 이거 받으세요."

"이거 뭐야?"

"50이에요. 저도 배달하는 신세라 형편이 그래서...... 형님 드시고 싶은 거 사 드세요."

"야이 새끼야. 너도 힘든데."

"급한 빚 갚아나가면서 모은 거예요. 형님 것도 조금씩 갚을 게요."

"야아, 이거......"

"그래도 맘 잡고 일하니까 견딜만하네요."


봉투를 쥐고 한동안 바라보다, 숨을 들이쉬었다.


"은식아! 너 이제 형한테 빚 없는 거다. 그리고 이 돈은 형이 꼭 갚을게."

"아니에요, 형님. 채형일이 그 인간 잡으면 형님 빚 다 갚고, 마카오로 한 번 모실게요. 그럼 형님하고 퉁치는 거예요. 헤헤"

"아휴, 이 새끼...... 마카오는 됐고, 너 그놈한테 떼인 돈 다 받으면 우리 집에 생활비 좀 보내줘라. 우리 딸내미들한테...... 아빠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라고, 형 얘기도 좀 잘해주고."

"형수하고는 연락하셔요?"

"이 꼴로 무슨 연락이야. 나도 내 꼬라지 보기 싫은데, 마누라는 오죽하겠냐?"

재기가 조건이라고 했다.

그래야 가족을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큰 딸이 태어난 직후, 가족과 떨어져 필리핀에서 카지노 사업을 시작했고, 버는 족족 도박으로 탕진했다.

도박장에서 번 돈, 도박으로 날리는 게 자연스럽지 않냐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지만, 2년 뒤부터는 카드에 손대지 않았다.

호텔에서 지내고, 비싼 술집에서 매일 술을 마시며 돈 걱정 없이 살았다.

손님들에게 떼이고, 주변과 나눠 쓰느라 잔고가 비면 빌려서라도 썼다.

동업자에게 빼앗긴 돈을 되찾으려는 동안에도, 그의 생활은 일관됐다.


"10년을 황제 같이 살았는데 무슨 미련이 있겠냐. 은식아! 형은 미련 없다."

근황을 묻는 후배의 질문에 다른 얘기 없이 그렇게만 답했다.

정말 행복했다던 시절에 자주 어울려 지낸 후배였다.

비슷한 경험으로 모든 걸 잃고, 다른 모습으로 변한 두 남자.

오토바이에 달린 배달통과 후배를 번갈아 보며, 주머니에 돈을 움켜쥐었다.

인사하는 후배에게는 말없이 눈감고 고개만 끄덕였다.

엔진음이 울리자 눈을 떴고, 코너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깜박이지 않았다.


"나는 알아서 할 테니까, 제발 우리 은식이, 그 도망간 자식 꼭 찾게 해 줘라. 의리 지키는 건 저 놈밖에 없어."


가슴이 저려서였는지, 마음이 찡해서 그랬던 건지, 가다 서다를 되풀이했다.

경계석에 앉아 미간을 찌푸리다, 이 악물고 일어나 다시 걸었다.

미용실 앞에서,

"이발은 늦게 할수록 절약이다."


과일 가게 앞에서,

"과일 가게 큰 아들이었잖냐."


옷가게를 지나며,

"계절은 바뀐다."


주저하고 내뱉고, 지나쳐 걸었다.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은 돈 봉투를 주물럭거리며,


"은식이가...... 우리 착한 은식이가."


후배 이름을 흥얼거리며 걷다, 휴대폰 매장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미납 요금은 부담스러웠는지, 선불 심카드를 샀다.

연락할 만한 사람은 후배 하나뿐이었고, 후배는 메시지 대화가 배달에 방해된다며 투덜거린 적 있다.

안테나 표시 옆, 우뚝 솟은 신호 막대들을 보며 입을 가리고 웃었다.

봉투를 쥐었던 손에서 나는 낯선 냄새에 표정이 굳었다.

매일 들르던 커피 매장을 지나쳤다.


"처먹는데 정신 팔려서 동생 커피도 안 챙기고...... 에라, 이 새끼야. 넌 마실 자격 없어."

처음으로 커피를 거른 날이다.

입 안으로 새는 바람에 입맛을 다셨다.

오랜만에 제대로 먹은 한 끼였다.

후배가 준 돈의 용처가 정해졌다.

마트로 가서 즉석밥과 컵라면을 박스로 샀다.

김치와 단무지 사이에서 눈을 굴리다, 작게 포장된 단무지도 집었다.

'기억력'을 되뇌며 참치캔과 호두를 찾았지만, 가격표에 욕을 뱉고 뒤돌아섰다.

모텔로 돌아가는 길.

실없는 웃음이 흥을 일으키고, 입가의 근육은 노래를 방해했다.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들과 자신의 길을 가고 싶다는 가사의, 그의 애창곡이었다.

노래의 기운 탓이었는지, 여느 때와 다르게 나뉘지 않은 긴 잠을 자고 일어났다.

담뱃갑을 열어 개수를 세고, 여행 가방 속 동전을 꺼내 편의점으로 갔다.

찾거나 재지 않고, 분말 커피와 참치캔을 집었다.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컴퓨터를 켰고, 커피 포트에 물이 끓는 동안 캔을 뜯어 참치를 먹었다.

캔에 남은 기름은 입을 대고 마셨다.

커피를 타고, 첫 문장을 쓰기까지, 행동에 끊김이 없었다.

커서의 움직임도 경쾌했다.

쓰라린 기억의 단락에 담배를 물고, 쓴 연기가 이마를 주름지게 했지만, 글자수는 아랑곳없이 쌓여만 갔다.

자정 즈음 세수하고 앉아, 햇빛에 화면이 번들거릴 때 일어섰다.

하루는 어린 시절, 다음 날은 요즘 얘기.

앞뒤로 고통의 시절에 다가가고 있었다.

'왜'라는 답의 주어에 '내'가 들어앉았고,

만약이라는 가정보다 '그랬다'가 늘었다.

그가 과거의 그를 활자로 벗기기 시작했다.

담배는 늘었지만, 한숨은 줄었다.

밤은 점점 길어지고, 할 얘기는 많아졌다.

아이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필리핀에 도착해 있었고,

어제에서 거슬러간 이야기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끝났다.

자기 인생 가장 고통스럽다던 그 시절만 비어 있었다.

배를 채워주고, 목을 축여주던 것들이 사라졌다.

그 사이 쓴 돈은 담뱃값이 전부였고, 나가야 할 이유도 그게 다였다.

창문으로 손을 내밀어 위아래로 휘젓고, 터진 쇼핑백에 억눌려있던 패딩을 꺼내 입었다.

맑은 하늘과 검은색 취향은 그대로였지만,

온도는 달랐다.

포구로 향하는 길을, 나눠서 걸었다.

벤치에 기대고, 경계석에 앉아 오래 생각했다.

커피 매장과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는 길에서는 앞을 보고 걸었다.

바다 비린내가 이제 막 콧속을 스며드는 횡단보도 앞에서, 패딩을 열어젖히며 땀을 닦았다.

파란불로 바뀌고 알림음도 울렸지만, 건너지 않았다.

고개를 젓고 뒤돌아 마트로 향했다.

참치캔과 호두로 바구니 하나를 채우고, 사과와 탄산음료를 다른 바구니에 담았다.

마트를 나와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횡단보도 앞에 섰다.

리어카 넘치게 폐지를 싣고 가는 백발노인이, 한 발 한 발 그의 앞을 지나고 있었다.

짓눌린 검은 타이어와 녹으로 덮인 바큇살이 내는 삐걱거림.

그 소박한 장면과 소음이 잘리고 부서졌다.

속도를 급히 줄인 파란 스포츠카가 시야의 반을 빼앗았고,

멀리서 중후하게 부르짖던 기계음이 날카롭게 변해 귀를 쪼아댔다.

칭얼대는 경적에 노인은 태연했다.

괴성 지른 공회전에 노인이 움찔했다.

비닐봉지가 매달린 그의 양 팔에 핏줄이 섰다.


"누구는 사는 게 지옥이고, 누구는 천국에서 악마같이 살고...... 그냥 다 죽자. 다 죽고, 어디에서 만나는지 보자."


모텔들이 모여 있는 동네에 접어들었다.

한적해서 새가 울던 곳이, 복잡하게 섞인 굉음들로 뒤덮였다.

쿵쾅거리는 중저음이 그의 가슴을 박자 맞춰 두드렸고,

익숙한 엔진음이 그의 걸음을 겁박했다.

파란 괴물이 다시 나타나 혀를 내밀었다.

차창밖으로 손을 뻗어 모텔을 고르는 젊은 남녀.

양쪽 창을 열어 꽁초를 던지고 침을 뱉고 있었다.

그가 이를 물고 찬바람을 들이마셨다.


"사람 못 될 것들이면 일찍 데려가시고, 손모가지가 문제면 싹둑 잘라 주시고."


방으로 돌아와 사과, 참치캔을 하나씩 먹고, 호두를 한 주먹 집어 입 안에 욱여넣었다.

반쯤 삼키고 나머지를 씹는 중에 탄산음료를 마셨다.

입안에서 거품이 터져 나와 검은 티에 흘러내렸고, 거품이 가신 젖은 자국 위로 호두 찌꺼기가 선명했다.

옷을 당기고 혀로 핥아 흔적을 지웠다.

손을 털고, 왼손은 키보드 위로, 오른손은 마우스를 집었다.

곧 세로 막대가 검은 글자를 찍어내며 수평으로 빠르게 달렸다.

죄도 없고, 죄인도 없는 문장이 이어졌다.

아쉬움이나, 원망의 단어도 없었다.

그래서 빨랐다.

동업자를 만나며 후배 은식과 소원해졌던 시기에 들어 막대가 주춤했지만,

돈 욕심이라는 이유를 토해 내며 다시 속도를 냈다.

평소보다 늦게 잠들고, 늦게 일어났다.

닫힌 창문을 열고 담배를 쥐다 내려놓았다.

창문도 닫았다.

어제 쓴 글을 읽으며 여러 번 고개를 젓다가, 처음으로 돌아가 퇴고를 시작했다.

어제와 달리 막대는 무거웠고, 허둥댔다.

뱉고 먹는 단어와 문장이 늘어났다.

글이 촉촉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막대가 멈췄다.

그의 오른손은 이마를 받치고 있었고,

그의 두 눈은 물방울을 떨궈 글을 찍어내려 했다.

그의 코는 들숨을 길게 마셨으며,

그의 입은 갈라진 바람 소리를 내고 있었다.

비바람에 남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이 위아래로 세게 불더니,

비가 멈췄다.

창문을 열고, 담배를 물었다.

휴대폰 알람을 세 시간마다 울리게 하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왼손으로 연기를 피우고, 오른손으로 그를 울린 문장에 마침표를 찍었다.


'매번 면세점에 들러 술과 명품을 잔뜩 샀지만, 나를 위한 건 단 하나도 없었다.

기내에서 파는 전기면도기가 늘 눈에 밟혔건만.'


눈을 치켜뜨고, 손가락으로 화장대를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가 준 염색약으로 머리를 물들이고,

일회용 면도기를 털고 씻어, 희고 검은 긴 수염을 한참 밀었다.

턱을 매만지며, 오래간만에 영화도 몇 편 봤다.

사과·참치·호두를 차례로 먹고, 탄산음료로 입을 헹군 뒤 밖으로 나갔다.

작은 블록을 느긋하게 돌았다.

몇 번 거리를 두고 지켜봤던 가판에서 운동화를 사고,

남성 전용 미용실에서 이발도 했다.

생활용품점에서는 2천 원짜리 다크초콜릿을 웃으며 결재했고,

모텔 앞 편의점에 들러 티백 녹차 한 박스와 담배 두 갑을 사서 돌아왔다.

방문을 닫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어! 은식아! 하아, 하아......"

"운동하셨어요?"

"아니. 나갔다 하아...... 이제 들어오는 길이야. 하아......"

"형님! 모텔 주소 좀 보내주세요."

"응? 주소는 왜? 하아......"

"아이고, 노인네 다 되셨네, 진짜. 얼마나 걸으셨길래. 아니, 형님 옷 하나 사서 보내려고요."

"그러지 마라. 안 그래도 미안한데."

"저 배달할 때 입을 기모 바지하고 윗도리 사면서 형님 것도 사드리려고요. 비싼 거 아니에요."

"하아......"


몇 번을 사양하다, 끝내 주소와 방번호를 문자로 보냈다.

'식사 꼭 챙기세요.', '좋은 것만 생각하세요.', '형님은 꼭 재기하실 겁니다.'.

대화창을 거꾸로 스크롤하며 가슴을 쳤다.

그가 은식에게 보낸 답장에는 빠짐없이 욕이 있었다.

'고맙다', '미안하다'는 보이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썼다 지우길 반복하다, 처음으로 고마움을 활자로 남겼다.


'은식아! 네 덕분에 형이 하고 싶은 거 편하게 하면서 산다. 고맙다.'


저장했던 글을 불러와 마저 쓰려는 찰나, 은식에게 답장이 왔다.


'형님! 쓰신 글 일부라도 보내주세요. 옛날 생각하면서 읽고 싶네요.'


아랫입술을 물고, 코로 웃으며 답했다.


'형이 마무리하면 보내줄게. 이번 주면 끝날 것 같아.'

'벌써 그만큼 쓰신 거예요?'

'응. 빨리 끝내고, 형 이제 일자리 알아보려고.'

'무슨 일이요?'

'무슨 일이든, 얼마를 벌든 해야지.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 없잖아.'


일주일 하루 14시간 이상 글을 썼다.

은식과의 대화도 꾸준했다.

글은 차가웠고, 대화는 따뜻했다.

그는 과거의 그를 위로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성하고, 후회하게 했다.

가장 고통스럽다던 시절을, 죄스럽고 부끄러운 기억으로 돌려놓았다.

은식뿐만 아니라, 읽지 않았던 메시지들에 겸손하게 답했다.

사과하고, 감사하고, 약속했다.

글을 마무리하고, 은식에게 전화했다.


"은식아!"

"예에, 형님!"

"글 다 썼다."

"진짜요? 와아!"

"은식아!"

"예에."

"네가 보기에 형 어떤 사람이냐?"

"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쁜 사람이냐?"

"아이고, 형님."

"형이 글 보내줄 테니까, 네가 한 번 봐. 형 어떤 사람인지."

"아이고, 우리 형님 문학하시더니 감성이 풍부해지셨네. 양은 얼마나 돼요?"

"12만 자, 책 한 권 정도야."

"잘됐네. 보내주세요. 어차피 내일 비 와서 일 안 나가니까 읽어 볼게요."

"그래. 이거...... 우리 애들도 봤으면 좋겠다. 좋든 싫든 이게 나니까."


전화를 끊고, 그는 다시 한번 읊조렸다.


"우리 애들이 봤으면 좋겠네요. 좋든 싫든 이게 나니까. 아시지 않습니까?"


자정이 넘었다.

은식에게 파일을 보내고, 침대에 누웠다.

밤낮이 바뀌었다.

그 사이 밖에 나가지 않고, 방 안에서만 지냈다.

음식은 이미 바닥났고, 남은 건 녹차 티백 여섯 개뿐이었다.

8시경에 눈을 떴다.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큰 비가 내려도 들고 나가지 않았던, 살 하나가 부러진 우산을 폈다.

커피 매장에 들러 뜨거운 라테를 샀다.

흩날리 듯 내리던 비는 줄기로 변했고, 서둘러 굵어져 갔다.

운동화에 물이 스며들더니, 넓게 비집고 들어와 질퍽거렸다.

가다 서기를 반복하다, 포구를 지나 산책로 초입에 도착했다.

그가 늘 머물던 자리는 아직 100여 미터가 남았다.

갯벌이 잠기고 있었다.

밀물이 입을 벌리며 다가오고, 빗물은 채근했다.

우산을 겨드랑이에 낀 채, 종이컵을 쥐고 플라스틱 덮개를 열었다.

뜨거운 라테를 식히려고 불어대는 바람이 약해 보였다.

간격도 짧았다.

그가 왼손을 가슴에 대는 순간 우산은 앞으로 기울었고, 종이컵을 쥔 오른손이 급히 오므라지며 라테가 뿜어져 나왔다.

하얗게 물든 바닥에 그가 잠겼다.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번갈아 쌓였다.


'형님, 말도 안 됩니다. 이 착한 애가 정말 어린 시절 형님이라고요?'


'형님! 245 페이지에 저 문 차고 나간 거, 형님 미워서 그랬던 거 아니에요.'


'형님! 몸 안 좋으세요? 가슴 아파서 못 걷겠다는 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날 밤, 비를 맞고 달려온 은식의 오토바이가 모텔 앞에 섰다.


"아주머니! 혹시 701호 저희 형님 보셨어요?"

"아침에 나가서 안 들어오길래 낮에 청소하러 갔는데, 난리도 아니야. 방에 무슨 드러운 의자를 갖다 놓고, 참치캔에, 거 뭐야... 사과 찌꺼기에, 호두 가루에...... 아휴!"

"아, 진짜. 아줌마! 저희 형님, 몸도 안 좋으신 양반이 아침부터 연락이 안 된다고요!"


여주인이 그의 번호로 두 번 전화했으나 받지 않았다.

두 사람이 그의 방으로 올라갔다.

방문을 열자 모텔 탈취제로 가리지 못한 옅은 담배 냄새가 흘러나왔다.

방 안은 희고 깨끗한 모텔 용품과, 검고 냄새나는 그의 물품이 뚜렷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하얀 침대 옆에는 꽁꽁 묶어 놓은 검은 큰 비닐이 보였고, 그 안에는 새로 산 흰 운동화와 은식이 선물한 회색 옷이 곱게 포개져 있었다.

하얀 대리석 무늬 화장대 위에는 검은색 노트북이 평행하게 놓여 있었고, 화면에는 하얀 바탕에 '퇴고'라고 적힌 책 제목이 한자로 쓰여 있었다.

그의 가방을 뒤졌다.

은식이 건네준 흰 돈 봉투가 나왔고, 앞면에는 '우리 은식이'라고 쓴 그의 글씨가 보였다.

은식이 코를 훌쩍였다.

눈을 한 번 훔치더니, 가방 앞주머니를 열어 필리핀에서 쓰던 휴대폰을 발견했다.

전원을 켜고 연락처를 열었다.

'사랑하는 우리 딸 1'

'사랑하는 우리 딸 2'

'우리 마누라'

형수 번호로 몇 차례 걸었으나 받지 않았다.

사랑하는 우리 딸 1 번호로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 뒤에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안녕! 아저씨 아빠 후배 거든. 아빠 연락이 안 돼서."

"우리 아빠...... 아침에 돌아가셨어요."

"뭐라고? 돌아가시다니?"

"급성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데요."


은식이 오토바이를 타고 달렸다.

헬멧은 울음소리로 웅웅거렸고, 흘러내린 눈물은 내피를 적셨다.

집에 도착해 검은 옷으로 갈아입는 동안에도 울먹임은 멈추지 않았다.

장례식장에서도 절을 마치지 못하고, 바닥에 엎어져 울었다.

다들 울다 지쳐서였는지 울어 줄 사람이 아니었는지, 충혈된 사람도, 눈물 맺힌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은식의 눈물만 바닥에 떨어지고, 그의 울음만 공간을 찢고 있었다.


이틀이 지났다.

장지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은식은 참치, 호두, 사과, 녹차를 검색했다.

'심혈관 질환 예방'을 위한 음식들이었다.

은식이 토를 막는 시늉으로 입을 가렸다.

두 주먹을 쥐고, 어금니를 물었지만, 비음 섞인 그리움은 새어 나왔다.


닷새가 더 지났다.

힘겹게 걷던 여인은 편하게 걷고 있었다,

파란 스포츠카가 빗길에 미끄러져, 남자는 죽고 여자는 오른팔을 잃었다.

은식은 배달 중에 채형일을 마주쳐 돈을 받아냈고,

남자에게 빚진 돈을 그의 아내에게, 남자가 쓴 글을 그의 딸들에게 전해주었다.

은식이 남자의 딸들에게 말했다.


"너희 아버지 진짜 좋은 분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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