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히지 말고 읽어라
Episode 1
카지노에 손님을 유치하고 손님 게임 내용에 따라 커미션 받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카지노 에이전트라 부른다.
예를 들어 손님이 1,000원을 베팅해서 이겼을 때 1.5%, 15원을 커미션으로 받는 조건이라면 매판 베팅액이 커질수록 그들의 수입은 커진다.
일반적으로 손님 베팅액은 게임을 하면 할수록 자연스럽게 커지는데 에이전트가 원하는 크기로 발전하기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사람 나름
1. 흔히 말하는 '뚜껑 열리는 상황' 즉, 찬스라고 생각해 크게 베팅한 게임에서 간발의 차이로 지며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분노-베팅액 비례 원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베팅액을 키워가는 유형
2. 혈중 알코올 농도가 높아짐에 따라 감정이 증폭하고 그만큼 베팅액을 키워가는 유형
3. 같은 테이블에서 게임하는 사람들, 주위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을 의식하며 군중심리, 소영웅심에 빠져 베팅 액과 시드머니를 키워가는 유형
각자의 사연이 이 세 가지 유형 중 하나의 흐름과 만나 한계효용 체증, 총 손실 증가의 패배 스토리를 써 내려간다. 손님들의 자발적 노력, 도박의 이치에 의해 에이전트 수입은 자동으로 커지지만, 때로는 분기별, 월별 영업이익과 성장률에 불만인 자들도 있다.
자기 주도형 빠른 성장을 추구하려는 자들.
떨어지는 작은 열매를 그때그때 받아먹기보다 과실의 크기를 키워 대량 수확을 노리는 카지노 영농기술자라 하겠다.
그들은 주로 다음과 같은 수단을 동원했다.
1. 짧은 일정으로 온 손님이 요청한 서비스를 일부러 늦춰 조바심 내게 만들거나
2. 술을 권하거나
3. 손님이 게임하고 있는 테이블에 몰래 훼방꾼을 보내 미니멈 금액으로 계속 반대 베팅하게 해서 손님을 자극하거나
4. 예쁜 여자를 미리 섭외해 손님에게 소개함으로써 테이블 위에서 (의미 없는) 남성성을 보이게 유도하거나
방법 모두 그때마다 소기의 성과를 거두긴 했으나 문제가 따랐다.
1번과 2번의 사례는 '하자 잡힌다'하여 패배의 구실로 몰려 손님과 관계 연속성을 잃게 했으며
3번은 심어놓은 놈의 '오늘의 운세'에 따라 적자를 보는 경우도 발생(vip 구역에서는 미니멈도 작지 않은 금액, 계속 지면 타격이 크다.)
4번은 섭외한 여자가 각성 후 에이전트로 돌변, 손님을 꼬셔 다른 카지노에서 게임시키며 수익을 챙기는 '배반의 장미'로 진화.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황금알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에이전트들이 위의 방법들을 고전이라 여기며 써먹고 후회하기를 거듭하던 시기.
손님 성향을 읽고 자연스럽게 이용하는 나만의 비책으로 별다른 마찰 없이 큰 수익을 거머쥔다.
한국에서 자산가를 소개받은 날, 함께 술 마시고 대화를 주고받으며 손님의 성향을 파악하려 했다.
그래서 알게 된 사실,
안주가 하나둘씩 들어오고 그때마다 맛보며 술을 들이켜더니 안주가 술을 부르고, 술이 안주를 부르는 상황이 펼쳐진다.
온전한 정신에서는 종업원에게 십전 한 푼 건네기는커녕 말도 섞지 않던 냉혈한의 모습에서, 이내 얼근하게 취하며 혈중 알코올 농도에 비례한 팁을 만면의 미소와 함께 날리는 호구로 변신.
'성향 파악 끝'
필리핀에 도착한 첫날 자산가 답지 않은 작은 베팅으로 일관하는 손님.
몇 시간 동안 여유 있게 지켜봤다.
생긴 건 차갑고, 말과 행동은 군더더기 없이 경제적인 손님에게 조심스레 다가갈 기회를 엿보다가 슈가 끝나기 10여 분을 남기고 웨이트리스에게 땅콩을 주문한다.(슈는 전체 8목의 카드 52×8, 416장을 이용해 1분여 남짓한 각 게임 70여 판으로 이뤄지는 한 세트로 손님 성향에 따라 빠르게는 1시간, 늦으면 2시간 이상 걸리기도 한다.)
드디어 슈가 끝나 칩을 세고 어깨를 풀며 다음 슈를 준비하는 손님.
게임 중에는 여간해서 식사를 챙기지 않는 손님들의 일반적인 성향을 이용. 땅콩을 건네며 말한다.
"입 심심하실 텐데 간단하게 드시면서 하세요."
먹든 말든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무심하게 땅콩이 가득 담긴 그릇을 올려놓고, 돌아서서 자리에 앉는 동안 손님으로부터 감사하다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내 예상도 그랬다.
말 수 적고 냉정한 사람으로부터 내가 원하는 뭔가를 이끌어내고 싶을 때 장황한 말은 역효과를 부른다.
굳이 상대의 의식, 대화 진행을 깨며 필요한 것을 묻고 들으려 애쓰기보다 그가 원하는 것을 말하게 하는 분위기를 연출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 즉, 만나기 전 대화의 흐름에 따른 경우의 수 모두를 커버하는 대응 마련에 주력하고, 직접 대면에서는 짧게 핵심을 던진 후 상대의 질문이나 요구에 곧바로 응대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고 여겨왔다.
손님이 땅콩을 먹기 시작한다. 두 손가락으로 한 알씩 집어먹다가 사용하는 손가락의 수를 늘리더니 잠시 후 나를 부른다.
"저 맥주 좀......"
속으로는 '나이스!'를 외치지만 겉으로는 무표정하게 그저 고개 끄덕이며 '네!'하고 답한다.
한 병, 두 병 늘어남에 따라 사라져 가는 땅콩을 리필해 주니 땅콩을 먹으면 입이 텁텁하고, 이를 씻어내려 탄산 가득한 맥주를 마시면 다시 입이 심심해지는 땅-맥 순환이 이어진다.
안정기에 접어들어 한인마트에서 사서 미리 준비했던 안주들, 특히 마른오징어를 먼저 내놓는데,
턱관절에 힘을 주어 오징어를 씹는 작용이 뇌에 전달, 일반적으로 과감한 결정을 하고 이를 행할 때 어금니를 악무는 과정을 역으로 진행시켜 과감한 베팅을 유도한다.
오징어·땅콩·맥주, 환상의 콜라보에 취기가 오르고 베팅이 커지니 김자반, 쥐포 등의 마른안주일체와 과일을 대동한 여직원들을 계속 교대시키며 팁을 늘린다.
내 수입도 늘고 직원 복지도 향상.
Episode 2.
과거를 회상하며 실수를 반성했던 날들.
절망을 딛고 다시 일어서려 했던 나를 속이고 처절하게 무너뜨렸던 인물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지금의 깨달음으로 과거 그 양반의 성향을 해석했었더라면 손해를 모면할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다.
탄산음료와 봉지 과자 하나를 테이블 가운데에 두고 나눠 먹는 동안 그는 음료를 따를 때마다 병의 멱살을 우악스럽게 쥐고 흔들었다.
탄산을 사랑하고, 남의 탄산을 소중히 여기는 나에게는 있을 수 없는 악행.
그뿐만이 아니었다.
과자를 입에 넣고 나서 손에 묻은 과자 가루를 펼쳐진 과자 위에 비벼 터는 모습은 경악스럽기까지 했다.
함께 먹는 과자에 그 무슨 불손인가?
나이 많은 사람이고 돈 벌게 해주는 손님이기에 뭐라 할 수 없어 괴로웠던 순간.
한참 나이 어린 직원들에게도 존대하며 남을 예의로 대하는 호인 같았지만, 그는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었고 실제 남을 진심으로 배려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라면 남이 어떻게 되건 말건 신경 쓰지 않았던 이기주의자.
탄산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공공위생을 돌보지 않았던 탄산 말살 위생 파괴자.
주변 지인들을 망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내 돈도 왕창 떼어먹은 사기꾼.
유리한 입지의 관계 지속과 손실 회피를 위해 상대를 면밀히 관찰해 숨겨진 성향을 파악하는 작업을 반드시 선행해야 한다. 친절과 예의를 의식적으로 행하며 자신을 매력적으로 보이려는 사기꾼들에게 마저 이익을 거두고 싶다면 꼭 그래야 한다.
본인의 본성을 감춘 채 오랜 시간 연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에 반드시 노출되기 마련, 특히 사소한 일이나 하찮은 사물을 대상으로 무의식에 실수하기 쉽다. 그 작은 행위로부터 나에게 피해를 주거나 혹은 이익을 가져다주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러니 상대를 평가함에 있어 '그 정도쯤이야'의 관대함과 안이함은 버려야 한다. 특히 돈이 얽힌 관계에서는 더욱 냉정해야 한다.
'누구에게 당했다'라는 사건들과 가해자들의 평상시 언행을 여러 번 복기한 후 확고히 한 성찰론이고,
'누구를 통해 벌었다'라는 기억과 과정에서의 묘수를 수차례 분석한 이후 확립한 방법론이다.
중요한 선택은 본성에서 비롯하고 본성은 숨기지 못한 행위에 묻어난다.
그렇기에 의식의 치장이 벗겨진 그 부분 즉, 무의식·무성의에 의해 드러난 본성을 찾기 위한 주의 깊은 관찰은 필수적이다. 다만 억지로 들춰내려 해서는 안 된다. 군중에 섞여 자신을 드러내려 하되 생각은 감추려는 인간 본능으로부터의 방어기제가 거부감을 일으켜 밀어 내려 할 수 있으니.
요컨대 나를 낮춤으로써 상대가 날 편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앞서 말했지만 가면을 쓰고 오랜 시간 연기하기란 쉽지 않고 불편하다.
짝사랑하는 이성과 만나거나 높은 사람과 식사하고 헤어진 이후의 후련함이 어땠는지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하리라. 오래 사귀어 편해진 남녀가 방귀를 트고 치아에 낀 고춧가루를 서로 지적해 주는 사이로 발전한 이유는 바로 편안함.
남자들 사이에 형이라는 호칭에 무게를 실어 형님으로 부르려는 이유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여 부르며 날 편히 대하게 함으로써 상대와 친해지고 상대를 깊이 파악하며 나를 더 애착하게 하려는 의도 아닐까?
그 생각 때문인지 난 얻을 것 없는 내게 여전히 형님이라 부르는 동생들을 좋아하고, 사업을 목적으로 만난 이들이 형님으로 부르려는 것을 경계했다.
나이 어린 자들에게 큰돈 뜯기지 않은 이유였다.
사회생활 여러 관계에 있어 다양한 페르소나의 필요성이란 가면에 어울리는 연기를 펼치며 내 본성을 숨기고, 가면 뒤에 가려진 상대 본성을 찾으려는 노력의 필요에 대한 역설일 것이며, 가장 효과적인 캐릭터로 '선량하고 겸손한 시민'을 강력히 추천하는 바이다.
나와 내 주위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던 극적 반전의 주인공 모두 평소 선량하고 겸손한 행실로 덕망을 쌓았고, 편안한 이미지로 우리의 의심을 거둬냈으며 동시에 우리를 차례로 읽어 나갔다.
희생자가 늘어났음에도 그들을 향한 주위의 인식은 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희생자들이 죄인으로 몰리는 억울함이 반복됐다. 희생자의 본성을 파악해 이를 토대로 악인 화하고 주위 사람들의 본성에 맞게 사건을 재구성해 설명함으로써 본인에게 유리한 선악 구분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착하게 사는 것만으로는 착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의 반증.
착하게 살려는 마음보다 사람을 읽어 그 사람에게 착하게 보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얻어내야 한다.
기분 더럽지만 어쩔 수 없다.
세상이 그렇더라.
디테일하게 읽고, 디테일하게 꾸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