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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요네즈의 힘

중립

by Sir Lem

EPISODE


2001년, 선배와 보습학원을 열었다.

선배는 원장에 영어 선생, 나는 부원장에 고등부 수학선생.

초, 중, 고 각 과목을 담당하는 선생들을 뽑아 운영을 개시하며 단기에 많은 학생을 모집할 수 있었다.

젊은 나이, 남는 게 시간.

수업이 끝난 뒤 빈 강의실에서 혼자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무료 과외 선생이 되어 주고, 시험 기간에는 함께 밤을 새우는 등 밀착 관리해 주니 소문은 날로 퍼지며 더 많은 학생이 몰렸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학생이 내 수업에 참가하며 그날부터 반 분위기가 애매하게 흘렀다.

생긴 건 영락없는 만화 영심이의 월숙이.

잘 사는 동네, 잘 사는 부모 밑에서 모자람 없이 자란 우등생이었다.

수업 중 다른 학생이 질문하면 '그런 쉬운 것도 모르냐'라는 식의 조롱과 '끝나고 따로 질문해!'등의 핀잔으로 질문한 학생을 무안하게 하고, 다른 학생의 옷차림새를 지적하며 '이거 어디 거야? 지하상가? 하하하'라고 비웃던 아이.

어느새 그룹을 형성해 집단으로 약한 아이들에게 면박 주며 심지어 울리기까지 했다.

한창 탄력 받아 신규 학생이 몰리던 시기. 학생과의 작은 마찰에도 민감했던 터라 일단 추이를 지켜보기로 했지만 불안함은 가시지 않았다.

티 안 내고 자연스럽게 응징하려는 의도로 칠판에 어려운 문제를 내고, 나와서 풀어보라 한 뒤 틀리면 은근히 비꼬아 창피 주려 했지만, 막힘없이 써놓은 풀이 과정은 모범답안 그 자체.

성적의 우월감으로 기세가 커져가니 그 친구 보다 약간 뒤처진 학생을 용병 삼아 따로 숙제 내주고, 별도의 과외도 하는 등 전투력을 키워 물리치게 하려 했지만, 결코 차이를 극복할 수 없었다.

날이 갈수록 월숙이는 기고만장해지고, 죄 없는 학생들에게 언어폭력을 가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급기야 선생들을 상대로 하는 공격도 서슴지 않았다.

차가운 말투, 냉정한 눈빛으로 비아냥거리는 교만.

반격을 모색하지만, 공부면 공부 시사 면 시사 도무지 모르는 것 없는 다방면의 능력자였다.

나날이 주눅 들어가는 학생과 선생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귀를 쫑긋 세워 감시하며 꼬투리를 잡아 족치기로 했다.


며칠 뒤,

어디 불편한 곳이 있는지 한 학생이 '아! 아!' 하며 고통을 호소하고, 이에 짜증 내는 월숙이.


"자꾸 신경 쓰이게 왜 그래?"

"머리가 너무 아파서"

"참나!"


황당하다는 듯 째려보며,


"야! 머리 아프면 두통제 먹어. 왜 자꾸 시끄럽게 방해해!"


드디어 딱 걸렸다.

이때다 싶어 달려들며,


"푸하하하! 두통제래 두통제. 얘들아! 두통약도 아니고 진통제도 아니고 두통제래 하하하!"


너무 통쾌했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의 극치지만 뭐 하나 건지기 쉽지 않았던 막막하고 절박한 상황에서 우연히 눈에 띈 작은 희망의 씨앗.

몇 명이나 들었는지 좌우를 살피고, 승리감에 도취해 패배자의 울분을 조롱하려 고개를 돌렸는데 얼굴 빨개지며 당황스러워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헛웃음과 함께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월숙이.

밖으로 나가 다른 선생들에게도 알렸다.


"선생님들! 월숙이가 두통제래요 두통제. 푸하하하"


의기양양으로 어깨에 힘주고 외치는데 다들 반응이 시원치 않다.

한심하다는 표정을 보이는 선생까지.

서러웠다 그리고 불길했다.

원 펀치 쓰리 강냉이 급은 아니어도 나름 적당한 대미지는 입힐 수 있을 거라 확신했고, 다들 월숙이의 만행을 못마땅히 여겨 통쾌해할 줄 알았건만 이토록 썰렁한 반응이라니.

뻘쭘해져서 급히 자리에 앉았다.

아군들 표정만으로도 파괴력 있는 정밀타격이 아니었음은 짐작 가능했다.

불안감이 엄습하더니 갑자기 머리가......


'두통제, 아니 두통약이 시급하다.'


멀리서 조심스럽게 월숙이의 동태를 살피는데 아무런 동요도 없어 보였다.

정녕 실패라면 어설픈 공격에 적개심만 드러낸 꼴.

가만 보니 왠지 월숙이의 등짝이 평소 보다 커 보였다.


'분노감에 벌크업이 된 걸까?'


조만간 역풍이 불어닥칠게 분명했다.

말 수를 줄이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며 작은 흠도 잡히지 않으려 조심 또 조심.

그나마 학생 몇몇이 내게 와서 주먹을 불끈 쥐고 '선생님 잘하셨어요'라고 속삭여 주니 급히 식어가던 전투의지는 다시금 불타 올랐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수업 시작을 20여 분 가량 남기고 월숙이가 두 손에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왔다.

선생들과 학생들을 빈 강의실로 불러 모았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넓은 공간에 초라하게 나만 남은 상황.

밝은 기운의 웅성거림이 거슬리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가까스로 인내했다.

곧이어 월숙이에게 불려 갔던 두 여선생이 자리로 돌아오며,


"너무 맛있죠?"

"그러게요. 진짜 맛있네요"


얼마 전까지 얄밉다며, 심지어 재수 없다며 공격 정당성의 여론 몰이를 일삼던 자들이었다.

친일파 앞잡이 같은 친월파 앞잡이들.


"부원장님은 안 드세요?"


쏘아붙이고 싶었다.


'먹긴 뭘 먹어, 부르지도 않았는데. 거지도 아니고. 당신들 그러는 거 아니야.'


머릿속을 맴도는 그 말은 차마 못 하고, 아무튼 적의 전략은 파악해야 하니 별 관심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저거 뭐예요?"

"마요네즈 떡볶이요. 떡볶이 위에 마요네즈 뿌린 건데 너무 맛있어요."

"맛있어 봤자 떡볶이에 마요네즈 지 뭐"

"아니에요. 정말 맛있어요."


7, 80년대 선거철에 나돌던 돈 봉투도 아니고, 선진시민의식 없는 못 배운 양반들도 아니건만 고작 마요네즈 떡볶이에 정의를 팔다니.

다행히 뒤늦게 온 반월숙이파 학생들은 신념을 지키는 듬직함.

잠시 후 먹고 나온 학생 하나가 내게 와서 묻는다.


"선생님은 안 드세요? 너무 맛있어요!"


월숙이 들으라는 듯 크게


"응, 나 떡볶이 안 좋아해! 마요네즈 별로야!"


왠지 모를 씁쓸함과 함께 수업하러 들어가려는데,


'아!'


뒤늦게 깨닫는다.

그들이 마요네즈 떡볶이로 아수라장을 만든 그곳이 바로 내 다음 수업 강의실.

사 온 놈은 하나지만 먹은 놈은 다수. 몇 명 지목해 치우게 한다면 안 그래도 불리한 처지에서 민심마저 잃게 될 위기.


'내가 치워야 한다.'


청소도구를 들고 강의실로 가니 그야말로 떡볶이 아비규환의 현장.

특히 월숙이 주변이 더 심각해 보였다.

의도였으리라.

월숙이 자리 부근 바닥에 쓰러진 떡볶이 시체를 쓸어 담으려 허리 숙이는 내 모양이 처량하다.

이 역시 의도였으리라.

거만하게 앉아 있는 학생과 그 앞에 허리 숙인 선생.

사용자와 교육서비스 제공자 간의 갑을 관계를 명확히 인식시키려는 의도였음이 틀림없다.

제대로 당했다.

그 후로 나 역시 맛있는 음식을 사 돌리며 표심을 다지려 했지만 한 번 빼앗긴 민심을 되찾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월숙이를 따라나서는 새로운 학생들이 늘고, 마약을 탄 건지 어쩐 건지 마요네즈 떡볶이 중독에 헤어나지 못하는 환자들의 빠른 증가 추세에 위기감은 커져만 갔다.


'고작 떡볶이 위에 마요네즈를 뿌린 게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길래'


상대 전술과 병법 파악을 위해 중등부 학생에게 가게 위치를 상세히 물어 나중에 혼자 몰래 가봤다.

좌우를 살펴 교복 입은 아이들이 없는 틈을 타 잽싸게 들어가 메뉴를 훑으니,


'있다. 마요네즈 떡볶이'


누가 들을 세라 주인아주머니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주문했다.


"마요네즈 떡볶이요"


이에 큰 소리로 되묻는 아주머니,


"몇 인분이요?"


'아니. 이 아줌마가......'


월숙이파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되는 초조한 상황. 굳이 좁은 가게에서 큰 목소리 내는 아주머니를 향한 불만에 인상 쓴 얼굴로 검지를 세워 1인분임을 알렸다.

잠시 후 그 요물이 나오고,


'참나 이게 뭐라고.'


말 그대로 떡볶이 위에 떨렁 마요네즈 뿌린 생김새. 하나 집어 적당히 섞은 뒤 입에 넣었다.


'헉! 맛있다.'


그간 내가 학생들에게 사준 음식들을 떠올려 비교해 보지만 월등한 우위의 마요네즈 떡볶이.

새로운 아이템 개발이 시급했다.

월숙이 역시 동일 전략의 오랜 사용에서 오는 진부함을 경계했는지 새로운 아이템을 찾아 뿌리며 세를 공고히 했다.

양측의 치열한 물량 전과 별개로 나는 반월숙이파 그리고 중도층 성적 향상을 위해 정성을 쏟아부었다.

월숙이의 조직적 네거티브 전략에 가끔 흔들리기도 했지만, 코어 지지층의 적극적 지원에 힘입어 실력이 부족한 중도층 학생들의 동기를 자극하고, 그들의 성적이 향상한 성과를 제시하며 더욱 견고한 지지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이는 시험기간을 앞두고 주말에 나와 공부하는 학생들의 자리 분포만 봐도 여실했다.

월숙이파 5명은 A 강의실, 반월숙이파 6명은 B 강의실.

중도층 3명이 고민이긴 했지만 시험 기간에는 내 편이 될 수밖에 없으니 과반은 넉넉히 확보한 상태.

그렇게 나는 대세의 주인공으로 자리를 굳혔다.

팽팽한 긴장의 연속이었던 날들은 가고, 다수의 지지를 받는 학원 민주주의 지도자가 되어 한결 여유롭게 수업을 진행하니 툭툭 던지는 농담에 학생들의 리액션도 빵빵 터졌다.

시험기간이 끝난 다음날 해방감에 들뜬 기분이라 그런지 반응은 더욱 컸다.

웃지 않는 건 월숙이 뿐.

당연히 여길 일이었지만 그날따라 왠지 더 무거운 표정이었다.

잠시 후 칠판에 문제 하나 내고 모두에게 풀게 하는데 조용히 손드는 월숙이.

다가가서 고갯짓으로 물으니 입모양으로 답한다.


"화장실이요"


승자의 관대함으로 고개 끄덕여 승낙했다.

우리가 또 페어플레이 정신 하나만큼은 투철하니까.


금세 돌아오지 않고 꽤 걸리는 걸로 봐서 큰 게 확실했다.

환히 밝아진 표정, 깃털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온 모습이 여지없었다.

이제 막 시험 끝낸 아이들의 중구난방 산만함에 조화라도 이루게 하려고 개그를 시리즈로 날리니 연이어 터지는 웃음.

툭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듯한 예비 상태에서 또 한 번 날리니 여지없이 터지는데 누가 신호라도 보낸 양 갑자기 웃음이 끊기고......

그 순간 적막을 깨는 소리,


"뿡!"


타이밍 어긋난 방귀.

1초의 정적 뒤 또 한 번 아이들이 나자빠진다.

누가 범인인지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모두들 숨넘어가는 포복절도의 난장판.

나 역시 크게 웃었지만 뜬금없는 정적 이후의 방귀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 내 두 눈으로 난 똑똑히 봤다.

다들 몸을 가둘 수 없을 만큼 폭소가 터지는 빅뱅 초기의 순간, 월숙이 표정은 굳어 있었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뒤늦게 혼신의 연기를 펼치지만 내 눈은 속일 수 없었다.

'뽕'도 아니고 '뿡'이었다.

큰 것을 배설하고 와서의 해방감 그리고 공허감.

뿡은 대개 그 해방·공허감 이후 터진다.

자, 정리해 보자.


1, 화장실 다녀온 자

2. 소리 난 방향

3. 상기된 얼굴에 어색한 표정


굳이 그 근처로 가서 냄새까지 맡으며 공기역학적으로 분석할 필요도 없었다.

모든 정황 증거는 월숙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난리의 와중에도 서로 범인을 지목하는 학생들.

당연히 월숙이도 용의 선상에 올랐다.


'후훗!'


학생 자경단의 자발적이고 비과학적인 수사가 이뤄지는 가운데 한 아이가 내게 묻는다.


"선생님은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차마 내 입으로 이름을 밝히기는 뭐 하고, 대신 수사망을 좁혀 주기 위해 범인의 행방을 증언했다.


"내가 확실히 들었는데 저쪽에서 소리 났어. 나는 여기 맨 앞 한가운데서 들었으니까 방향은 더 정확하지."


그 순간 범인과 눈이 마주쳤다.

역시 살벌한 내면 연기.

누군가 결기 있게 나서 큰 목소리로 저 범인을 지목하고 논고를 거쳐 그토록 갈망하던 왕건이 하나 잡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다.

하필 월숙이 부근 끄트머리에 앉아 있던 반대파 학생도 용의자 리스트에 이름이 오르니 어느새 월숙이파, 반월숙이파의 대립 양상으로 치달았다.

이 천금 같은 기회를 살려 대업을 달성해야 하건만 언어영역 점수가 우수한 월숙이파 변호인이 화려한 변론으로 수적 열세를 극복, 이 분위기로 흐른다면 자칫 흐지부지 넘어갈 수도 있는 절체절명 순간에 어디선가 작지만 아름다운 희망의 소리가 들려온다.


"투표해요"


평소 월숙이파에게 놀림당하던 작고 왜소한 친구 영심이(가명).

영심이 역시 억울하게 용의자로 몰린 처지였음에 투표로서 누명을 벗고자 했다.

반드시 투표가 이뤄져야 한다는 간절함을 눈에 담아 학생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무슨 자신감인지 월숙이파도 찬성, 전원이 투표에 동의했다.

나를 포함한 전체 유권자 15명의 투표용지를 만들어 뒤로 전달시키는데 갑자기 월숙이가 딴죽을 건다.


"선생님은 빠지셔야죠."


어이가 없었다. 방귀 투표에 학생, 선생 구분은 또 뭔가. 피해를 본 무고한 시민으로서 내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고 싶은 맘 간절하건만.

하긴 뭐. 굳이 내 한 표가 아니더라도 결과에 지장 없었다.

월숙이 지지자 5명, 영심이 지지자 6명 그리고 좌파, 우파 경계 마냥 가운데 분포해 있던 중도층 3명.

고막에 별다른 질환 없는 정상인 척력이라면 좌우가 명확히 구분될 '뿡'이었으니 5 : 9로 예상하는 영심이의 승리 그리고 정의의 승리였다.

강의실을 비우고 초등부 여선생을 선관위 의원으로 위촉해 투표를 진행했다.

사건 현장이 곧 투표소로 바뀌는 진풍경.

한 명씩 강의실로 들어가 투표하고 나가는 무기명 비밀 투표 방식이었다.

유권자들의 눈이 투표소로 쏠리는 사이 난 월숙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오늘이 그날이다. 정의의 심판을 받아라!'


투표를 완료하고 드디어 개표 개시.

초등부 선생이 하나씩 개표해서 호명하고, 내가 획을 그어 바를 정(正) 자를 그렸다.


"월숙이"

"월숙이"

"월숙이"


순조로운 진행, 이쯤이면 당선 유력.


"영심이"

"영심이"

"월숙이"

"월숙이"


이제 당선 확실.


"영심이"

"영심이"

"영심이"

"월숙이"


월 6 : 영 5

영심이 5표는 이미 예견했던 바. 이제 승리의 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흘러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는데,


"영심이"


'어! 뭐지?'


"영심이"


"영심이"


6 : 8,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영심이 당선.


뀌지도 않은 방귀 살포자로 당선돼 울고 있는 영심이를 위로하는, 나라 잃은 분위기 영심이 진영. 반대편 월숙이 진영은 축제 한마당.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요, 정의를 갈망하는 집단 지성의 힘은 투표에서 나온다고 믿었건만 시민들은 깨어있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정의는 죽었다.

납득할 수 없는 결과.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바를 정자가 아닌 빗살 무늬로 했어야 했나?'


학생상담하겠다고 한 명씩 데리고 나가 누구 찍었는지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러 차례 경험한 대통령선거, 국회의원 선거에서 내가 바라던 후보가 낙선했어도 이렇게 슬프고, 분하고, 억울했던 적은 없었다.

침통하고 원통한 기분에 일찌감치 접고 퇴근하려는데 여전히 남아 있는 아이들.

새로운 계략을 모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살짝 들여다보는데,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명.

월숙이파 5명에 중도층 3명이었다.


'도대체 무슨 영문이지?'


퇴근길 그리고 주말 내내 울고 있던 영심이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 먹먹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힘겹게 출근한 월요일. 영심이파 한 아이가 우울한 표정으로 내게 왔다.

빗나간 적 없는 쓸쓸한 예감이 휘몰아친다.


"선생님!"

"응?"

"영심이 학원 그만둔데요."


이유를 물을 필요 없었다. 그저 참담할 뿐.

게다가 충격적인 사실도 이어졌다.


"그리고 알아봤더니 걔네 8명 일요일에 다 같이 에버랜드 갔데요. 월숙이 엄마 차, 아빠 차로 다 같이요. 지난주에 이미 다 계획했었다는데요."


'이런 미친'


어쩐지 투표하자고 할 때 월숙이파는 자신만만했다.

마요네즈 떡볶이 이후 양측에서 벌인 물량공세 그 어느 아이템 보다 강력한 한 방, 에버랜드.

그 한 방으로 중도층 표심을 잡고, 무고한 시민에게 누명을 씌운 월숙이.

명문대 나온 재력가 부모의 우등생 딸은 자신이 가진 조건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쉽게 이루는 처세를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그 방법이 역겹기는 하나 치밀한 계획을 통한 조직 장악력만큼은 높게 평가할 만했다.

실로 은밀하고 철저했다.

얼마 후 월숙이파와 중도층은 에버랜드 연대감에 하나 되어 다른 학원으로 옮기고, 끝까지 의리를 지킨 영심이파 4명과 나는 매일 영심이를 그리워하며 적적한 소그룹 수업을 이어나갔다.




에버랜드에 신념을 팔아넘긴 3명의 중도층.

쓸데없는 정의감에 수차례 어마어마한 금전적 손실과 마음의 상처를 입은 나는 이제 그들을 옳게 여긴다.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


"내 일에 연관된 사람은 선, 악이 아닌 호, 불호로 나누고 드러내지 않은 채 중립으로 살아라."


재산, 인맥뿐만 아니라 재기의 기반마저 송두리째 날리고, 누군가에게 여전히 농락당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과거의 쓸데없는 정의감 때문이었다.

비단 내 일에 연관된 이들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과 연관된 이들에 대한 선악 구분에도 부지런했다.

법으로 따질 수 없는 일들의 잘잘못을 구분해 당사자가 정해지면 잘못한 이를 찾아가 따지고, 피해 본 사람을 위로했으며, 잘한 이를 칭송했다.

판단을 내리기 위한 지식이 부족할 때면 충분히 채우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빠르게 채운 지식으로 분별이 명확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악을 행한 자들과 맞서는 신중함과 공정함을 갖추려던 나 자신이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그런 일들이 내겐 중요했다.

지금 생각하면 일말의 가치 없는 헛짓거리.

그 헛짓거리에 난 너무도 많은 돈, 시간, 관계를 허비했다.

그리고 결국 관계가 틀어진 동업자를 포함한 몇몇에 의해 여러 차례 선악의 심판대에 끌려가는 신세가 됐고, 그때마다 악인으로 낙인찍혔으며, 그로 인해 나로부터 뻗어가고, 남으로부터 내게 연결되었던 모든 흐름의 맥을 차례로 잃었다.


법의 테두리 바깥에서 끊임없이 생겨나고, 해결되고, 잊히고, 소멸되는 사람 간의 대립, 마찰, 갈등, 충돌.

나락으로 추락한 그 순간에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라는 어느 경제학자의 이론을 억지로 끌어와 자위하던 내 인생 한 시절 위선자.

자승자박으로 정신의 교도소에 갇힌 체 긴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고쳐 새겼다.


"내가 선악을 구분하는 대상은 나 자신뿐. 남에 대해서는 호·불호를 느끼는 것에 그쳐야 한다."


법적인 문제를 초월하지 않는 한계 안의 대인 관계에 있어 나만의 관리법 1조로 그 정도가 적절했다.

이를 심화하고 구체화하니,

상대와 나 서로가 악감정을 갖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는 게 최선이요, 설령 상대의 오해 또는 이유 없는 불신을 사거나 모략·업신여김을 당할지라도 상대를 악으로 여기지 않고, 불편 부당의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을 찾는 일에 몰두·매진하려는 자세가 가장 평화롭고 안정적인 대책이라는 결론.

아니꼽고 억울하고 분하기에 맞서 싸워야 할 일이 아니라 해결해야 할 과제로 여기는 자세.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소비해야 할 감정과 시간, 결과를 따지자면 모든 면에 있어 효율적이고 긍정적이다.

그렇게 일로만 따지자면 밑져야 본전인 셈.

최소한 더 큰 증오를 일으키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직장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관계 악화로 말미암아 능력이 가려지고, 인격이 손상되는 불이익을 겪는 이들을 수없이 지켜봤다. 괴로워하며 우는 이들도 많았고, 나처럼 모든 것을 잃고 급기야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선악의 이분법적 판단으로 어느 한 편에 서서 긴 소모전 치르며 상처를 키우지 말자.

사회생활에서는 그렇게 사는 게 옳다.

상대 진영에 패한 억울함을 치유하기도 벅찬 마당에 나를 지지할 거라 믿었던 중립지대 사람들에게 얻은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을뿐더러 새로운 관계 형성의 자신감마저 위축시키기 마련,

누구를 믿어야 할지 애매해지고 급기야 주변인 모두를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는 사람도 여럿 봤다.

이윤 추구를 위한 사회생활이건 살육이 벌어지는 전쟁에서건 일단 피아가 구분 지어지면 내 편을 향한 전우애와 함께 상대에 대한 적개심은 굳건해진다.

세력을 키워 상대를 압도하기 위해 중도층을 포섭하려는 노력이 양측에서 이뤄지니, 받아먹을 건 받아먹고 포기할 건 포기하며 그때그때 정세를 살피는 눈치 전략으로 손실 없이 이익 보는 자들이 바로 중립지대 사람들이다.

교집합에 속해 양쪽에서 이윤을 추구하고, 애매하다 싶으면 여집합에 몸담으며, 대세가 뚜렷해지면 차집합에 섞여 전리품 콩고물이라도 얻으려는 그들.

잘못된 결정으로 패배 그룹에 속하는 처지에 놓이더라도 한때의 눈먼 실수라며 핑계 대기도 좋은 입지 아니겠는가?

강인한 투쟁정신없이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소심하고 나약한 모습으로 비쳤기에 당시의 심신 미약을 주장하며 감경사유를 마련할 수 있다.

직장 생활에서는 더욱 뚜렷하다.

경쟁과 싸움을 통해 어느 일방이 처참히 무너져 재기할 수 없는 환경이 아닌 이상 한 영역에서 오래 마주하며 전체의 정해진 이익에서 별 차이 없이 분배받는 자들 간의 대립이라면 더욱 어느 한 편에 속해 있을 필요 없다.

소신이 아예 없거나 숨길 줄 알고, 정의감 따위는 키우지 않는 자들의 low risk, good return.

탁월한 능력이나 충분한 시드로 대세의 흐름을 좌우하는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언제나 다양한 옵션을 누릴 수 있는 중립자로 살아야 한다.

자연의 섭리가 이를 증명한다.

찬반을 거듭하는 양측을 원자 내의 전자와 양성자라 가정할 때, 어느 때는 찬성 또 어느 때는 반대의 위치를 번갈아 싸우는 시스템 안에서 전세(戰勢)와 상관없이 중성자는 늘 그 자리를 유지한다.

반면 전세에 따라 자칫 전자의 입장에 놓이면 외부 힘에 의해 바쁘게 움직여야 하거나 심지어 떨어져 나가는 신세가 된다.

바빠진다는 건 소모를 의미. 같은 월급 받는 처지에 굳이 헛된 일에 에너지 낭비해선 안 된다.

즉, 그룹 대 그룹의 대결 양상에서 뜻은 품되 전세가 뚜렷해지기 전까지 경계선 위를 밟고 있는 처신으로 일관해야 한다.

쓸데없는 도덕적 정의에 사로잡혀 서로에게 창피를 주거나 주위에 상대 진영을 욕보이기 위한 전략 회의에 드는 시간과 비용 그리고 지루한 싸움으로부터의 스트레스 따위는 성장에 도움 될 리 만무하다.

차라리 그 시간에 영화 한 편 보는 게 더 이익이리라.

핵폭발을 위한 연쇄반응에는 중성자 역할이 핵심이다.

엄청난 폭발력을 만들어내는 중립의 힘, 중성자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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