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과 타락의 평행 이론
Episode 1. 正(정)
필리핀 마닐라 내에 말라떼(Malate)로 불리는 유흥 중심가이자 한인 밀집 지역이 있다.
이곳의 몇몇 고깃집은 특이한 입소문 과정에 의해 여러 국적 손님들 사이에 더 큰 인기를 누렸다.
JTV라 불리는 일본식 가라오케 주점에서 일하는 필리핀 여성들은 영업시간이 끝나는 새벽 3시 이후 고객 관리 차원으로 한국 손님과 외부 식당에서 만나 식사했고, 그들이 주로 가는 식당은 고기나 막창을 전문으로 하는 구잇집들이었다. 그곳에서 K-food에 매료된 여성들은 그 맛을 잊지 못해 친구·가족 그리고 중국·일본에서 온 외국 손님들과 다시 방문해 자발적으로 K-food를 알리는 전도사로 활약했으며 그들의 친구·가족, 타 국가 손님들 역시 주위에 경험하지 않은 지인들을 상대로 온, 오프라인 바이럴 마케팅을 활발히 펼침에 따라 다양한 국적비의 인기 있는 식당으로 명성을 드높일 수 있었다.
여러 메뉴 중 필리핀 현지인들에게 단연 인기 있는 메뉴는 삼겹살이었다.
크고 작은 양돈 농가가 많아 돼지고기 값이 상대적으로 낮은 필리핀에도 삼겹살 부위를 뜻하는 리엠포(Liempo) 요리가 있긴 하지만 양념 없이 굽는 조리법이나 함께 곁들여 먹는 반찬과 양념이 달라 재료의 친숙함에 더해 구성의 다채로움으로 유혹하는 삼겹살에 많은 이들이 열광했다.
친구와 저녁 먹고 왔다는 필리핀 여인과 키스할 때 소주, 쌈장, 마늘 냄새를 맡으며 K-food의 위력을 실감했다는 후배의 말과 식당 앞에 대기하던 현지인들의 긴 줄이 당시 인기를 대변했다.
조류에 편승해 여러 삼겹살 체인점이 각지에 들어섰고, 같은 무제한 서비스로 경쟁하려는 한국·필리핀 식당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지만 선점한 대형 프랜차이즈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규모로 출발한 무제한 삼겹살 식당이 가맹점을 하나둘씩 늘리더니 금세 기존 대형업체를 견제했고, 기세를 이어 필리핀 최고 삼겹살 왕좌를 거머쥐었다.
과거 함께 일했던 직원의 친구와 그의 형이 운영하는 업체로, 내가 한국에 있던 몇 년 새 어떻게 그리 크게 성장할 수 있었는지 너무 궁금했다.
마침 직원이었던 녀석이 친구 형의 부탁으로 아르바이트할 겸 손이 부족한 매장 매니저를 맡았고, 며칠 뒤 그날 소진하지 않으면 폐기해야 한다는 반찬을 내게 전해주러 왔길래 물었다.
"양념 치지 말고 담백하게 그 친구들 어떻게 그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는지 처음부터 자세히 얘기해 봐."
"사장님! 그 형제 진짜 대단합니다. 운이 아니에요."
그들은 대단했고, 다분히 운에 기댄 것도 아니었다.
동생이 전 재산을 털어 150제곱미터 규모 식당으로 처음 출발한 형제는 탄탄한 운영 유지를 기본으로 메뉴와 반찬을 늘리고, 더 좋은 재료를 더 싸게 파는 판매자를 물색하며 늘어나는 가맹점에 균일한 자재 공급을 위해 대량 납품 체계를 서둘러 갖추는 등 새롭게 추가하는 모든 업무에 열정을 다했다.
마치 탬버린, 캐스터네츠, 트라이앵글, 멜로디언으로 꾸린 작은 음악대의 단조로운 음색으로 청중 몇의 흥을 돋우는 것에서 시작, 음이탈 없이 악기와 화음을 하나씩 늘려 마침내 풍요롭고 웅장한 교향곡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우뚝 선 인생 스토리라고나 할까?
위기와 시련도 있었지만, 때마다 굳건히 헤쳐나갔다.
그 전체의 흐름은 마치 불협화음에 의해 우울한 단조 분위기로 흐르면 다시 장조로 돌려 밝게 만들고, 그 안에서 높낮이를 달리하며 꾸준히 리듬을 이어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래. 내가 잘 될 때도, 주변 지인들이 잘 될 때도 그랬던 것 같아. 작게나마 내 힘으로 밀도 있게 만들고 그 상태 유지하면서 조금씩 새로운 일들 더해가면 분위기가 생기는 것 같더라고. 그 분위기 타고 계속 좋은 방향으로 흐르다 보면 커지는 거지."
나도 그랬고, 프랜차이즈 수십 개 운영하는 친척 동생도 그렇고, 처남도 그렇고, 주변 많은 지인들이 그랬다.
자기 힘으로 단단하게 만든 작은 하나를 정박의 리듬으로 유지하며 새로운 것을 얹으려 했고, 크고 작은 성장에 행복을 향유했으며 깊은 뿌리와 줄기의 안정감으로 위기와 시련의 비바람을 이겨내 이윽고 꽃이 만개하는 큰 나무를 키워 냈다.
성공한 위인들의 인생사 역시 그런 희비애환이 담겨 있었다.
(얼마 전, 형제가 필리핀 유수의 편의점 프랜차이즈 본사와 손잡고 출시한 도시락 세트는 현재 필리핀 전역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Episode 2. 反(반)
사무실로 향하는 길. 밖으로 새 나오는 소리가 이리도 큰 걸 보니 무슨 큰 사건이 벌어진 모양이다.
불길한 예감.
어디나 그렇겠지만 특히 카지노에서는 사태를 수습하는 단계에서 작게라도 연관된 자들을 찾아 전체 혹은 부분의 책임을 나눠 물으려는 수사·감사활동을 혹독하게 진행하고, 용의자를 찾지 못하면 조사 범위를 넓혀 저 멀리서 사건 현장 방향으로 날갯짓하던 나비를 보상의 당사자로 지명하는 경우가 허다하니 웬만하면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고성이 오가는 작은 공간은 함께 일하던 스티븐과 내 또래 건장한 남자, 말끔하게 차려입은 여성, 필리핀 여직원들로 빽빽이 차 있었다.
조화와 순서라고는 찾기 힘든 혼돈의 대화 현장에서 파편을 맞춰 간신히 스토리 완성. 여성의 명백한 그리고 황당한 범죄였다.
사연인 즉, 초면인 남녀가 한 테이블에서 게임하며 대화 나누다 친해졌고, 여자가 돈을 다 잃자 남자는 함께 재산을 걸고 싸운다는 전우애에 불타 10만 페소를 선뜻 빌려줬다. 빌린 놈이나 빌려준 놈이나 둘 다 한심한 노릇.
도박한다는 사실 자체부터 한심하지만, 언제 봤다고 그리고 뭘 믿고 서로 돈거래를 하는지 그야말로 한심의 연속이었다.
어쨌든 둘 다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이 화장실 간다며 빌린 칩, 이긴 칩 전부를 가지고 사라졌고, 뒤늦게 눈치챈 남성이 그녀를 잡기 위해 관계자에게 CCTV 확인을 요청하지만 어이없게 카지노 측은 그녀의 행방 추적에 실패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출구 진입로를 지키고 있던 시큐러티 가드에게 물어보지만 그도 모르긴 매한가지.
분홍색 세미 정장, 유난히 하얀 피부의 충분히 눈에 띌 만한 한국 여성은 그렇게 증발해 버렸다.
당시 10만 페소면 270만 원. 금액도 금액이지만 떨쳐지지 않을 찝찝한 기분으로 게임하면 잃을 게 뻔할 것이라 체념했는지 남자는 진입로 앞에 그대로 서서 몇 시간을 두리번거리며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나열된 테이블 끝, 파티션으로 벽을 두른 뒤쪽 공간이 의심스러웠고, 내부로 들어가 종류별 물품 보관을 위해 구분된 여러 공간을 차례로 뒤지다 컴퓨터 책상 밑 박스 속에 숨어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녀가 사라지고 6시간 만의 일이다.
칩을 다 들고 이동한 걸로 봐서 이미 테이블을 벗어나기 전부터 계획한 일이었다.
VIP 구역에서 화장실 때문에 칩 들고 이동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
화장실에서 나와 잠시 눈치 보다 그 공간으로 들어간 것 같긴 한데, 위치로 봐서는 파티션 방향보다 출구 방향이 남자의 시선을 피해 도망가는데 훨씬 유리하건만 왜 바보같이 그곳을 택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남자도 그렇다. 카지노에서 모르는 여자한테 돈 빌려준다?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거기까지는 종종 있는 일이니 그렇다 치고, 돈 빌린 여자가 칩 다 들고 화장실 가는 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게다가 본인의 가시권 영역을 거쳐 파티션 안쪽으로 들어갈 때까지 게임에 정신 팔려 못 보다니, 실로 바보들의 합창이 아닐 수 없었다.
"칩 어딨어요? 빨리 돈 갚아요"
"없어요. 다 잃었어요"
믿어 줄 이 있을 리 만무한 거짓말. 남자가 그녀의 가방을 뒤졌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칩은 발견되지 않았다.
변기에 버리지는 않았을 테고, 그렇다고 게임으로 잃었다는 건 그 사이 직원들이 커미션 한 푼이라도 놓칠세라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을 테니 불가능.
다들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 필리핀 여직원 둘이 나와 스티븐만 들으라는 양 따갈로그로,
"몸 안에 숨기지 않았을까?"
"맞아, 조금 이상해"
대충 흘깃해도 가슴 부분 굴곡이 일정치 않은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두 여직원에게 여자 가드를 대동해 그녀를 데리고 화장실로 가 몸수색하라 지시하고 입구를 지켰다.
잠시 후 울면서 나오는 여자와 휴지에 뭔가를 감싸 쥔 직원들.
사건의 전말이 밝혀졌다.
화장실로 간 여자는 위아래 속옷 안에 가로세로 6cm가량의 정사각형, 지름 5cm가량의 원형 칩, 합쳐서 18개를 숨기고 나온 뒤 남자의 시선을 피해 몸을 숨기려다 보니 파티션 방향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고, 박스 안에서 6시간 동안 노심초사하며 숨어있었다는 것.
황당한 사건이 자주 벌어지고 그럴 때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넘어가는 곳이기에 피해 입힌 만큼 갚고 조용히 마무리됐으면 했지만, 화가 풀리지 않은 남자는 경찰을 불러 달라 소란을 피웠고, 그녀는 결국 경찰에 이끌려 유치장에 갇혀야 했다.
씁쓸함에 사라지지 않는 두 가지 상념.
'저 여자는 어쩌다 저 지경이 됐을까?"
'자신에게 엄격하지 못한 놈이 남에게 엄격하려는 꼴이라니'
Episode 3. 合(합)
긴 머리에 단아한 얼굴 그리고 하늘색 원피스, 내가 기억하는 한 여인.
며칠째 오랜 시간 남들 게임 구경, 휴게실에 앉아 있기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직원에게 물으니 에이전트에게 버려졌다고 하는 걸 봐서는 돈이 다 떨어져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인 듯했다.
이런 부류들이 종종 있다. '기왕 온 김에'라는 말을 거듭하며 현지에서 혹은 한국에 전화해서 어떻게 해서든 돈 빌려 게임하려는 목적.
엊그제 함께 게임했던 손님들에 섞여 식사한 이후로 계속 저러고 있는 것이 보나 마나 끼니도 못 챙기는 처지임이 여실했다.
사정은 딱해 보였지만 괜히 이상한 의도로 접근하는 남자로 의심받기 싫어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다 종전과 다르게 심히 어두운 안색이 우려돼 조심스레 말 붙였다.
"저희 필리핀 여직원 두 명 한국 식당에서 밥 시켜주려고 하는데 메뉴 세 개 시킬 거라서 밥이 남거든요. 애들하고 같이 드세요. 불편하시면 따로 나눠 드리라고 할게요."
평소 인상 더러운 놈이 사력을 다해 선량한 표정 지어 말하고, 답을 하건 말건 돌아섰다.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
"아..... 네. 감사합니다."
카지노 출입하는 여느 억센 여성들과는 다른 인상, 차분한 목소리.
뭐 다 그런 건 아니지만 하여간 좀 달랐다.
우리 직원들과는 며칠새 서로 낯을 익혔는지 편하게 어울려 먹는 그녀.
식사를 마친 그녀에게 다가가 음료를 권하며 사정 다 알고 있다는 듯 물었다.
"방 없으시죠? 제가 방 잡아 드릴 테니까 들어가서 쉬시고 내일 한국 들어가세요. 비행기 스케줄 변경이나 추가 요금은 제가 다 해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그렇게 하시죠."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표정에 고개 떨구는 그녀.
딴소리 못하게 엄포 놓듯 옆에 있던 직원에게 힘 있는 목소리로 방 잡으라 지시했다.
잠시 후 직원이 가져온 방 키를 그녀에게 건네고,
"제 여직원 하고 같이 올라가서 이 티켓 보내주세요. 제가 애들 시켜서 내일 아침으로 변경해 놓고 새 이 티켓 전해드릴게요."
"너무 감사합니다. 혹시 한국 언제 들어오세요? 제 핸드폰 번호 알려드릴 테니 한국 들어오시면 연락 주세요. 꼭 신세 갚겠습니다."
"신세는 요 무슨."
차갑게 느낄 만한 단답을 던지고 뒤돌아섰다.
평생 여사친 하나 없는, 여자에게는 무뚝뚝한 놈의 딱 부러지는 거절 방법은 그랬다.
끝까지 따라와 지지 않는 그녀. 끝내 내 번호를 받아 갔다.
그 후로 잊고 지내다 한국에서 그녀의 연락을 받았고, 차 한잔 하며 단도박 강의나 할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만난 날.
누가 봐도 도박판을 기웃거릴 만한, 돈 한 푼 없이 테이블 주위를 배회할 만한 여자가 아닌 현숙한 자태의 그녀가 나타났다.
공손히 인사하고 신세 갚겠다며 ATM에서 가져온 걸로 보이는 봉투를 내미는데 어차피 그거 받으려고 만난 건 아니니 일단 거절.
그 사이 어찌 지냈는지 묻는데 옅게나마 아직 도박에 미련이 남아 있는 느낌이었다.
매운맛으로 따끔한 충고를 해야겠다 결심하고,
"그때처럼 돈 다 잃고 대책 없이 카지노 안에서 며칠째 서성이면 남자들이 어떻게 볼까요? 본인도 잘 아시죠? 제가 보기엔 그때 몇 놈이 이미 이상한 제안했을 것 같은데. 맞죠?"
한동안 침묵하던 그녀가 힘겹게 입을 뗀 후 역경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휴가로 친구들하고 강원랜드에 놀러 갔다가 처음 슬롯머신 했는데 너무 재밌더라고요. 작게 출발했던 사업 죽어라 매달려 키우는 사이에 그만큼 재밌고 편안한 시간 보낸 적 없었거든요. 부드럽게 치고 올라가는 분위기 유지하려고 쉴 틈 없이 살아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다시 서울 올라와서 새로운 각오로 일하려고 하는데 자꾸 떠오르는 거예요. 밤에 누워 있으면 천장에 슬롯머신 화면 돌아가고. 그래서 며칠 뒤에 혼자 다시 갔죠. 돌아와서 며칠 뒤에 또 가고 계속 그렇게 다니면서 많이 잃었어요. 그런데 슬롯머신 하는 동안에는 세상만사 다 잊고 그 안에 몰입돼서 편해지는 게 무슨 마약 같아서 현실에서 내가 어떻게 되는지 또 내 사업이 어떻게 되는지 전혀 신경 안 쓰이더라고요. 정신 차리고 나니까 돈은 돈대로 잃고 일은 일대로 망가지고, 본전 욕심에 빨리 승부 볼 수 있는 바카라까지 손대기 시작했죠."
"다 그렇죠. 뭐"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순진한 여배우 같은 외모, 차분한 목소리로 고백하는 그녀가 안쓰러워지려는 순간,
"그런데 바카라가 더 재밌는 거예요."
"에휴, 잘났어요."
자신도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한쪽으로 내려 젖히며 두 입술을 물고, 눈을 감아 찡그리는 표정에 몇 가지 감정이 동시에 올라온다.
그중 하나를 골라 각 문장에 녹여 말했다.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 코딱지만큼도 없고, 내가 경험자로서 전문가로서 진심 어린 충고할 테니 잘 새겨 들었으면 좋겠어요. 사업 잘 될 때 부드럽게 치고 올라갔다고 했죠? 망가지는 것도 똑같아요. 자신은 충분히 절제할 수 있다며 호기롭게 접했던 작은 일이 부드럽게 커지거든요. 무서운 게 뭔지 알아요? 크게 성공하는 동안이나 크게 망가지는 동안 행복감에 도취된 상태, 긍정적인 기대는 똑같아요. 계속 행복해하면서 성공하고, 계속 행복해하면서 망가지는 거예요. 그 와중에 그래도 뭔가 잘 될 것 같다는 긍정적인 기대는 놓지 않죠. 내가 그랬거든. 처음 30만 원도 안 되는 돈 칩으로 바꾸면서 했던 생각이 뭔지 알아요? '에이 설마 내가 도박에 빠질까?'였어요. 그러다가 수십억 잃을 줄 누가 알았어? 매번 날린 금액에 상관없이 잃는 즉시 다음에는 꼭 딸 수 있다는 자신감과 기대가 생기는 거지. 사업 잘 되고 있을 때 위기가 와도 이겨내면서 다시 올라가죠? 왜? 행복해지려고. 도박도 똑같아요. 돈 줄 막히면서 더 어려워질 때 어디선가 또 빌려서 하는 거예요. 행복해지려고. 그러면서 더 망가지고.
"풉"
터지는 웃음에 입을 가렸던 손을 떼어내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
"저...... 혹시 어디 강의 나가세요?"
"아니 이 아줌마가! 지금 심각하게 얘기하고 있는데"
"아니요. 농담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내용이 너무 와닿아서요."
청순하다는 표현까지는 안 쓰려고 했는데 실제 청순한 이미지의 그녀 얼굴에 남은 웃음기를 지우고 대신 눈물 가득 번지게 하고 싶었다.
"당연히 와닿겠죠. 여러 사람들이 겪었던 경험 그대로니까요. 좀 전에 제가 그랬죠? 그때 주변 몇몇이 분명 이상한 제안했을 거라고. 직설적이었건 돌려 말했건 그랬던 놈들 있을 겁니다. 솔직히 그때 남자들끼리 농담반 진담반으로 '얼마면 어떻게 하겠네'라며 옆에서 히죽거리는 거 들었거든요. 아니다. 노골적으로 해야겠네. 그쪽한테 얼마 제안해서 받아들이면 방에 데리고 올라가서 자겠다는 의도였겠죠. 그런 놈들 앞에서 조신하게 처신한다고 그 양반들 평가는 바뀌지 않아요. 그렇게 보이는 사람은 그렇게 변하기 쉽거든요. 당신같이 조신했던 여자들 카지노에서 6개월, 1년 사이에 타락하는 거 흔해요. 본인은 절대 그렇게 안 될 것 같죠? 그래서 많이 배우고 한때 잘 나가던 여자가 방에서 쫓겨나 돈 한 푼 없이 카지노 안에서 건조해진 눈 비비면서 며칠 밤을 새워요? 잘 생각해 보세요. 지금까지 망하면서 달려온 거리보다 돈 받고 옷 벗는 데까지 가는 거리가 더 짧아요. 이렇게 지내다 보면 어느새 화장 진해지고, 옷 짧아지고, 야한 속옷 사 입고 그렇게 되겠죠."
카지노 출입하는 다른 여자들 같으면 당장이라도 쌍욕으로 응수했겠지만, 난 고운 심성의 그녀가 그럴 수 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역시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충혈됐던 눈의 붉은 기가 짙어지더니 이내 흥건히 맺히다 표면장력을 넘어 떨어지고 또 흐르는 눈물. 여세를 몰아 뼈에 사무치게 하고 싶었다.
"어떻게, 내가 한 500 줄 테니까 같이 갈래요? 그걸로 부족하면 그냥 벗은 몸만 구경하고 나오지 뭐. 나 싫으면 다른 남자 소개해 줄 수도 있어요. 기분 나빠요?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그럴 자격이 안 되니까. 당신 지금 남들 눈에는 그런 처지예요. '나는 절대 그 지경까지는 안 갈 것이다'라는 확신을 버리세요. 다들 처음에는 그랬으니까. 나도 물론 그랬고. 가지고 온 그 돈도 웃겨. 어디서 또 빌려왔나? 누구랑 자고 받았나? 도박하려고? 나한테 신세 갚겠다고 돈을 가져와요? 과거나 미래 당신 자신한테 지은 신세나 먼저 갚으세요."
손님 없는 작은 커피숍, 다 큰 여자가 고개 숙여 복받쳐 우는소리에 지켜보는 사람이라고는 꼴랑 종업원 한 명인 게 다행이었다.
한참 뒤 울음을 멈췄을 즈음 그녀를 부르며,
"OO 씨! 나 봐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다시 숙이는 그녀를 불러 눈을 마주하고 힘을 뺀 목소리로
"사실 전에 비슷한 일로 저보다 나이 많은 여자분 만난 적 있어요. 만나자마자 첫인사부터 도박 얘기 꺼내길래 더 해봤자 좋을 거 없다는 조언 대충 하고 헤어졌는데 나중에 강원랜드 다시 드나든다는 소문 들리더라고요. 그때 후회했죠. 솔직히 OO 씨 성품에 큰 충격받으라고 일부러 더 거칠게 표현한 면이 없지 않지만, 가능하면 내 표현 그대로 머리에 새겼으면 해요. 나는 진짜 착한 사람이 잘 됐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거든. 세상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그놈의 도박만 끊으면 OO 씨 다시 착한 여자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맘 잡고 열심히 일하세요. 내가 잘 되길 바랄게. 진심으로"
그제야 추스르고 고개 끄덕이는 그녀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했습니다. 힘들겠지만 참아 볼게요."
"참긴 뭘 참아. 지금 이 순간부터 아예 잊어야지. 아까 울면서 더럽게 콧물 흘리더라. 나 그거 다 잊을 거야. OO 씨도 다 잊어."
그녀와 헤어지고 집으로 향하는 내내 과거 나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회상했다.
그녀에게 퍼부었던 모두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중 일부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새겼던 내용들이었고, 과거 몇몇 카지노 커뮤니티에 칼럼 형식을 빌려 올리기도 했다.
까마득하게 잊은 채 살고 있던 어느 날 오랜만에 그녀에게 문자가 왔다.
"사장님 잘 지내세요? 저 그날 이후로 카지노 가지 않고 다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그럼 이제 우리 다시 연락할 일 없는 겁니다. 내 몸에 밴 카지노 냄새 전해질까 겁나네"
술 취해 핸드폰을 잃어버리며 그녀의 연락처는 사라졌고, 011에서 010으로 번호가 통합되며 내 예전 번호를 저장했던 그녀는 다시 내게 연락할 수 없었다.
세월이 흘러 문득 그녀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 페이스북에 이름을 검색했지만, 흔한 이름의 그녀 계정을 찾기 힘들었다.
내가 유부남임에도 혹은 여자로서 그녀가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나보다 어린 착한 여자가 맘 잡고 다시 열심히 사는 모습을 직접 보고 격려하고 싶었던 마음.
나는 아직 그녀의 콧물을 잊지 않았지만, 그녀는 아직 잘 참고 있는지 아니면 그날 이후 다 잊었는지 궁금하다.
행복을 추구하고 지속적으로 누리려는 인간의 본능은 실패의 저변과 성공의 첨단 사이 어느 위치에 있든 상관없이 발현하기 마련이다.
한 개인이 위치하는 기준점을 중심으로 발전의 긍정요소를 지향하며 재산·지위의 상승을 이루는 동안 느끼는 행복감과 발전의 부정 요소를 반복해 쇠퇴해 가는 과정에서 누리는 행복감 사이의 효용 차이는 없다.
쉽게 말해 열심히 모으고 아껴 쓰며 계좌 잔고를 늘리고 회사에서 인정받아 승진하는 사람들의 행복과, 도박으로 조금씩 재산을 잃고 사업에도 소홀해 점차 망해가는 사람이 게임에 이겨 칩을 거둬들일 때의 행복은 같다는 논리.
누구 말마따나 뼈 빠지게 일해서 떼돈 벌었다는 사람은 일하는 동안 뼈 빠지는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모으는 기쁨을 누렸고, 도박으로 돈을 잃은 사람은 조여드는 자금난에 괴로워하면서도 카지노에서 한판, 한판 승리의 쾌감을 누렸다.
그러고 보면 '행복'은 내가 하고자 하는 주장을 펼쳐냄에 있어 참으로 적절한 단어다.
만족감으로 표현되는 모든 감정을 아우르는 포괄적 의미이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매일, 매 순간 넓은 범위에서의 크고, 작고, 길고, 짧은 행복을 좇으며 살고 있다고 하겠다.
방향과 방법, 결과적 위치는 달랐으나 우리는 매 순간 행복을 좇으며 살아왔다.
Episode를 정, 반, 합으로 나눈 이유가 그렇다.
Episode 1에서 형제는 발전을 향해 가는 행복을 좇으며 크게 성공했고, 2에서 칩을 숨긴 여인은 타락으로 가는 행복을 좇다 보니 결국엔 범죄자로 전락했으며, 3의 여인은 그 두 길을 모두 걸어 본 장본인이라 하겠다.
과거의 나를 포함해 성공을 경험한 이들의 성공담에는 늘 '하다 보니'라는 언급이 있었고,
지금의 나를 포함해 실패를 경험한 이들의 하소연에는 늘 '몰랐다'가 자리 잡았다.
'열심히 하다 보니' vs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성공한 사람들은 모르면 넘어가지 않는다. 자신이 얼마나 높이 오를지 가늠하지 않고, 할 일을 방치하지 않으며, 넘겨짚는 일 없이 꼼꼼히 짚어 나간다.
반면 실패한 사람들은 안다고 확신한다. 타락하고 있는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고, 할 일을 방치하며, 잘 될 거라는 희망으로 단지 바랄 뿐이다.
그 모든 게 다 양심과 의지의 문제
신독(愼獨)이라 하여 혼자 있을 때 더욱 조심하라는 뜻으로, 남이 아닌 스스로가 인정하는 인격과 실력을 갈고닦아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니 상황에 적절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혼자 있는 시간, 자기가 열심히 살고 있는지 아닌지 각자는 다 알고 있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라면 제대로 알고 나서 하는 게 맞을 테고.
집을 사기로 결심한 누군가 열심히 일하고 돌아와 땀을 씻고 나서의 상쾌함 그리고 계좌의 숫자를 보고 나서의 만족감.
그는 안다. 많이 일했다는 사실을, 힘들지만 이겨내겠다는 의지를, 더 할 수 있다는 계획을.
다이어트를 결심한 누군가 집으로 돌아와 차고 있던 복대를 풀고 나서의 해방감 그리고 줄지 않은 뱃살을 쥐며 이내 찾아오는 좌절감.
그는 안다. 많이 먹었다는 사실을, 꼭 빼겠다고 다짐했던 각오를, 더 먹고 싶다는 욕심을.
그들 모두는 잘 알고 있다. 지금의 행복과 고통, 미래의 행복과 고통.
무엇을 먼저 하면 무엇이 따르고, 무엇을 많이 하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매 순간 본인이 정한 적절한 수준을 기준으로 행해지는 일들이 가져오게 될 행복을 노력으로 사느냐, 돈으로 사느냐 결정하는 당사자들은 진정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한다. 그러면서도 한다.
거듭 강조하지만 그게 다 양심과 의지의 문제.
선택과 실천의 근거와 이유가 되는 선과 악의 질적, 양적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자신에 대한 관용을 우선시하며 스스로의 미래에 누를 범하는 인간으로서의 우리가 너무 안타깝다.
그래서 나는 양심적 선택을 대신해 수치를 근거로 하는 명확한 판단 기준으로써 돈, 시간, 성장을 단위로 하는 카운팅을 제안한다.
카드 카운팅은 카지노 게임 블랙잭에서 유래한 용어다.
영화 '21'에서 다룬 소재로, 매판마다 카드의 순서가 자동으로 섞이는 무한 셔플 머신 사용이 아닌 처음 섞인 이후 나머지 카드의 순서를 유지하며 게임을 진행하는 방식의 블랙잭에서 사용하는 편법이다.
즉, 고스톱에서 처음 패를 섞은 이후 다시 패를 섞는 일 없이 진행하는 방식과 동일.
출현하는 카드 숫자가 높으면 1, 낮으면 -1을 적용하고, 누적된 합을 통해 남은 카드 숫자 경향을 파악할 수 있으며 게임이 종반을 향할수록 딜러와 플레이어 간 승부 예측을 용이하게 하기에 대다수 카지노에서는 금지하고 있다.
여기서 처음 섞인 카드 전체가 우리의 인생이라면 한 장씩 뽑히는 카드의 숫자는 발전 혹은 퇴보의 값으로 정의한다.
높은 숫자가 나오면 1을 더하고 낮은 숫자가 나오면 1을 제하듯 발전에 도움이 되는 일을 했다면 1을 더하고 그렇지 않은 일을 했다면 1을 제한다. 그렇게 계속 성장 값을 계산해 나간다.
지금 얻고 있는 고정 수익과 그것을 위해 소비하는 시간은 배제하고, 그 외의 시간과 돈의 소비에 대한 발전 혹은 퇴보 값을 매일 누적해 인생 후반전 우리 미래를 더 정확히 예측해 보자는 취지다.
영화·드라마·음주 2시간이면 2를 제하고, 독서를 하거나 추가 수익을 위해 일하거나 각 매체를 통한 학습 3시간이면 3을 더한다.
유희를 위한 결재와 필요 이상의 외식비용은 마이너스, 학습을 위한 결재는 0, 추가 수익은 플러스.
무엇이 플러스고 무엇이 마이너스인지는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안다. 그것마저 자신과 협상하려 한다면 성공은 애당초 기대하지 않는 게 낫다.
부의 요소에 소비하는 돈과 시간을 줄이고, 양의 요소의 실천을 늘려 매일 총합을 키우자.
카지노가 그렇듯 세상은 눈과 귀와 입을 즐겁게 하는 것들로 끊임없이 유혹하며 카운팅을 막으려 하지만 우리는 해야 한다.
성공한 사람들의 화려한 오늘은 과거 그들이 땀 흘려 일하며 느낀 보람의 작은 행복들이 쌓여 이루어진 큰 행복이요,
실패한 사람들의 처절한 오늘은 과거 그들이 양심의 털을 기르며 행복만을 좇던 방심이 쌓여 이뤄진 큰 불행이다.
나는 내가 이렇게 될지 몰랐다고 많은 사람들에게 말했지만, 그때도 지금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매번 나를 탓하던 내 양심에 미안함을 느낀다.
이제 양심이 말하는 대로 양심적으로 살고자 한다.
부디 여러분들도 양심적 카운팅으로 밝은 미래를 예측하고 이뤄 나가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