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나지 않았던 엄청난 수의 신용불량자와 그들에게 무분별하게 신용카드를 발급했던 은행, 카드사의 만용이 기사화되며 뒤늦게 '카드대란'을 이슈로 나라 전체가 시끄러웠던 시기.
통계가 드러나지 않았을 뿐 이미 그 이전부터 사태의 심각성을 예고하는 징후는 주변에 자욱했다.
나를 포함한 주위 친구들이 카드 여러 장으로 결제 대금을 돌려 막거나, 은행이나 카드사로부터 채권을 인수받은 캐피털사의 독촉 전화에 골머리 썩는 등 양상의 전조는 뚜렷했으니 말이다.
1999년 대학원에 입학해 연구실 출근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방문한 영업사원을 통해 처음 신용카드를 발급받았다.
예상 수입이라고 해봐야 연구실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참가해 교수님께 받는 연구비 정도가 전부인 대학원생에게 신용카드라니, 나 자신이 뭐라도 된 기분, 인정받는 느낌이었다.
중간 과정은 생략하기로 하고,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했다.
내 어린 시절 조막만 한 손으로 뭉치고, 시린 고통을 참아 굴려가며 큰 눈사람을 완성했을 때의 희열.
신용카드는 반대의 순서로, 희열은 여기저기 긁고 다닐 때 느꼈고, 시린 고통은 한도를 꽉 채운 뒤에 찾아왔다.
그렇게 두 행위의 과정과 결과에서 오는 감회는 대조를 이뤘다.
상환 방법을 고심하며 차일피일 미루다 채권이 은행에서 캐피털사로 넘어가는 지경에 이르고 상담원의 전화 목소리는 갈수록 거칠어졌다.(당시에는 전직 건달을 포함한 별의별 캐릭터들도 캐피털사에서 일했다.)
하필이면 약간 모자라고 거친 언어를 쓰는 상담원 그리고 모자란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은 거칠게 했던 학생.
논리와 매너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욕설 섞인 통화를 시도 때도 없이 반복하며 둘 다 치쳐가고,
"형씨! 내가 다음 달 말부터 나눠서 갚을라니까 전화하지 마."
"알았으니까 반말은 하지 맙시다."
과외를 시작하고 그걸로는 부족할 것 같아 생활정보지를 뒤지며 학원 아르바이트도 알아봤다.
여러 학원이 강사를 모집하고 있었지만 내 조건에 맞는 곳은 눈에 띄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눈을 낮춰 집 근처의 보습학원으로 정해 인터뷰 약속을 잡고 찾아갔다.
작은 보습학원, 그 규모에 어울리는 작고 마른 원장님.
만나면 왠지 기분 좋아지는, 환한 미소와 자신감 서린 목소리를 가진 분이셨다.
틈틈이 나누는 대화도 참 건설적이었다.
당시 암웨이(Amway) 다단계 사업을 부업으로 하고 계셨는데 다이아몬드 레벨에 올라 큰돈을 벌고자 하는 그 업계 종사자들과는 달리, 크고 다양한 인맥을 형성해 자신의 뜻을 전달하고자 하는 원대한 포부와 함께 본인의 사상을 더 크고 단단하게 다지기 위한 많은 공부를 하셨기에 해주시는 말씀 한 문장 한 단락이 내겐 큰 감동이었다.
더욱이 추천해 주신 몇 권의 서적은 내가 꿈꾸는 미래를 설계함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몇 번을 돌이켜 봐도 사업을 하며 보낸 지난날의 긍정적 자세는 그분의 영향이 컸음이 분명하다.
다만 한 가지,
그분에게 들었던 이야기인지 혹은 권해 주셨던 책 본문 내용인지 명확히 기억나지 않는 어떤 이야기로부터의 교훈을 어설프게 받아들인 나머지 또다시 흥청망청 과소비를 거듭하는 과오를 되풀이해야만 했다.
과거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 가난하지만 열심히 사는 선원이 한 달에 한 번 주급을 털어 손님 대부분이 상류층이었던 술집을 다녔고, 그 안에서 부자들 안에 섞여 그들의 삶과 마인드를 배우고 깨달아서 나중에 재력가가 됐다는 이야기였다.
어리석었던 나는 '상류층이 다니는 술집'에 방점을 찍었다. 그리고 그들처럼 소비해야 그들처럼 될 수 있다는 오판으로 살았다.
비싼 거 먹고, 좋은 데 가고, 가지고 있는 거 멀쩡해도 신제품 나오면 사고, 만 오천 원짜리 이발하면서 팁으로 3만 원 날리고.
신용카드로 과하다 싶은 고가의 상품을 구입한 친구 옹호할 때 하는 말, '그래 잘했어. 갚을 각오로 전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거야'
딱 그 마음이었다.
처음 시작한 사업이 궤도에 오르기까지 그랬고, 한창 잘 버는 시기에는 더 했다.
차츰 관념이 변질되기 시작하더니 이후에는 더 벌고 싶다는 욕망이 생길 때마다 잘 벌고 있다는 교만함으로 쓰고 또 썼다.
그렇게 긴 세월 살아가다 인터넷 어느 공간에서 그분과 다시 만난 날, 과거의 일들 하나둘씩 회상하다 선원 이야기까지 기억해 내고, 수치와 자책에 만시지탄하며 되뇌길,
'아! 그 얘기가 그 얘기가 아니었는데'
Episode 2.
호텔 생활에 신물 나고 주머니 사정도 넉넉지 않아 이제 막 콘도를 얻어 혼자 지내기 시작한 날,
"형님! 저 지금 마닐라 도착했거든요. 전해 드릴 물건이 있어서 형님 댁 들리려고요."
친한 동생이 한국에서 볼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내가 좋아하는 고급 떡 두 상자와 싸구려 양말 20켤레를 바리바리 싸왔다.
"형님 이제 콘도에서 혼자 지내셔야 하니까 잘 챙겨 드셔야 합니다. 떡은 냉동실에 얼렸다가 드실 만큼만 꺼내서 녹여드시고요, 매일 빨래하시기 번거로우시니까 양말 든든하게 가지고 계시고요"
호텔에서 지내며 손가락 까딱해서 직원들 시키던 편안한 삶에서 추방돼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해야 하는 DIY 생활 초기의 두려움.
그런 나를 향한 후배의 따뜻한 손길에 감사하며, 아껴 먹고 아껴 신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뭔가 수상했다.
메이드를 고용하면 겹치는 동선에 왠지 번거로울 것 같아 콘도 청소 용역으로 파견된 친구를 간간이 불러 집 청소를 시켰는데 다녀갈 때마다 집안에 있던 물건 하나둘씩 사라지는 느낌.
20개 담겨있던 떡 두 개씩 꺼내 먹으며 18개, 16개 짝수를 유지했는데 뜬금없이 홀수로 남다가 다시 짝수로 돌아오고, 수북했던 양말의 고도는 풍화와 침식을 거치며 점차 낮아졌다.
결국 두 상자 떡 40개, 다 먹으면 부풀어 오를 것 같았던 허리둘레는 그대로였고, 떡이 모두 사라질 무렵 양말은 5켤레만 남았다.
나보다 먼저 필리핀 생활을 시작했던 선배들이 말했다.
"종종 벌어지는 일이야"
그렇다고는 하나 정도가 지나쳤다.
어떤 나이 많은 사기꾼과 마닐라에서 제일 큰 학원을 인수해서 운영했을 때 기숙사 생활하는 한국 학생들에게 삼시 세끼 제공하는 식자재 비용은 나날이 늘어났고, 목 좋은 곳에 식당을 차렸을 때도 매출 상승세를 초월하는 식재료 값에 순수익은 제자리였다.
늘 그런 식이었다.
양말 보존의 법칙은 성립하지 않았고 규모의 경제는 실현되지 않았다.
Episode 3.
참 지독한 놈이었다.
잘 나가는 자기 선배의 씀씀이와 비교하자면 더 지독하게 느껴지는 놈.
한국에서는 충분히 납득할 만한 보통의 소비성향이라 할 수 있지만, 툭 치면 돈 나오는 부자들로 가득한 카지노에서는 천하의 구두쇠로 지탄받아 마땅한 짠돌이었다.
지금쯤 80 타는 아니어도 90타 정도는 가능하리라 예상하는 골프 실력, 그 밑바탕 역시 주변 지인에게 얻은 골프채, 골프공, 가방을 들고 남들 갈 때 꼽사리 껴서 쌓은 공짜 경험의 산물.
심지어 연습장에 가서도 바구니에 담긴 골프공 숫자를 의심하며 필리핀 직원에게 불만을 제기하는, 25원도 안 하는 공 하나에 민감하던 녀석이었다.
다만 나눠서 내는 일 없이 누구 하나가 먼저 일어나 돈 꺼내 먹고 마시던 시절에 매번 결재 위기를 슬기롭게 피해 나가며 남들 눈밖에 나지 않고 잘 처신하는 몸가짐만큼은 정말 훌륭했다.
삼삼오오 모여 그의 절약정신을 농담 삼아 웃기도 했지만, 그 어떤 자리에서도 그는 기피 대상이 아니었다.
그 친구 벌이가 남들만 못 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해도 한국에서 억대 연봉받는 대기업 임원급에 버금가는 수입.
그럼에도 그는 나와 연락이 끊기기 전까지 알뜰하게 살았으며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으리라 믿는다.
단순한 소비에서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업이나 투자를 앞둔 시점에서 그의 신중함은 남달랐으며, 그 때문인지 그가 시도했던 모든 일은 손실 없는 성과로만 점철됐다.
그 녀석과 새벽까지 술 마시고 함께 차에 올라 집에 가는 길.
"형! 저기 잠깐 들렀다 가면 안 돼요?"
"어딘데?"
가까이 가서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LUGAW 혹은 볶은밥에 BULALO 국물이 함께 나오는 필리핀 길거리 음식을 파는 리어카였다.
"야! 저기 섞여서 저걸 꼭 먹어야겠냐? 배고프면 한식당 가자. 형이 맛있는 거 사줄게"
"아니에요 형! 괜히 큰돈 쓰실 필요 없어요. 술 마시고 출출할 때 저거 한 그릇 먹으면 딱이더라고요"
여타의 길거리 음식에 비해 그나마 청결한 환경에서 만들어지는 음식.
난 먹지 않았다. 차에서 내리지도 않았다.
그저 키 작은 필리피노들 사이에 섞여 게걸스레 먹고 있는 90kg 거구의 뒷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9년이 흐른 지금,
그 녀석은 건실한 가정을 이루며 풍요롭게 살고 있고, 난 피치 못해 과거 그 녀석의 소비생활로 살고 있다.
지금 내가 사는 집 근처 여전히 그 자리에서 생업에 여념 없는 그 리어카를 지나칠 때마다 떠오르는 그 녀석.
우리는 심각성을 달리하는 다양한 종류의 관종들과 함께 살아간다.
자기만족의 순간을 기록에 남기기 위한 목적과 자기 과시 혹은 관심받고 싶은 욕망으로 쓰인 글 그리고 사진들.
전혀 절실해 보이지 않는 천편일률 사연들이 천문학적인 수와 양의 데이터를 차지하며 인터넷 공간 점유율을 높이고 있다.
내 눈에는 관종이 자주 눈에 띈다.
어차피 관종은 당사자가 아닌 남이 규정하는 용어이기에 내 기준을 부정당하며 욕먹는 일은 없을 듯.
더욱이 세상은 외면으로 평가할 뿐 내면의 무엇을 보려는 성의에 각박해지고 있지 않은가? 다행이다.
도박중독자들과 우리 모두는 여러 면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그들도 재미를 위해 하기도 하고, 보람을 느끼기도 하며, 돈을 벌어야 한다는 목적이기도 했다.
정해진 일상 외의 여가를 마주하는 당신은 카지노에 들어선 손님과 다를 바 없다.
그들이 다양한 종류의 게임 중 하나를 골라 테이블을 정해 앉듯, 당신 역시 수익을 꿈꾸며 당신이 원하는 분야를 정해 그 안의 구성원으로 자리 잡는다.
옆 사람과 정보를 주고받으며 친해지거나 싸우기도 하고, 얻거나 잃기도 하며, 여기가 맞나 싶어 옮기기도 한다.
결과에 상관없이 과감히 자리에서 일어나 정한 일정에 마치는 사람도 있고, 막연한 기대로 줏대 없이 기간을 연장하며 본분을 잊거나 큰돈을 잃는 사람도 있다.
후자가 바로 관종이다.
적당·적절의 한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부류, 하필이면 눈에 띄어서 신경 쓰이게 하는 그들, 남의 눈치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내 돈 가지고 내 맘대로 한다는데'를 부르짖는 관종들.
누구는 그들을 안타까워하고, 누구는 부러워하는데 내 눈에는 그냥 관종이다.
때로는 그렇게 해서 운 좋게 돈 버는 경우도 있지만 그 경험은 행위의 반복을 낳고, 조만간 정상에서 크게 벗어나 회복하기 힘든 피해를 입어 좌절하는 사례를 자주 목격한다.
그 돈을 절약하고, 그 시간을 아꼈다면 어땠을까?
자기가 가진 재산, 버는 만큼에 대비해 적절히 쓰며 행복하다 말한다면 할 말 없다.
하지만 그들 가슴속에 '지금 보다 더 나은 삶'을 향한 바람이 조금이라도 자리 잡고 있다면 괜한 방어기제는 풀어야 함이 옳다.
그들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사방팔방 나도는 광고의 주문에 이끌려 굳이 할 필요 없는 소비를 하고, 영상의 자극에 현혹 당해 자제력을 잃고 있는 현실.
그 현실에 갇혀 있는 우리 모두가 안타깝다.
우리가 자처해서 가혹한 환경을 조성하고, 우리 스스로를 연일 더 큰 힘으로 옥죄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무기력함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한다.
명징한 예로, 급속도로 팽창한 배달 문화가 그렇다.
플랫폼 수수료와 배달료 상승으로 인해 업소 지출 금액이 올랐고, 적자로 흐르는 상황에 못 이겨 음식값을 인상했다.
주문이 늘어 식자재 가공, 유통 업체에 부하가 걸리고 자연스럽게 인상폭도 벌어졌다.
게다가 치솟는 배달기사 수입에 여타 직종 종사자들이 몰렸고 그로 인해 인력난을 겪게 된 분야의 인건비는 상승했다.
요식업, 가공·유통업, 운수업뿐만 아니라 연관된 다른 분야에까지 영향을 미쳤음이 자명하다.
정리하자면, 대체라 하기엔 비용 차가 너무나 큰 새로운 소비처에 막대한 돈이 빠르게 몰리며 연쇄적인 인상을 일으켰다.
다시 말해, 집에서 해 먹던 일을 배달시켜 먹는 일로 대체하며 소비가 몰렸고, 집단 소비의 폭발적 증가로 야기된 각 업종별 인상의 부담을 소비자가 고스란히 떠 앉게 된 셈이다.
거리에 오토바이가 늘어나 시끄럽다며 짜증 내고, 음식값 인상과 높은 배달비를 불평하면서도 시켜 먹는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면서 지출을 줄이지 않는 모습과 같은 심리와 행위 간의 모순.
저마다 부자로 여기는 액수의 기준이 다를 테니 합리적이고 범용적인 정의를 내리자면,
'스스로에게 허용한 만큼을 만족스럽게 지출하고, 남은 살림에 대해 넉넉함을 느끼는 사람' 정도가 어떨지 싶다.
누구는 '버는 돈 없이 100억을 가진 이'보다 '당장 가진 돈 없이 매달 1억을 버는 이'가 더 안정적이라 말하기도 하던데 세부 전제가 무엇이건 간에 바라는 만큼을 벌고도 욕심을 냈거나, 다음 달에 목표금액을 채우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을 경험해 보지 않았다면 속히 주장을 철회하기 바란다.
섣부른 판단이 아닐 수 없다.
부자를 동경하는 이들 대부분은 수입에 주목하는 경향이 짙지만 지출과 보존 역시 수입만큼 중요히 다뤄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식상한 소재일지 모르나 워런 버핏은 아침으로 맥도널드 모닝 메뉴를 즐긴다.
140조를 가진 대부호의 재미있는 취향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속 사정에는 묵직한 교훈이 숨어 있다.
돈을 많이 번 다음 날 그는 가장 비싼 맥모닝을 먹고, 손실을 입은 다음날에는 저렴한 메뉴를 선택한다.
그 차이는 700원이지만, 그 안에 새겨진 그의 각오는 7조 이상으로 느껴진다.
6살 때 이미 먹고 싶은 모든 것을 발견했다 말했고, 각자가 바라는 행복의 척도가 엄청난 차이를 만든다고도 했다.
재벌의 수익이 가득했던 화면에 절약과 절제의 정신이 오버랩되고 있지 않은가?
절약은 절약 그 자체에 머물지 않고 절제와 신중의 자세를 잉태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시간과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관한 심사,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관한 숙고를 깊게 하는 습관을 배게 한다.
그 습관이 반드시 올바른 투자로 이끌어 주리라 확신은 못할지라도 그릇된 투자는 막아 주리라 안심은 할 것 같다.
절약하지 않았고 그래서 신중하지 못했으며, 스무 켤레의 양말과 내 몫의 떡을 지키지 못한 내 입장에서는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글을 쓰다 잠시 멈추고 재벌들의 자산과 그들이 보유한 차를 검색해 봤다.
빌 게이츠가 가진 명차 몇 대의 합이라고 해봐야 그의 재산 만 분의 일, 아니 십만 분의 1에 가까웠고 일런 머스크, 마크 저커버그, 조지 소로스 등의 재벌들도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이 먹고, 마시고, 살고, 타는데 소비하는 돈과 재산의 비율은 분명 우리의 그것에 비해 현격히 적다.
설령 어마어마한 지출을 했다 하더라도 그들의 자산에 비하자면 그리고 우리에 비하자면 합리적인 소비였음이 명백하다.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이 영웅이라 칭하고 롤 모델 삼았던 인물, 척 피니(Charles F. Feeney)
그는 직원들에게 이면지를 쓰게 했고, 기업인들이 모인 식사 자리에서 계산을 피하기 위해 일찍 벗어났으며, 천문학적 금액이 걸린 소송으로 법적 분쟁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 변호사 수임료마저 깎으려 했다.
대중은 그를 돈밖에 모르는 구두쇠라 비난했고, 언론마저 비아냥거리는 기사를 쓰기도 했으나 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보유하고 있던 면세점 매각 과정에 문제가 지적됐고, 검찰 조사에서 우리 돈 5조 5천억 가량이 지출된 비밀 회계장부가 드러났다.
대중은 다시 그를 비난하며 그가 그 돈을 빼돌리려 했다고 의심했으나 추후 세부 조사에서 내역에 기재된 금액 모두 장학 재단과 자선단체에 기부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검소한 생활을 이어가며 남몰래했던 선행이었다.
선행에 대해서는 차치하고, 그의 소비생활을 강조하고 싶다.
한화 10조 이상을 기부했고, 현재도 20억 원 가까운 자산을 보유하고 있지만 아내와 함께 임대주택에 살고 있고, 10달러짜리 Casio 전자 손목시계를 차며, 가방이 아닌 비닐봉지에 책을 넣고 다닌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며, 비행기를 타더라도 이코노미석에 앉는다.
그처럼 욕망의 크기를 줄여 그것을 행복의 한계로 정하고, 주위의 시선을 개의치 않는 검소한 생활로 마침내 꿈을 실현했던 사람들.
그들을 표상으로 삼았음에도 벌고 모으는 방법에만 관심 가졌을 뿐 그들의 소비 생활을 간과했던 내 과거가 수치스럽고 내 주변이 안쓰럽다.
추구하고자 하는 행복의 종류와 크기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아껴야 잘 산다는 구태의연한 내용으로 지면을 낭비하는 건 아닌지 주저하다 막상 여기까지 써 내려오다 보니 앞서 관종이라는 언급이 과했다는 염려마저 사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