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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물 건달의 화려한 과거

찾아서 만나고 구하라

by Sir Lem

그날도 어김없이 올라온 50대 후반의 남자.

반겨줄 이 하나 없는 곳에 제 발로 와 돈 될 만한 일 없는지, 얻어먹을 것 없는지 살피며 뻔뻔히 앉아 있는 모습.

카지노 휴게 장소나 정켓이라 불리는 VIP 구역에는 늘 앵벌이들이 몇 자리 차지해 죽치고 앉아 있었다.

정장 입고 다니며 에이전트라 자칭하지만 모객보다 구걸 비율이 높은 그 부류들을 향한 나의 대우는 대체로 무관심이었다.

오랜 시간 눌러앉아 있는 장기 체류자가 거슬리면, '담배 한 갑 못 내주겠나. 그게 다 마케팅의 일환이다.'라는 생각에 한 갑 쥐여주고 교화했다.

생전 손님 한 명 물어 오지 않는 이들에게 마저 관대하려 했지만, 가끔 자기가 뭐라도 되는 양 나이 어린 내 직원을 부리려는 꼴이거나 손님에게 추근대기라도 하면 나이를 불문하고 욕을 날려 내 보내기도 했다.

그러니 어딜 가나 처신이 중요하다.

말 잘 듣고 얌전히 앉아 있으면 뽀찌라도 몇 푼 받거나 끼니 정도는 해결할 수 있는 곳에서는 더욱 그렇다.

(뽀찌 : 카지노나 도박장의 승자들에게 받는 개평과 같은 의미)


과거 큰 부를 누리며 이름 날렸던 건달의 당당함에서 이제는 반 앵벌이로 전락해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신세였지만, 여전히 긍정의 에너지를 잃지 않은 채 늘 웃는 여유. 그날은 왠지 평소와 달랐다.

영양가 없는 퇴물들끼리 나누는 영양가 없는 잡담, 흔히 '내가 도박으로 얼마까지 따 봤네.', '얼마를 날렸네'등의 그들 사이에는 영웅담, 나에게는 바보 인증으로 여겨지는 대화 따위도 없었다.

상대 없이 혼자 떨어져 먹먹하게 앉아 있는 모양이 애처롭기까지.

인간은, 특히 나 같은 인간은 열렬한 교감의 동물이기에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먼저 말을 건다.


"형님 식사하셨어요?"

"어..... 어!"


이미 먹었다는 긍정의 답이 아닌, 자신을 향해 말하는 누군가에 대한 인지 반응에 가까웠다.

신경 쓰여 다시 물어본다.


"식사 안 하셨죠?"


골똘하던 자세를 고쳐 그제야,


"안즉 안 먹었네."


새로운 전략인가?


무슨 일 있냐고 물으면 사연이 길어지고, 손수건 없이 볼 수 없다는 무성영화 변사가 되어 사람을 홀리니 어느새 주머니에서 돈 꺼내게 만드는 앵벌이들의 신파극에 말리지 않으려 대충 인사하고 무시하건만 우울함 짙은 표정이 걱정스럽고 궁금해진다.


"형님!, OO 식당 닭도리탕 국물 찰랑하니 맛있던데 같이 드시면서 오랜만에 얘기나 좀 나누시죠."

"고맙네. 그러세."


잠시 후 배달 시킨 음식이 차려지고,


"닭은 형님이 다 드셔요. 저는 국물만 먹을라니까"

"알았네."


매일 공짜 음식으로 때우는, 일터에서의 가볍고 초라한 한 끼와는 차원이 다른 고량진미에 잠시 번민에서 벗어나 땀 뻘뻘 흘려가며 열심히 먹고 있는 큰 체구의 당뇨병 환자.


"감자도 많이 드셔요. 고혈압, 당뇨에 좋다네요."


입안 가득한 음식 탓에 고개를 크게 끄덕여 답한다.

시름의 체증에 닫혔던 말문이 얼큰한 음식에 속시원히 뚫렸는지 날숨을 크게 뱉고, 직원이 가져온 커피 한 모금 들이켠 뒤에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기 시작한다.

어떻게 큰돈을 벌었고, 도박을 하게 됐고, 다 잃었고, 이 신세가 됐고, 호주에서 유학하고 있는 딸이 오는데 돈은 한 푼 없고, 하물며 당장 약사 먹을 돈도 없다는, 그와 같은 부류에게 자주 들어왔던 카지노 고전 인문학 스토리였다.

다른 이들에게는 대개 5천 페소(한화 12만 원)로 거마비 치르고 보냈지만, 그날 그에게는 그 이상의 예우로 대했다.

아버지 만나러 마닐라에 오는 그의 딸이 편히 지낼 수 있게 호텔을 예약해 주고, 함께 시간 보낼 경비도 넉넉히 쥐여주고, 건강한 모습으로 딸 맞이하시라고 약 값까지.

명품이 비싼 연유가 있지 않은가? 뻔한 사연 읊어 대는 대다수 앵벌이들의 짝퉁과 달리 그의 것은 명품이었다.

여느 때라면 달 표면 닐 암스트롱이 되어 사뿐히 걸어 돌아갔을 테지만, 터벅터벅 무겁게 내딛는 걸음걸음, 오래되어 빛바랜 명품 구두, 회한이 짙게 서린 힘없는 뒷모습이 깊은 사색에 잠기게 했다.


도박으로 천억 이상 날린 사람들 일대기는 많이 들었다.

내가 직접 목격하거나 만난 이들만 해도 셋이다.

그중 한 인물,

그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천억을 날렸다. 증인까지 여럿 있는 팩트였다.

그러나 내게 그 금액은 중요하지 않았다.

금액을 달리하여 각자에게 소중하고 큰 자산을 도박으로 날린 이가 어디 한둘이던가?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한껏 부풀려 말하는 허풍쟁이들이 잃었다고 주장하는 돈을 합치면 서울시 한 해 예산을 초월하는 거액.

나는 그들이 도박에 빠지며 걸었던 쇠락의 길이 아닌, 정상을 향해 오르던 과거가 궁금했다.

무엇으로 어떻게 벌었는지.


신도시 개발이 한창이던 1990년대. 명색이 브랜드 있는 건달이었던 그는 떴다방 뒤를 봐주거나 직접 운영하던 잔바리들과는 달리 대형 건설업체 회장들과 맺은 친분을 이용해 분양 피라미드 상층에서 판을 주무르고 규모 작은 단지의 시행까지 아우르는 거물이었다.

재산 늘리는 방법의 참신함은 없었지만, 사업을 크게 일으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맥 형성 이야기는 주목할 만했다.

시칠리아 마피아, 멕시코 마약 카르텔, 일본 야쿠자, 홍콩 삼합회, 해방 이후 대한민국 건달들 모두 화려한 인맥을 꾸리며 소기의 목적과 성과를 키워 왔다.

더러운 일에 몸담고 있던 이들이 어떻게 깨끗한 이미지의 고위직을 만났느냐가 관건.

일단 만나야 뭘 하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내가 도움받거나, 나와 좋은 관계로 함께 큰 이익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높은 위치의 권력가에 이르는 동아줄을 꼬아서 엮는 작업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분을 어떻게 만나셨어요?"

"참 복잡했지"


듣고 보니 정말 복잡하고 어려워 보였다.

앞뒤를 모두 자르고, 그가 대형 건설사 회장을 만나는 과정만 편집하자면 눈물 나는 감동의 드라마 그 자체.

내 지난날이 떠올랐다.

20대 후반에 이미 월 천만 원, 2천, 3천,...., 30대에 억 단위에 이르기까지 각 단계의 목표와 결실을 키워갈 수 있었던 모멘텀의 근원은 인맥이었다.

내게 필요한 인물을 탐색하고, 만나기 위한 구실을 만든 후 설득을 통해 이해관계를 형성하는 일련의 작업.

교감과 교류 없이 혼자 힘으로 업적을 이룬 이는 없다.


초등학교 시절 과학수업에서 빛이 만들어지는 원리를 배우기 위한 준비물 건전지, 전선, 꼬마전구에 빗대자면 나는 1.5V의 힘을 받아 귀여운 빛을 내던 꼬마전구.

전선을 뻗어 더 큰 전압을 찾고 그로부터 더 높은 전류를 받아 촉을 키우며 더 큰 전구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 내가 작은 손전등으로 발전했다면, 그는 백열등 이상이었다.

고대하던 사람과의 만남이 그 계기였다.

노력은 이에 그치지 않았으니, 같은 전압이 한계라면 그 안에서 한층 밝은 빛을 내는 형광등으로 거듭나고자 관계 발전을 기획하고, 결국 회장의 등을 긁어주는 효자손이 되기로 자처. 탈법을 감행해야 하는 은밀한 일들을 도맡으며 신뢰를 쌓았고, 회장 주변인들을 소개받으며 사업을 급격히 확장시켜 기대 이상의 막대한 수익을 얻었다고 한다.




건달들이 자주 사용하는 은어적 표현, '후다를 딴다'.

크고 작은 일에 연관된 낯선 이의 신상파악을 위해 주변 지인들에게 연락해서 묻는 일을 뜻한다.

광대한 네트워크에서 취합한 휴민트를 가장 잘 활용하는 집단.

그들은 그렇게 알아내고 관계를 끊거나 목적을 이뤄 나간다.

흔히 스폰서라 불리며 든든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 재력가들이나 사업 확장에 도움 될 만한 이들과 연을 맺기 위한 인맥, 만나기 위한 방법 강구를 위해 여기저기 전화하고 분주히 뛰어다니는 그들의 열정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잘 살고자 하는 열망만 있을 뿐 무능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의 나태함을 보며 종종 혀를 차는 까닭은 바로 그 열정의 부재 때문이다.

내 성장에 도움 될 멘토를 찾아 조언과 지원을 구하려는 열정이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아쉬운 대로 누군가의 강의, 부자가 쓴 회고 형식의 개발서를 찾아보는 이들이 많지만, 그 범용적이고 파다해진 지식이 과연 그들의 창의적 사고 유발에 무슨 기여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물론 모방을 배경지식으로 하고자 원천 기술에 담긴 당사자의 경험과 철학을 새기려 하는 의도는 십분 이해한다.

그러나 그 일방적 수용 방식 대비 상담을 통한 교정과 지도가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 없다.


자동차 도로연수가 좋은 예다.

책·사진·영상으로 각 기능을 이해하고 혼자 차를 몰아 도로로 나서기보다 옆에 탄 강사의 지도 아래 차선·신호·도로 사정에 반응하는 내 운전 감각을 그때그때 교정받는다면 한결 빠르고 안전하게 익힐 수 있다.


영어 회화도 그렇다.

영어 말하기 능력 향상을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은 네이티브와의 빈번한 대화다.


나는 늘 독창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독창성은 개인성에서 기인한다.

내 개인적 필요를 충족하고 개인적 역량을 높이기 위한 개인적 도움을 구한다면 나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 개발이 수월해진다.

워런 버핏과의 점심 식사가 높은 경매가를 기록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라.

모두에게 공개돼 평범해진 책 본문 내용으로 수많은 이들과 지적 경쟁을 펼치는 평균을 넘어 직접 대면으로부터 나만을 위한 맞춤형 지식과 도움을 구하고자 함 아닌가?


추구를 향한 열정의 디테일.

학원과 과외, 미팅과 소개팅의 차이는 명확하다.

누구를 개인적으로 찾아 묻는 과정 그리고 관계 발전으로부터 다음 단계의 성장을 이룩하려는 노력,

나는 그것을 권하고 싶다.

정적인 학습의 반복에서 벗어나 동적인 만남을 추구하며 내게 최적화된 정보, 조언, 도움을 구해 더 큰 발전을 위한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


흔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는데, 이를 깨달은 누군가에게 절실한 그다음 단계의 조언이라면 '아무도 만나지 않으면,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한다.'가 적당하리라.

일일이 따지고 제쳐나가면 마침내 남는 실패, 정체의 근원적 이유, 게으름에 도달한다.

거기에 더해 불편함까지 감수해야 하는 인맥형성은 더 요원히 느껴지기 마련.

세상 편해졌다고 성공으로 가는 길마저 편해진 건 아니지 않은가?

불편하고 험한 길을 걸어야 남보다 강해진다.


찾아서 만나자 그리고 배우자.


그의 성공 이야기와 얽힌 인물들에 관한 질문에 나이 많은 퇴물 건달은 이렇게 답했다.


"내가 돈 벌겠다고 공부를 안 해봤겠냐마는 백날 본다고 고것이 나만 알고 있는 거는 아니잖냐? 넘들 다 보는 거. 누구 만나겠다고 걸어댕기고 만나서 직접 듣는 만큼 내 머리가 차고 내 주머니가 차는 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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