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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과 명품 시계 外 2

신용과 신뢰

by Sir Lem

Episode 1


어느 기업 회장 장남으로 그 자신도 시총 꽤 높은 기업 최고 자리에 있던 인물.

술이나 안주 먹을 때가 아니고서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그가 옆에서 펼쳐지는 안쓰러운 광경에 입을 뗀다.

가져간 돈 카지노에서 모두 잃고 지인들에게 돈 빌리기 위해 잔뜩 치장한 목소리로 여기저기 전화하며 거절당하고 있는 한 남자의 꼴이 못마땅한 듯.


"고등학교 때 같은 반에 부잣집 아들이 있었어."

"회장님 댁이 더 부자 아니셨나요?"

"돈은 우리가 많았는데 애들은 몰랐지. 지금 나 보면 알겠지만 누가 나를 회장으로 보나. 동네 주정뱅이지. 그때도 그랬어. 나는 티 안 내고 다녔지. 하여간 그놈은 지독한 구두쇠였거든.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는 인간이라고 하지? 그런 애야. 지갑에 돈도 많이 가지고 다니면서 남한테는 한 푼도 안 빌려줘. 회수권(버스표) 한 장도 안 빌려주는 놈이야. 아무리 절박한 사정을 말해도 가차 없이. 나는 그런 놈들 싫어하거든. 그래서 생전 말도 안 섞었어. 그런데 어느 날 집에 가려고 정류장에서 버스 기다리는데 주머니를 털린 건지 어쩐 건지 회수권이 없네. 주변을 보니까 아는 놈은 그놈밖에 없어. 그냥 집까지 걸어갈까 하다가 그래도 시도는 해보자 해서 그놈한테 간 거지."

"생전 말 안 섞으셨다면서요?"

"응 그랬지. 그날이 처음이었어. 'OO야 회수권 한 장만 줘라. 내일 두 장 줄게'"

"주던 가요?"

"바로 주더라고. 그 뒤로 다른 놈들은 끝까지 안 빌려줬지만 나한테는 큰돈도 줬지. 그런 게 신용이야."



Episode 2


카지노 VIP 구역,

게임하는 손님들 수 그리고 그들의 시드머니로도 불경기에 비수기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중 눈에 띄는 한 손님,

테이블에 가장 많은 칩을 쌓아 놓고 고액 베팅을 일관했지만, 그 옆에 에이전트는 보이지 않았다.

누구라도 앞서 달려들어 손님을 잡으면 돈 벌 수 있는 기회.

주위의 여러 에이전트들이 침 흘리며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꼬드겨 여권을 받고 정식 등록해 커미션을 벌어 보려 혈안이 된 상태에서 저마다 다른 표현, 다른 방법으로 시도하지만 완고한 손님은 귀를 닫은 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렇게 여럿이 몇 번의 실패 이후 포기했다.


'한심한 양반들'


계획을 세운 뒤 잠시 방에 다녀와 다시 살피고 곧 필리핀 여직원에게 뭔가를 지시한 후 떠났다.

손님에게 가서 내가 지시한 대로 담배와 라이터, 민트 사탕 몇 개를 내미는 여직원.

손님의 당황스러운 표정은 짧은 대화를 주고받은 이후 미소로 바뀌었다고 한다.

잠시 후 웨이트리스에 의해 손님 테이블로 전달되는 믹스 후르츠.

몇 시간 뒤 방에서 쉬고 있던 내게 직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객장 내 손님들이 거의 다 빠져나가 에어컨 냉기가 싸늘하게 느껴지는 새벽.

VIP 구역으로 가서 내가 구상한 시나리오의 실현을 확인했다.

손님이 수줍게 건네는 인사를 받고, 대화를 나눈 뒤 다음날 여권을 받아 등록시켜 커미션 수익 창출.

직원과 함께 게임하는 손님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직원을 향해,


"That's credit"



Episode 1 + 2 = Episode 3


매주 비행기 타고 마닐라로 날아와 500만 원가량으로 카지노를 즐기던 손님이 있었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전혀 절박해 보이지 않았고, 결코 흥분하거나 분노하지 않았다.

온화한 미소로 여기저기 먼저 다가가 인사하고, 작게나마 나누는 다정함.

그런 그의 태도에 카지노 에이전트들 사이의 금기 '내 손님 아닌 다른 손님과의 대화'도 그에게는 예외였다.

내 손님을 가로채려 한다는 의심이 들면 귀싸대기부터 날리는, 건달들에 의해 생긴 관습법.

오히려 그의 에이전트가 다른 에이전트에게 그를 소개하거나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으니 예외도 그런 예외가 없었다.

정해진 일정 마지막 날, 딴 돈 일부를 복돈 삼아 에이전트와 직원들에게 과하다 싶을 만큼 나누어 주기도 하고, 일정이 많이 남은 상태에서 가지고 온 시드가 바닥나도 다른 이들처럼 돈 빌리려 하지 않고 스케줄을 앞당겨 귀국하려 하니 모두가 바라는 손님 상이었다.

카지노에서는 찾기 힘든 성인의 인품이라고나 할까?

에이전트는 수억의 돈으로 게임하는 초특급 손님 예우로 그를 극진히 대했다.

관계가 무르익음에 따라 손님과 돈거래도 이뤄지고, 갚을 때마다 면세품을 사 오거나 돈을 더 얹어주는 식의 이자까지 쳐주니, 돈 빌리고 도망친 손님들로부터의 금전사고로 인해 물질적, 정신적 피해를 입어 살기 버거워하던 에이전트에게는 그야말로 물심양면의 행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매번 적당한 금액으로 소소한 승패를 기록하던 손님이 어디서 무슨 기운을 받았는지 뜻밖의 대승을 거뒀다.

에이전트 뒷주머니에 두둑한 팁을 찔러 주고 함께 시계 사러 나가는 두 사람.

늦은 오후가 돼서야 에이전트 혼자 돌아왔다.

시계를 산 뒤 골프 여행 온 친구에게 자랑하러 간다는 손님을 직접 모셔다 드리려 했으나 극구 뿌리치며 혼자 택시 타고 가겠다고 했단다.

밤새 응원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가서 쉬라 했다고.

손님은 이긴 금액 보다 조금 더 비싼 시계를 샀다고 한다.

팁으로 줬던 돈을 다시 빌려 부족한 금액을 채우고, 한국에 돌아가면 갚아주기로 했다는 단순한 내용이건만 각종 양념을 가득 쳐 손님의 인격과 그에 감사한다는 소회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에이전트.

둘의 관계와 그날의 결과를 모두가 부러워했다.


다음날,

손님이 이른 아침부터 객장을 서성인다는 직원 연락을 받은 에이전트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멀리서 보고 있노라니 둘의 대화 내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귀국행 비행기를 타러 가기까지 아직 만 하루가 남았으니 잔푼으로 게임하면서 시간 때우겠다는 요량인 듯.

잠시 후 얼마의 칩을 들고 테이블에 앉는다.

어느 정도 승리를 거두자 에이전트와 그의 직원에게 팁을 날리는 자비로움이 한동안 이어지다 카지노 순리가 그렇듯 곧장 내리막을 걷는데......

평소 그의 시드머니를 넘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가지만 의외로 해맑은 두 사람.

어카운트에 디포짓 해두었던 쌈짓돈이 바닥나자 에이전트는 주변에 돈을 빌리려 한다.

그 손님의 품행을 좋게 보던 에이전트들이 거리낌 없이 내놓는 돈 1000만 원, 2,000만 원.

쌓이는 빚이 에이전트에 부담될까 걱정한 손님은 방에서 시계를 가져오고, 신줏단지 모시듯 조심스레 상자를 열어 에이전트에게 살짝 보인 후 다시 상자를 고이 닫으며,


"이거 아시다시피 큰맘 먹고 산 거니까 절대 누가 꺼내지 않게 잘 보관해 주세요. 다 잃으면 한국 가서 돈 보내드리고 돌아와서 다시 찾을게요"


고가의 시계 그리고 고귀한 품성.

이에 동한 동료들이 에이전트에게 추가 자금을 선뜻 건넨다.

만 하루의 긴 승부 끝에 시계값 90%에 달하는 금액을 잃고 게임 마무리.

짐을 챙겨 내려온 손님은 변함없이 온화한 목소리로,


"한국 가서 연락드릴게요. 시계 잘 보관해 주시고요. 잘 놀다 갑니다."


손님을 공항까지 배웅하고 돌아온 에이전트의 표정은 근래 어느 때보다 밝았다.

그럴 만도 했다.

딴 돈으로 시계를 샀고, 그 시계를 담보 삼아 게임해서 90%만큼만 잃었으니 팁을 날렸다 해도 손님은 본전 언저리요, 본인은 길게 지속된 게임으로부터 엄청난 커미션 수익을 얻었으니 앞서 시계 살 때 빌려준 돈을 안 받아도 배부른 상태.

숙소로 돌아가는 뒷모습에서마저 그의 행복이 느껴졌다.

꿀 같은 잠을 자고 일어나 시계를 보니 오후 5시 30분, 지금쯤이면 손님이 한국에 도착해 입국 심사대를 지났을 즈음.

설렘을 안고 연락을 기다린다.

저녁 9, 10시


'피곤하시겠지. 주무시고 내일 결재해 주시려나 보다.'


그리고 다음날,

일찍 일어나 혹시 그 사이 연락이 왔는지 핸드폰을 확인해 보지만 아직 소식이 없다.

어느덧 오후 12시, 1시, 2시

핸드폰을 들고 이래저래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주저하다 용기 내어 한 문장 조심스레 보내고 답을 기다려 본다.


"사장님! 잘 도착하셨습니까?"


답이 없다.

긴 하루를 초조하게 보내고 다음 날,


"사장님?"


상대방이 읽지 않았다는 표시 1은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다.

지금의 불안감이 공포, 좌절감으로 변하게 될지 혹은 희망에 덮여 잊힐지 몹시 궁금하고, 답답하고.

기어이 전화 걸어 보기로 한다.

숫자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누르고, 맞는지 확인한 후 통화 버튼을 누르며,


'아! 제발 받아주세요.'


간절한 바람 그리고 들려오는 소리,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주십시오"


이미 수차례 경험한 바 있는 에이전트는 그 안내 음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다.

긴 한숨과 함께 절망하는 에이전트.

신뢰로 맺어졌고 여전히 끈끈하리라 믿었던 관계의 일방적 단절에 급작스러운 상실감, 배신감이 몰려온다.


'그랬던 사람이 이렇게 변했다.'


'그랬던'의 최상과 '이렇게'의 최악, 그 조합이 주는 충격에 몸서리치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차치했던 빚 처리를 고심하다 고이 모셔두었던 시계를 찾아 꺼낸다.

퇴색을 거쳐 사라져 버린 인간관계와 대비되는 변함없이 빛나는 시계.

시계를 들고 매장으로 향한다.

제값의 90% 담보였으니 감가상각에서 오는 손해는 없으리라.

매장 안에서 한참을 머물다 사색이 되어 나온 에이전트.

갑자기 시계를 땅에 내던지는 것도 모자라 수차례 짓밟으며 울분을 토한다.

그리고 카지노로 와서 돈 빌렸던 이들 앞에서 눈물 흘리며 실토한다.


"짝퉁이래요."


골프관광 온 친구에게 시계 자랑하러 간다고 했을 때 굳이 택시로 혼자 가겠다고 했던 까닭이 있었다.

그나마 고급 짝퉁을 파는 그린힐스(Greenhills) 지역에 몰래 가서 자신이 샀던 명품과 똑같은 디자인의 짝퉁시계를 사는 계략.

손님, 아니 손놈은 짝퉁시계를 케이스에 담아 에이전트에게 맡기고, 진품은 가방에 넣어 귀국했던 것이다.


손님이 에이전트와 주변에 심고, 키워서, 이용한 신용과 신뢰 이야기.




신용과 신뢰, 두 단어의 쓰임에는 '쌓다', '얻다', '지킨다', '회복하다' 등의 술어들이 주로 따른다.

그 두 단어와 서술어의 조합을 누군가의 행위로 상상하자니 막상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격언이나 명언에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그 추상적 모호함 때문이다.

관념적, 추상적인 해석은 철학, 예술 논할 때나 필요한 일.

평가, 지수, 거래, 불량 등 금융권에서 자주 사용하는 연관어들과의 조합이 우선 떠오르는 걸 보면 신용, 신뢰 두 단어는 마치 지켜야 하는 관념, 추상적 덕목으로서가 아닌 수치나 통계로 따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금융권에서 고객의 신용과 신뢰도를 숫자로 계산하고 평가하듯 개인과 개인 간에도 같은 기준 적용 즉, 누구를 믿거나 믿게 만드는 데 있어 감정이 아닌 수적 이해득실을 따져 봐야 한다는 말이다.

각 Episode를 다시 살피며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통해 논증하고, 더불어 추가적인 사항도 이어가도록 하겠다.



- Episode 1-


버스표를 빌리기 위해 버스표 한 장을 이자로 제안했다.

상대는 남의 딱한 사정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구두쇠.

인간 본성을 자극해 내게 필요한 뭔가를 이끌어 내겠다는 순수한 생각은 버려야 한다.

일단 한 장 먹이고 보는 거다.

누군가에게 돈을 빌리고 도망가는 나쁜 놈들의 전형적인 전략.

처음 적게 빌리고 상환 시 높은 이자를 지불하며 밀접한 관계로 발전시킨 후 점차 액수를 늘려간다.

상대에게 주는 이익은 남들보다 크게, 상환기간은 짧게.

셈에 밝고, 거래에 폐쇄적인 이들 조차 그 같은 술책성 신용사기에 당하는 비극적 사례를 지난 십수 년간 여러 차례 목격했다.

앞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당시 그 손님이 속해 있던 반에서는 매일 자잘한 도박판이 벌어졌다고 한다.

애들 도박이 그렇듯 충분한 자금력이 뒷받침하면 지지리 복 없는 날 아닌 이상 조금씩 판돈을 올리며 끝에 가서는 판을 제압하기 마련.

뒤를 든든히 버티던 꽁지가 있어 승리할 수 있었고, 그래서 두둑한 이자를 챙겨줄 수 있었다.

물론 그 어디에도 마음 쓰는 일은 없었다.

그저 이익을 주고받으며 유지하는 관계, 그게 바로 신용이라 하겠다.


신뢰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믿음을 사고자 할 때도 마찬가지.

나를 믿게 하거나 누군가를 믿는데 감성적인 사연 따위는 밝힐 필요도, 들어줄 필요도 없다.

어디 지원할 때 내미는 스펙에는 늘 숫자가 따르지 않던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수능 점수·내신성적, 자격증을 따기 위한 점수, 취직을 위한 영어점수·대학 졸업학점.

내가 아닌 남이 인정하는 숫자를 늘리며 나를 향한 믿음을 키우게 만들고, 상대가 보유한 숫자를 파악하여 믿음의 양을 가늠한다.


감성은 버리고, 숫자에 집중하자.



- Episode 2 -


손님 돈 들고 도망가는 카지노 에이전트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오토바이 배달하는 이들을 싸잡아서 딸배라 부르며 얕잡아보는 그 이상의 불신과 증오의 대상이 바로 카지노 에이전트.

그런 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건 손님이 받아들이는 의미는 뻔하다.


"나 돈 벌게 해 주시오."


큰돈을 거래하거나 때로는 돈을 맡기기도 하는 특별한 관계, 그 첫 단추를 구걸로 시작하려 하니 누가 좋아할까?

손님에게 추근대다 퇴짜 맞은 이들과 선택받은 에이전트의 차이는 명확했다.

에이전트는 어떠한 제안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로서의 부담도 주려 하지 않았다.

첫날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관찰하던 에이전트는 손님의 유창한 영어실력을 파악했다. 또 한국에서 사 온 던힐 6mm를 눈여겨봤고, 그새 다 피웠는지 카지노에서 제공하는 담배를 마지못해 피고 있는 장면으로부터 모색을 시작했다.

시나리오 완성 이후 방으로 올라가 던힐 6mm 몇 갑 그리고 애니 타임 자일리톨 밀크 민트 한 주먹을 들고 내려와 가장 똑똑한 여직원에게 지시하기를,


1. 사탕하고 담배를 갖다 드려라.

2. 뭐냐고 물으면 우리 회사 손님들에게 제공하려고 준비해 놓은 건데 보스가 필요한 손님 있으면 누구든 주라 했다고 말해라.

3. 이후 손님이 뭐라 하건 가봐야 한다 말하고 웃으며 자리를 떠라.

4. 손님 테이블에 과일을 보내고, 밖에서 6시간 놀다 다시 돌아가되 절대 그 손님 방향으로 시선을 두지 마라.

5. 담배를 많이 피우는 양반이라 그쯤 되면 몇 가치 안 남았을 테니 곧 너를 찾을 것이다.

6. 그분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대개 돈 주고 사려 한다. 돈을 주려고 하면 절대 받지 말고 이렇게 전해라.

'사실 보스가 주려고 했는데 영업하려고 접근하는 걸로 오해받을까 봐 나를 시킨 거다. pride가 강한 분이라 그런 거 싫어한다. 새벽에 한국 음식이나 다른 필요한 거 있으면 도와드리라고 했다.'

7. 샌드위치로 때우기도 하루 이틀. 조만간 한국 음식을 부탁할 가능성이 크다.

8. 장충동 왕족발 메뉴판을 보이며 고르게 하고 너희 식사도 주문하되 반드시 삼겹 김치찜도 시켜라.

9. 배달이 도착하면 네가 계산하고, 식사를 차린 뒤 나한테 문자를 보내라. 그리고 손님을 불러 함께 먹어라.

10. 절대 돈 받지 말고, 억지로 주려고 하면 차라리 내일 밥을 사라고 해라.

11. 혼자 필리핀 와서 도박하는 한국 남자들 대부분은 필리핀 젊은 여자에게 지극히 호의적이니 긴장할 필요 없다.

12. 미안하지만 오늘은 조금 늦게까지 일해라.


식사를 하다 자신이 내려온 걸 보고 급히 일어나 인사하는 직원들을 향해 웃으며 고개 끄덕인 에이전트는 그대로 그들을 지나쳐 10여 미터 떨어진 테이블에 앉아 일하는 척했다.

직원에게 물어봤는지 식사를 마치고 에이전트에게 다가와 자초지종 설명하며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손님.

불패의 카드 삼겹 김치찜을 소재 삼아 긴 대화의 서막이 열리고, 결국 그는 손님을 통해 수익을 얻었다.

새로운 관계 형성.


내가 정의하는 사회생활에서의 신뢰는 관계의 한 가닥에 불과하다.

마음이라는 포장지에 싸서 건넨 물건과 서비스.

손님이 순진하다면 마음을 받았다는 느낌일 것이요, 다분히 계산적인 성향이면 이익을 얻었다며 좋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 있어 유형의 재화가 존재했다.

즉, 양 당사자가 바라고 얻는 유형의 재화로부터의 만족 평형, 그게 바로 신뢰의 본질이다.


지겹도록 듣는 그놈의 '한미 동맹의 굳건한 신뢰관계 구축'

그 표현이 오고 가는 시기 앞뒤로 양국 사이에는 모종의 합의나 협상이 있었다.

많이 배운 사람들, 고위직에 계신 분들이 떠들고 써먹는 신뢰는 그런 모양이다.

그들과 대척의 위치에 있는 에이전트가 물질과 서비스를 마음의 포장지로 싸서 건네고 이룬 신뢰관계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요컨대 사회생활에서의 상호 발전을 위한 원만한 신뢰관계는 서로의 이해득실을 감안하여 추구하고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오래간다.

반면 마음을 주고 이익을 얻거나, 그 역이거나, 마음으로 마음을 얻고자 하는 순진한 신뢰관계는 인간 감성의 총체, 사랑·우정에 해당하며 사업적 신뢰관계와는 철저히 구분 지어야 한다.




- Episode 3 -


누군가 내게 돈을 내밀며 말했던 "숫자에 마음을 담았다"라는 미사여구.

내가 받은 건 돈이었다. 그 안에 마음이 있기는커녕 마음 냄새도 나지 않았다.

하긴 자선단체에 기부할 때는 숫자에 마음을 담아야 할 듯.


여야 정치인들이 민생법안에 적용할 숫자를 놓고 싸우며 언론에 나와 국민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는 양 뱉어내는 주장에서 어떠한 마음도 느껴지지 않는다. 지지율을 높이거나 표를 얻기 위한 레토릭, 쇼맨십의 대향연으로 여겨질 뿐이다.

한편 사안이 무엇이며 얼마나 시급한지 그리고 어느 정도의 수치가 적당 한 지에 관한 숙고 없이 그저 한 편에 서서 그들이 주장하는 수치를 옹호하고 다른 편을 비난하는 정치충들.

사안에 관한 정확한 이해와 논리 없이 분노와 환희의 감정으로 써 내려가는 그들의 댓글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

누구의 편에 서는 게 우선이 아니라 사안의 명확한 인식과 그에 타당한 수치를 찾는 노력이 핵심이다.

그러니 편이 되어 수를 결정하는 역행을 저지른 에이전트와 정치충 모두 같은 실수를 범했다고 하겠다.

에이전트는 특히 심각했다.

편이 되기로 한 이유에도 숫자가 있었으니 말이다.

앞서 사업적 신뢰관계와 순진한 신뢰관계를 구분하며 사랑·우정을 논했고, 숫자에 마음을 담는다는 표현을 인용했다.

비즈니스에 사랑이 웬 말인가?

내게 돈 벌게 해주는 대상이면 그만큼의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걸로 족하다.

팁에 감사하고 친절이 감동이었다 하여 이를 신뢰로 받아들이고, 보답으로 숫자로서 마음을 전하려 했던 어리석음.

그게 바로 에이전트의 가장 치명적 실수라 하겠다.

친절한 손님이 나를 택했고, 주변 동료들 모두 부러워했으며, 계속 나를 찾아주는 걸로 미루어 나를 가장 신뢰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착각, 그 착각의 주문을 자신에게 걸어 자신 역시 손님을 무한 신뢰하게 만드는 자작극의 주인공을 자처했으며 그로 인해 감당하기 벅찬 피해를 떠안아야 했다.

무형의 감정을 감정으로 답하고, 유형의 재화를 재화나 서비스로 적절히 답하는 분별적 계산이 부재했음이 틀림없다.

다시 말해 주도면밀한 계획범죄를 피하기 쉽진 않았겠지만 자신이 잘못 정의한 신용과 신뢰로 이미 여러 차례 금전사고를 당한 이후 새로운 손님을 만났고, 그 관계와 얻은 수익의 깊이·크기에 맞게 수치·통계를 감안해 돈을 빌려주던 계산방식을 지키지 못한 건 명백한 실수다.

(여기서 수치와 통계는 에이전트들이 손님의 대여액을 결정하는 나름의 지표로, 지금껏 이 손님을 통해 얼마를 벌었고, 지금 남은 여유자금은 얼마이며, 사고가 나도 감당할 수 있을 만한 피해인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한 적정 대출 금액 산출 기준이라 보면 된다.)

담보로써 시계?

카지노에서 시계 맡기고 돈 빌리는 경우는 허다하다.

마카오나 강원랜드에 전당포가 괜히 많은가?

몇 명 거쳐 물으면 필리핀 짝퉁시계 구별할 만한 이 찾는 건 일도 아니다.

손님을 깊이 신뢰해서 그리고 손님이 나를 신뢰한다고 굳게 믿어서 꺼내지 말라는 부탁을 철석같이 따르고, 하루가 지나도록 직접 열어 확인하지 않은 사람은 뭘로 당해도 당할 운명.

손님을 믿고 또 손님의 가짜 담보를 믿으며 대여 금액을 키우는 동시에 일방적 신뢰를 키운 당사자가 바로 에이전트다.

받은 만큼의 신뢰가 아니라 준 만큼의 신뢰였기에 더 어리석게 느껴진다.




대학교 첫 동아리 MT.


집에 돌아가기 전 각자의 이름이 적힌 A4용지를 돌리며 서로의 감정을 전하는 롤링페이퍼에 선배, 동기들이 내게 남긴 글을 재미있게 읽다 무뚝뚝한 선배가 남긴 짧은 문장에 깊이 감명받았다.


"너만 믿는다."


'그간 많은 대화를 나눈 건 아니지만, 다행히 나를 좋게 보셨나 보다.'


그 선배에게 잘하려고 했다.

커피도 뽑아드리고, 생전 가지도 않던 도서관 자리도 대신 맡아드렸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된 사실,

그 양반은 1학년 꼬꼬마들 모두에게 '너만 믿는다'를 시전.

순진한 내가 바보였다.

'너만 믿는다' 다섯 글자에 감명받았다면 다음 MT 때 '형만 믿어요'로 갚았으면 될 일.

나만 믿는다는 선배, 버스표를 빌려준 친구, 선택받은 에이전트, 사기 친 손님.

잘 사는 사람, 돈 많이 버는 사람, 나쁜 사람.

그들이 만들어가는 신뢰관계의 본절은 지극히 계산적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늘 좋은 결과를 가져다준다.


무형은 무형으로, 유형은 재화나 서비스로 답하는 분별적 계산으로 양측의 만족 평형을 유지하는 합당한 신용, 균등한 신뢰관계를 쌓아가든지, 무형이나 유형의 것을 크고 아름답게 포장해 가짜 신용, 신뢰관계를 구축해 더 큰 유형의 것을 얻어내든지, 생활에서, 사업에서의 적용과 책임은 각자의 몫


부디 당하지는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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