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스 메르틴의 아비투스 리뷰

by 잉여력만렙 휴미씨

마르크스는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했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한다고 믿지만, 선택의 배후에는 이미 환경, 출신, 교육, 관계망이 자리 잡고 있다. 즉, 개인의 의식조차 계급적 구조에 의해 만들어진다.


문제는 현대 사회가 마르크스가 전제했던 자본가와 노동자의 이분법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마르크스의 계급론을 ‘아비투스’라는 개념으로 확장했다.


아비투스(Habitus)는 말 그대로 습관(Habit)인데, 부르디외는 이 습관을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사회적, 계급적, 집단적, 역사적으로 축적된 행동양식의 총합으로 설명한다. 또한 마르크스와 달리 자본을 경제 자본, 문화 자본, 사회 자본, 상징 자본의 4개의 영역으로 확장하며 이 네 가지 자본이 서로 얽혀서 계급을 만들어내고, 그 계급이 다시 개인의 아비투스를 규정한다고 보았다.


부르디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대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Field)’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장’이란 쉽게 말해 계급이 작동하는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규칙을 뜻한다. 경제, 교육, 예술, 정치 같은 영역은 겉으로 보기엔 서로 완전히 다른 세계지만 각각 고유한 규칙과 권력 구조를 가진 독립된 장이다.


경제장에는 돈의 규칙이 있고, 교육장에는 학력과 말투의 규칙이 있고, 예술장에는 취향과 감식안의 규칙이 있으며, 정치장에는 상징 자본과 영향력의 규칙이 작동한다. 각 장은 일정한 게임의 법칙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자본의 구성과 아비투스에 따라 어떤 장에서는 강자가 되고 어떤 장에서는 약자가 된다.


예를 들어 경제 자본이 풍부한 사람은 경제장에서 우위를 점하지만 문화 자본이 부족하다면 예술장에서는 힘을 쓰지 못한다. 학력과 언어 감각이 높은 사람은 교육장에서 유리하지만 사회 자본이 없다면 정치장에서 영향력을 갖기 어렵다.


이처럼 각 장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각자 다른 규칙으로 인간을 배치하는 계급의 무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은 단지 하나의 장에만 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동시에 여러 장을 드나들며, 그때마다 다른 규칙에 의해 평가되고 위치가 정해진다.


부르디외는 이 다층적 장의 구조 때문에 현대 사회의 계급이 더 복잡하고, 그만큼 아비투스가 계급 재생산에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개념은 뛰어나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구조적이고 냉정하다. 출신과 계급이 행동양식을 결정하고, 그 행동양식이 다시 계급을 재생산한다는 그의 분석은 현대 사회의 불평등을 날카롭게 드러내지만 개인에게는 거의 아무런 탈출구도 제시하지 않는다.


이 지점을 메우려 한 사람이 바로 독일의 커뮤니케이션 학자 도리스 메르틴이다. 메르틴은 『아비투스』라는 제목을 동일하게 사용하면서도 부르디외의 개념을 그대로 가져오지 않는다. 아비투스를 계급 재생산의 구조가 아니라 개인이 성장 과정에서 개발할 수 있는 태도, 언어, 감각의 묶음으로 재해석한다.


그녀의 접근은 부르디외의 냉정한 분석과 달리 훨씬 따뜻하다. 태도는 연습될 수 있고 품격은 습관으로 만들어지며 말투는 훈련으로 바뀔 수 있고 지식 자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며 자기 세계를 설계하는 능력은 후천적으로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구조가 개인을 규정한다는 부르디외의 견해를 개인의 태도와 능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방향으로 전환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메르틴의 책은 읽을 때 부르디외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희망적이고, 실천적이다.


다만, 한 가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녀의 조언은 대부분 상류층의 행동 양식을 따라 하라는 방향으로 귀결된다. 부르디외가 처음에 지적했던 구조적 장벽은 그대로 둔 채 그저 상류층의 스타일을 모방하게 만드는 셈이다.


나는 여기서 필요한 것은 계급의 문법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계급의 바깥에서 ‘나만의 역할’을 새롭게 설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 지점에서 의미 있는 대안이 바로 융(C.G. Jung)의 페르소나(Persona) 개념이다.


페르소나는 흔히 가면으로 번역되지만 융이 말한 페르소나는 단순한 위장이 아니다. 페르소나는 개인이 사회적 상황에 따라 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역할의 틀’이며 출신 계급이나 아비투스에 의해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선택과 방향성에 따라 구성되고 변화한다.


부르디외가 말하는 아비투스가 출신이 만든 무의식적 패턴이라면, 융의 페르소나는 내가 선택한 의식적 구조에 가깝다. 그리고 이 선택 가능성이야말로 현대의 개인에게 필요한 자유의 근거이다.


결국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은 나만의 페르소나이자 나만의 세계관이다. 그 세계관이 바로 타인의 계급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나 자신의 아비투스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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