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어라, 너 이미 아름답구나
16세기에 연금술사 파우스트(1480-1541)가 있었다. 기이한 행적으로 주목을 받았으나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고 하는 이 떠돌이 박사는 이후 다양한 전설과 소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가 그를 자신과 동시대 인물인 “그 파우스트”로 부활시켰다. 괴테는 옛 이야기에 신의 한 수를 더했는데 파우스트에게 악마 메피스토를 짝으로 붙여준 것이 그것이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갖고도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간 파우스트와 그의 영혼을 얻고자 인간의 수족이 되기로 자처한 악마의 동행. 괴테는 그 둘의 동행기를 ‘비극’이라 칭했다.
메피스토, 신의 한 수
파우스트는 고전적인 모든 것을 통달한 인물이다. ‘이 세계를 가장 내밀한 곳에서 통괄하는 힘’을 알기 위해 철학과 법학, 의학과 신학까지 섭렵한 노년의 학자는 심지어 자연의 정령을 불러내는 어둠의 마법까지 섭렵했다. 그러나 애써 불러낸 정령이 그를 무시하고 사라져 버리자 노인은 절망에 빠진다. 그를 동경하는 제자도, 세상의 칭송도 덧없었다. 숭고한 지식을 탐하던 열정이 꺾이자 파우스트는 거리의 젊은이들의 웃음과 쾌락이 부러웠다. 그러나 이미 노쇠한 노인에겐 죽음만이 최선처럼 느껴진다.
그런 그에게 메피스토가 나타난다. 애꿎게도 악마는 절망한 이에게 계약을 제안한다. 현세에서 당신의 종이 되어 모든 것을 들어주겠다. 다만 당신이 어느 순간에 집착하게 되면 그의 영혼을 가져가겠노라고. 도무지 만족스런 현실을 만날 것 같지도 않고 죽은 이후의 삶에도 관심이 없는 파우스트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파우스트: 내가 순간을 향해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라고 말한다면, 그땐 자네가 날 결박해도 좋다. 나는 기꺼이 파멸의 길을 걷겠다!
그런데 메피스토에겐 파우스트가 모르는 계약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신과의 계약이 그것이다. 메피스토는 천상의 신을 만나 농담처럼 투덜거린다. 세상의 인간들이 너무 괴로운 삶을 살고 있어 “나 같은 악마도 괴롭히고 싶지 않다”고. 신은 그런 메피스토를 다음과 같이 다독인다.
주님: 그(파우스트)가 지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네가 무슨 유혹을 하든 말리지 않겠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까. (…) 인간의 활동력은 너무 쉽사리 느슨해져, 무조건 쉬기를 좋아하니, 내가 그에게 적당한 친구를 붙여주고자 함이니 그를 자극하고 일깨우도록 악마의 역할을 다 하거라.
신은 절망에 빠진 인간에게 천사가 아닌 악마를 보냈다. 신이 파견한 악마, 그가 파우스트가 살아갈 수 있게 돕는다. 마법이라는 힘을 더해주고, 인간 욕망을 자극하여 원하는 모든 것을 갖게 한다. 이 때문에 어떤 연구자들은 메피스토가 인간의 욕망을 형상화한 인물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아마도 인간의 욕망이 천박하고, 위험하지만 동시에 달콤하고 매력적인 악마와 같은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만약 우리의 욕망이 그러하다면 우리의 삶은 비극이다. 파우스트가 그러했듯이.
사랑스런 소녀는 죽고 아름다운 과거는 사라졌네
파우스트는 비극이지만 사실 유쾌하다. 파우스트가 마법의 약을 먹고 다시 젊어지고 고대와 중세의 시공간을 떠도는 모습은 판타지에 가깝고, 메피스토의 재담은 풍자와 질펀한 농담을 오가며 웃음을 유발한다. 게다가 굵직한 연애 사건이 두 번이나 나온다. 그 첫 상대는 순진한 소녀 그레트헨이었다.
파우스트: 이봐, 저 처녀를 내 손에 넣게 해주게!
메피스토: 어떤 아이 말인가요? (…) 저 애요? 그 아이는 신부에게 가서 모든 죄를 용서받고 오는 길이지요. (…) 저런 아이에게는 나도 힘을 쓸 수 없다구요.
악마는 투덜거렸지만 파우스트가 그녀의 연인이 되어 그레트헨과 하룻밤을 보내는 순간까지 이끌어 준다. 그러나 그 결과 그녀는 죄인이 되어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나중에 그것을 알게 된 파우스트는 메피스토에게 화를 내며 감옥으로 달려가지만 그녀의 죽음을 막을 순 없었다. 방황하는 청년은 지나가는 사랑의 무게를 알지 못했다.
그런 청년이 세월을 보내고 다른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헬레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자 트로이 전쟁의 불씨가 된 바로 그 여인이다. 파우스트의 마음이 헬레나를 보자 다시 뜨거워졌는데 이전과는 양상이 좀 달랐다. 그레트헨에 대한 사랑이 순진한 청년의 자연스런 욕망이었다면 헬레나를 향한 사랑은 영혼을 고양시키고 숭고함을 맛보려는 감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헬레나는 단순한 여인이 아니라 고전적이고 이상적인 아름다움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파우스트: 난 경직된 상태에서 행복을 찾지는 않겠다. 놀라움이란 인간의 감정 중 최상의 것이니까. 세계가 우리에게 그런 감정을 쉽게 주지 않을지라도 그런 감정에 사로잡혀보아야, 진정 거대한 걸 깊이 느끼리라.
그의 소망은 메피스토의 도움으로 이루어진다. 파우스트는 중세시대의 영주가 되어 헬레나와 가정을 이루고 아들 오이포리온까지 두고 단란하게 살았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아들이 하늘을 날다 추락하여 죽게 되자 헬레나는 괴로운 마음을 안고 지하세계로 사라진다.
오이포리온의 추락과 헬레나의 소멸은 괴테의 시대(18세기)를 생각하면 역사적 비유로 읽혀진다. 고대의 정신은 중세에 부활해 문예부흥(르네상스)이라는 자식을 얻었으나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으로 요동치는 유럽에서 그 위상은 추락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개발과 발전이라는 단어가 손댈 수 없는 목표처럼 등장한 근대가 시작된 것이다.
노력하는 인간의 방황과 비극
파우스트: 연이은 파도는 힘에 넘쳐 그곳을 지배하지만, 물러간 뒤엔 아무것도 이루어진 게 없다. 그것이 날 불안케 하고 절망으로 이끌었도다! 이 참을성 없는 원소의 맹목적인 힘이라니! 그리하여 내 정신은 감히 비약을 시도하려는 것. 여기서 나는 싸우고 싶다. 이것을 이겨내고 싶다.
다시 노년에 이른 파우스트는 높은 산에 올라 이렇게 말한다. 그는 이제 자연과 싸우고자 한다. 바다를 간척하여 자유로운 인간들이 행복하게 사는 땅을 만드는 게 그의 꿈이다. 성장과 개발의 꿈은 이렇게 순진한 사랑과 숭고한 이상을 잃어버린 시대에 등장한다. 인류애라는 고상한 이름을 갖고서. 그런데 그 사랑이 좀 위험했다.
개발과정에서 바닷가에서 행복하게 살던 노부부가 죽게 되고 부부를 찾아갔던 나그네도 인부들에게 살해된 것이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파우스트는 메피스토에게 “바꾸려고 했지, 빼앗으려던 게 아니었다.”고 소리를 친다. 마치 자신은 예상치 못했다는 듯이.
파우스트의 행위는 늘 의도와 빗나간 결과를 불러온다. 이것이 악마의 손을 빌어 행위 하는 자의 비극이다. 그리고 이는 아마도 목표에 눈이 멀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힘을 얻어 행동하는 모든 인간의 비극일 것이다. 그런 인간의 전형 파우스트는 삶의 끝에 ‘근심’을 만난다.
근심: 인간이란 한평생 앞을 보지 못하니, 파우스트, 당신도 이제 장님이 되세요.
파우스트는 그렇게 장님이 된다. 지식과 기술, 사랑과 권력 그 모든 것을 이루려 했던 인간이 아무 것도 알아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되자 파우스트는 자기 무덤을 파는 소리를 제방을 쌓는 소리로 착각하고 소리친다.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그는 눈이 멀고서야 비로소 방황을 멈추고 존재하는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한 순간이 그를 악마가 아닌 구원으로 이끌었다. 평생에 걸친 그의 눈먼 노력이 아니라, 근심 속에서 엉뚱하게 도달한 만족의 순간이 그를 평화롭게 한 것이다. 악마를 보내기 전 신은 그의 방황을 보며 생각했을지 모르다. <멈추어라, 너 이미 아름답구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