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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윤숙 Dec 02. 2019

호메로스, 오디세이아

고생이 많았던 그 사람의 복수는 어떻게 끝났을까?

오디세우스 두상, 기원전 2세기


오디세우스, 그 사람에겐 사연이 많았다. 젊은 아내와 젖먹이 아들을 두고 트로이로 떠나 10년 동안 전쟁을 치렀고, 목마를 만들어 성을 함락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런 오디세우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 [오디세이아]에서 호메로스는 그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고통’이란 단어를 선택했다. 그러나 10년 동안의 트로이 전쟁은  오디세우스의 고통에 들어있지 않았다. 전쟁은 영웅이 자신의 힘과 지략을 많은 이들에게 뽐내는 무대였다. 그의 가족과 온 그리스가 그의 활약을 알고 있었다. 그런 시간은 영웅에게 고통이 아니었다. 그의 고통은 고향에 생사를 알리지 못한 채 감춰져 있었던 그 후 10년의 세월이었다.      


기억의 저편, 괴물들의 바다와 유토피아     


트로이에서 귀향하던 배가 표류하면서 오디세우스의 함대는 인간 세상 밖으로 밀려났다. 그곳에는 사람을 산채로 잡아먹는 거인 키클롭스가 있고, 바람을 주관하는 신의 거처와 태양신의 섬이 있고, 인간을 동물로 만들어 잡아두는 키르케가 산다. 그들은 모두 각자의 섬에 사는데 그 섬들을 갈라놓는 바다엔 뱃사람들을 유혹하는 세이렌, 괴물 카리브디스와 스킬라가 있다. 이렇게 스펙터클한 모험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의외로 고요하다.


오디세우스가 처음 도착한 곳은 로토파고이족이 사는 섬이었다. 그들은 채식을 하며 소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로 정탐 나간 오디세우스의 전우들을 환대하며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그런데 그들이 오디세우스에겐 괴물들만큼이나 위험한 존재였다. 그들이 준 술, 로토스가 모든 것을 잊게 만드는 망각의 술이었기 때문이다. 로토스를 마신 사람들은 행복감에 취해 과거도 잊고 미래에 대한 계획도 잊고 그 순간에 그대로 머물기를 바랐다. 현재를 즐기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에 취한 사람들이 사는 땅. 그곳은 오디세우스의 정착지가 아니었다. 그는 부하들을 억지로 끌고 나와 다시 항해를 시작한다.


오디세우스는 행복과 기억을 바꾸지 않는다. 고통스러운 과거를 끌어안고 하루하루를 살다가 때론 행복하게 추억을 회상하고 때론 나는 누구인가 고민하며 미래로 나아가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기억을 포기한다는 건 인간이길 포기한다는 것과 같았다. 그는 그렇게 기억을 부여잡고 신과 괴물들이 공존하는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 여행의 끝에 칼립소를 만난다.


Gerard de Lairesse, 1670, 칼립소와 함께 있는 오디세우스 - 여신을 품에 안고 있으면서도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헤르메스가 신들의 결정을 알리러 내려온다.


세상의 끝, 인간도 신도 오지 않는 요정 칼립소의 섬에 풍랑으로 부하들을 모두 잃고 간신히 혼자 살아남은 오디세우스가 도착했다. 섬은 신이 감탄할 만큼 풍요로웠고, 그녀는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오디세우스는 그런 요정과 8년을 살았다. 그동안 오디세우스는 무얼 했을까? 그는 틈만 나면 바닷가로 나가 먼 곳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유토피아에 여신과 함께 있어도 그는 고향을 생각하고 가족들을 그리워했다.


칼립소는 그리스어로 감춘다는 뜻이다. 그녀는 오디세우스를 인간들의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숨겨 버렸다. 그는 인간 세상에서 사라졌고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아닌 상태로 머물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기억하기 위해 행복한 망각의 섬을 떠났다면, 기억되기 위해 고립된 유토피아를 떠나야 했다. 오디세우스는 여신에게 말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귀향의 날을 보기를 날마다 원하고 바란다오. 설혹 신들 중에 어떤 분이 또다시 포도줏빛 바다 위에 나를 난파시키더라도 나는 가슴속에 고통을 참는 마음을 갖고 있기에 참을 것이오.     


다행히 신들의 왕 제우스는 그의 귀향을 결정했고 오디세우스는 뗏목을 만들어 여신이 사는 낙원을 떠난다. 그리고 파이아케스족의 나라를 거쳐 이타케로 귀향한다.      



정당한 속임수와 부당한 정직     


[오디세이아]의 한편에 귀향하는 자의 모험이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기다리는 자의 고난이 있다. 페넬로페는 남편이 없는 가정을 20년 간 지키며 오디세우스를 그리워했고, 그의 아들 텔레마코스는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의 소식을 기다리며 성인이 되었다. 오디세우스의 아버지, 돼지치기와 가정부가 그를 기다렸다.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는 오디세우스의 생사를 몰라 장례도 치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죽은 자에 대한 예의, 장례는 그리스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 한 무리의 청년들이 그런 예를 무시하고 오디세우스의 집에 드나들며 소란을 피웠다.


청년들은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이었다. 그들은 페넬로페가 그들 중 한 사람을 남편으로 선택할 때까지 떠나지 않겠다고 버티며 오디세우스의 집에서 술과 고기를 먹고 마시며 파티를 벌였다. 오디세우스는 그렇게 고향을 열망했건만 이웃은 그의 아내와 재산을 탐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시간을 견뎌낸 사람이 페넬로페다.


남편이 죽지도 않았는데 결혼을 하면 여인으로서 불명예를 안게 된다. 그렇다고 구혼자들이 허구한 날 음식을 축내게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그것은 오디세우스 것이자 아들에게 물려줄 재산이었다. 게다가 텔레마코스는 장성하여 그동안 참아왔던 분노를 터뜨리기 직전이었다. 아들이 혼자 그들과 싸우려 들면 위험할 것이다. 자신의 명예와 아들의 안위, 재산을 모두 지켜야 한다. 그 상황에서 그녀가 생각해 낸 방법은 거짓말이었다.


Waterhouse, 1912, 페넬로페와 구혼자들-페넬로페는 꽃과 노래와 금품으로 그녀의 환심을 사려는 구혼자들에게 등을 돌리고 시아버지의 수의를 짠다는 핑계로 시간을 벌었다


페넬로페는 구혼자들에게 시아버지의 수의를 완성할 때까지만 기다려달라고 말한 뒤 낯에는 옷감을 짜고 밤에는 실을 풀어가며 구혼자들을 속였다. 그렇게 삼 년이 지났을 때 구혼자들과 한편이 된 하녀들이 그녀의 행동을 고자질했다. 정당한 속임수와 부당한 정직이라는 아이러니! 이런 아이러니는 보편적 가치가 무너진 사회에서 발생했다.


그런 사회에서 거짓말은 나쁜 사람에게만 쓰는 전략이 아니었다. 페넬로페는 흉터를 보여주며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오디세우스를 믿지 않고 거짓말로 시험한다. 거짓말을 하는 그녀에게 화가 난 오디세우스는 둘만이 알고 있는 추억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제야 페넬로페는 남편을 끌어안고 입을 맞춘다. 그녀가 기다렸던 사람은 자신과 추억을 공유하는 바로 ‘그 사람’이었던 것이다.      



신이 인정한 복수와 멈춰야 하는 전쟁      


바다 저편으로 사라졌던 오디세우스는 그렇게 귀환해 가족을 만났다. 그러나 큰 문제가 남았다. 마당을 가득 채우고 술판을 벌여 온 수십 명의 구혼자들과 그동안 자신을 모욕하고 가족을 괴롭혔던 하인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단순한 귀환을 넘어 오디세우스는 원한을 해결해야 했다. [오디세이아]의 결론은 몰살이었다. 밖에선 축제가 한창인 날, 덧문을 잠근 오디세우스의 집에선 살육이 벌어진다. 오디세우스 일행은 수적으로는 열세였지만 여신 아테네가 그의 편이 되어 주었다. 구혼자들의 목숨은 칼과 활로 거두었고 주인을 배신했던 하녀 열두 명은 목을 매달았다.


구혼자들에게 화살을 쏘는 오디세우스, 기원전 5세기

자비는 없었다. 대신 도덕적 정당함이 있었다. 신을 경외하는 자들이라면, 즉 인간이라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던 나그네를 환대하고 죽은 자와 그 가족을 존중해야 했다. 구혼자들은 오랫동안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불문율을 어겼다. 그 때문에 오디세우스는 구혼자들이 ‘신들이 정한 운명과 자신들의 못된 짓에 의해 제압’되었다고 말한다. 개인적인 피의 복수를 넘어선 신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처형. [오디세이아]는 그렇게 고통받았던 한 가정의 원한을 해결하는 장면에 신의 심판을 개입시킨다. 하지만 그다음이 문제이다.


죽은 구혼자들에게도 가족이 있었다. 그들이 복수를 위해 오디세우스와 전쟁을 벌일 것이다. 고대엔 가족을 죽인 사람에게 복수하는 것이 남은 사람의 의무였다. 지혜의 신 아테네는 이 문제로 고민에 빠졌다. 이에 신들의 아버지 제우스가 해답을 내놓는다.     


고귀한 오디세우스가 구혼자들에게 복수한 다음에는 양 편이 굳은 맹약을 맺게 하고, 그가 언제까지나 왕이 되게 하라. 우리는 그들이 아들들과 형제들의 살육을 잊게 해 주자꾸나. 그리하여 그들이 이전처럼 서로 사랑하게 되어 그들에게 부와 평화가 충만하게 해 주어라!     


살육을 멈추고 부와 평화를 생각하라! 가히 신적인 결론이 아닐 수 없다. 느닷없이 등장하는 신은 고통받았던 이들의 폭력에 면죄부를 주었다. 그러나 더 이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디세우스가 창을 들고 자신에게 몰려온 구혼자들의 가족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는 폭력에 감염되어 멈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앞에 제우스의 천둥이 내리쳤다. 그리고 아테네의 목소리가 들린다. “더 이상 피를 보지 말고 지체 없이 갈라서도록 하라.” 신은 억눌린 자들의 복수를 인정했지만 폭력의 한계를 분명히 했다. 그러자 양쪽은 모두 칼을 내려놓고 다툼을 그쳤다.


순식간에 찾아온 평화. 그것이 신화 밖에서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오디세이아]는 마지막 한 문장으로 힌트를 준다. “아테네가 마침내 양편이 서로 맹약을 맺게 하니 그녀의 생김새와 목소리가 멘토르와 같았다.” 멘토르는 오디세우스가 없는 동안 가족들에게 지혜를 보태주고 무례한 구혼자들을 향해 그만두라고 설득했던 도시의 원로이다. 그가 모두에게 전쟁을 멈추라고 설득한다. 그러자 이타케 사람들이 모두 그 말을 들었다. 다행히 그들은 현자의 목소리를 신의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우리에게 그런 현자가 있을까? 아마도 도시 전체를 향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현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소외된 사람과 공감하고 인간됨을 고민해 왔던 당신이라면 작은 지혜를 보태 비난이나 비꼼 없이 평화의 메시지를 보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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