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의 피, 영웅의 눈물
갑질 하는 왕에게 화가 난 청년이 있었다. 여신 테티스와 퓌티아의 왕 펠레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그리스 최강의 전사 아킬레우스가 바로 그 청년이다.
철없는 청년 때문에 고생하는 어른도 있었다. 철부지 동생 파리스로 인해 전쟁이 시작되었기에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나아가 싸워야 하는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Ilias B.C. 800년경)는 이렇게 상반된 두 인물을 중심으로 인간이 자기 한계를 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분노의 소원, 잔혹한 성취
그리스 군의 총서령관 아가멤논 왕에겐 전리품으로 얻은 크뤼세이스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런데 그리스 군을 위해 그녀를 돌려보내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그것을 누가 왕에게 건의할 것인가?
아킬레우스가 앞장서 그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그의 말이 아가멤논의 자존심에 상처를 냈다. 빼앗긴 여인이 아니라 자존심이 문제였다. 왕은 어쩔 수 없이 크뤼세이스를 돌려보냈으나 대신 아킬레우스의 여인을 빼앗아갔다. 자신의 지위를 내세워 손상된 명예를 보충했던 것이다. 군대보다 다스리기 어렵고, 적군보다 제압하기 어려운 것이 청년의 마음인데 아가멤논은 그것을 무시했다.
청년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아킬레우스를 대표하는 수식어는 '발이 빠른'이라는 말이다. 발이 빠르다는 것은 그의 젊음과 속도, 전투력을 상징하는 동시에 빠르게 치솟는 분노가 그를 대표하는 정서라는 걸 암시한다. 분노에 사로잡힌 전사는 소리쳤다.
그대, 파렴치한 철면피여! ……. 내 명예의 선물을 그대가 몸소 빼앗아 가겠다고 위협하다니! ……. (나는) 그대와 동등한 선물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소. 치열한 전투의 노고를 더 많이 감당해낸 것은 내 팔이었지만 분배할 때에는 그대의 선물이 월등히 컸소. ……. 그대를 위하여 부와 재물을 쌓아줄 생각은 추호도 없소이다.
전사의 파업 선언! 분노는 불처럼 타올랐고 동시에 얼음처럼 단단했다. 아킬레우스는 그리스 군이 자신에게 명예를 돌려주기 전까지 쓰디쓴 패배만을 맛보길 바랐다. 그는 어머니 테티스를 통해 제우스에게 청원도 했다. 제우스는 아킬레우스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마음을 정했고 그대로 이루어졌다.
아가멤논을 비롯한 이름난 장수들은 거의 부상을 입었으며 함선은 불타올랐고 트로이 군은 계속해서 기세 등등하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아킬레우스는 그리스 군의 패주를 보며 잔인하게 웃었다. 그러나 제우스의 뜻은 누구에게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어머니! 과연 올륌포스의 제우스께서 그렇게 이루어주셨어요. 하지만 그것이 제게 무슨 득이 되겠어요. 제가 제 모든 전우들보다도 더, 아니 제 머리만큼이나 사랑하는 전우 파트로클로스가 죽었으니 말예요.
아킬레우스는 울부짖었다. 소원은 이루어졌으나 목숨보다 소중한 전우 파트로클로스가 죽었다. 그의 분노는 이제 파트로클로스를 죽인 헥토르를 향해서 달려간다.
두려움을 아는 전사의 도전
아킬레우스가 앞뒤 안 보고 달려가는 청년의 전형이라면 헥토르는 생각할 것이 많은 성숙한 어른의 전형이다. 그는 늘 고려해야 할 것이 많았다. 풍요로운 성을 가진 왕가의 장남인 헥토르는 가족과 백성 모두에게 마음을 썼다. 그의 말과 행동에는 가족과 성 안에서 슬퍼할 여인들을 향한 애처로운 마음이 담겨있다. 그는 매일같이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으나 그리스 전사들처럼 승리에 미친 사내가 아니었다. 지킬 것이 많기에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용기를 내어 매일 싸울 뿐이다.
저를 위해서라면 꿀처럼 달콤한 포도주를 가져오지 마세요. 그러시면 제가 힘이 빠져 투지를 잃게 될까 두려워요. 게다가 손도 씻지 않고 제우스께 반짝이는 포도주를 부어드리기가 두려워요.
치열한 전투 사이, 잠시 집에 들렀을 때 헥토르는 자신을 걱정하는 어머니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자신도 약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신이 언제든 자신의 무훈을 멈추게 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이렇게 성실하고 침착하고 두려움을 아는 전사는 쉽게 무너뜨릴 수 없다. 그런데 복수를 하겠다고 달려드는 아킬레우스를 보자 그가 달라졌다.
헥토르는 모든 트로이 군이 성안으로 피해 달아났는데도 혼자 성문 앞에 버티고 서서 아킬레우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뒤로는 자신을 향해 성으로 피하라고 외치는 아버지의 절규가 들리고 앞으로는 전쟁의 신과 같이 달려오는 아킬레우스가 있다. 그 사이에서 헥토르는 생각한다. 친구의 조언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도 하고, 자신의 명예를 생각하기도 한다. 혹시 협상을 통해 싸움을 멈출 수 있지는 않을까 기대도 해본다. 그러다 아킬레우스가 가까이 보이자 '어찌나 떨리는지 감히 그 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성문을 뒤로하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헥토르는 끝까지 인간적이다. 그는 아킬레우스를 피해보려고 성을 세 바퀴나 돌았다. 그러나 결국 돌아서서 결전을 치른다.
신중한 전사의 무모한 선택! 호메로스는 그것을 '운명'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운명이란 지금까지 자신이 갖고 있던 습성을 버리는 특별한 선택을 뜻하는 말일 것이다. 헥토르에게 그것은 ‘도시의 수호자’라는 자신의 역할을 벗어나 ‘가장 강한 전사’라는 꿈을 향해 돌아서는 행위였다.
일찍 철들고 성숙한 인간 헥토르도 전사였기에 가장 강한 전사와 겨뤄보고 싶은 꿈이 있었으리라.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용기와 힘을 겨루는 자신만의 결투 말이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프리아모스의 아들, 안드로마케의 남편, 트로이의 왕자와 같은 모든 수식어를 내려놓고 인간 헥토르로 돌아와 운명을 기다렸다.
겸손과 자비를 향한 위대한 울음
헥토르는 그렇게 자신의 마지막 과제를 완수하고 죽었다. 그리고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의 장례를 치렀다. 하지만 그의 슬픔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잠도 못 자고 눈물을 흘렸고, 그러다 벌떡 일어나 헥토르의 시신을 전차에 매달아 질질 끌면서 친구의 무덤을 세 번이나 돌았다. 아킬레우스는 잔인해졌고 눈물과 슬픔에 있어서도 한계를 몰랐다. 그런 그에게 어둠을 틈타 손님이 찾아왔다.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가 아들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프리아모스는 노새가 끄는 수레에 진귀한 보물을 싣고 늙은 하인 한 명만 데리고 적진으로 들어왔다. 가족들은 모두 그것을 반대했다. 누구도 아킬레우스가 타인에게 동정심과 존경심을 보일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아킬레우스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프리아모스는 ‘아들을 잃은 불쌍한 인간’의 모습으로 ‘친구를 잃은 불쌍한 인간’을 찾아갔다. 그는 아킬레우스도 인간일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프리아모스의 이 같은 행보는 [일리아스]에서 매우 낯선 장면이다. 작품 속엔 유혈 낭자 한 경쟁과 도취된 승리만 있을 뿐 겸손과 연민은 찾아볼 수 없다. 영웅의 세계엔 전투와 경쟁, 승자와 패자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그 위대한 첫발을 떼어 아킬레우스의 막사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의 무릎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인 ‘그 무시무시한 두 손’에 입을 맞추며 청원한다.
신과 같은 아킬레우스여, 그대의 아버지를 생각하시오! 나와 동년배이며 슬픈 노령의 문턱에 서 있는 그대의 아버지를. ……. 나는 세상의 어떤 사람도 차마 하지 못한 짓을 하고 있지 않소! 내 자식들을 죽인 사람의 얼굴에 손을 내밀고 있으니 말이오.
이렇게 말하며 통곡하는 노인을 보자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떠올라 눈물을 흘렸다. 때로는 파트로클로스를 생각하며 울었다. 노인과 청년의 울음이 온 집안에 가득 찼고 마침내 아킬레우스의 마음이 움직였다.
“아아, 불쌍하신 분!”
영웅의 이 한마디는 그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영역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친구를 죽인 자의 아버지를 자기 아버지와 같은 불쌍한 노인으로 볼 수 있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울음과 함께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위대한 능력을 회복한 것이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정성스럽게 프리아모스에게 돌려준다. 그리고 어제까지는 적이었던 두 사람이 서로를 응시하며 상대의 멋진 모습에 감탄한다. 미망(迷妄)이 걷히자 신과 같이 성스러운 타인의 모습을 비로소 볼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