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의 시대, 격리된 인간을 위한 백가지 이야기
1348년 봄, 피렌체에 페스트가 퍼졌다. 오랜 기간 반복적으로 출몰하며 유럽 인구를 격감시킨 전염병이었다. 의사의 조언도 치료도 소용없었고, 검은 반점과 함께 죽음을 불러와 흑사병이라 불렸다.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1313년 ~ 1375년)의 [데카메론]은 봄을 맞은 꽃의 도시에 창궐한 검은 죽음이라는 극명한 대비 속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페스트는 그저 서막일 뿐이다. 진짜는 사랑하고 배신하고 먹고 마시고 속고 속이는 잡다한 인간군상의 웃기고 짠 내 나는 이야기들이다.
페스트, 새로운 삶의 서막
보카치오가 페스트가 돌던 피렌체를 묘사하는 방식은 비장하다. 그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참혹한 전염병을 그려낸다. 환자들은 종기나 반점이 삽시간에 온몸으로 퍼져서 죽음을 맞이했고, 병은 ‘마른 장작이나 기름종이에 불이 확 옮겨 붙듯’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그중 그가 ‘직접 목격한 사실’이라고 기록한 장면은 참으로 극적이다.
이 병으로 죽은 어느 가난뱅이의 누더기가 거리에 나뒹굴고 있었는데, 마침 그 누더기가 돼지 두 마리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놈들은 꿀꿀거리며 누더기에 코를 쑤셔 박고는 곧바로 그것을 이빨로 물고서 양쪽으로 마구 휘둘러 댔습니다. 그러더니 삽시간에 독을 쐰 듯 경련을 일으키며 그들을 그렇게 만든 누더기 위에 털썩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인간도 동물도 피해할 수 없는 병으로 인해 사람들은 기존의 관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닥치는 대로 욕망을 채우고 모든 불안과 의심을 지우기’ 위해 흥청망청 먹고 마셔 댔고, 어떤 이들은 은둔하며 외부를 잊었다. 장례 풍습도 바뀌었다. 죽은 사람을 버려두고 달아나는 사람들도 생겨났으며, 묘지가 부족해서 관도 없이 깊은 웅덩이에 시신을 함께 묻기도 했다. [데카메론]은 그렇게 관습이 무너진 혼돈의 땅, 정적이 감도는 도시에서 시작된 새로운 세상이다.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취하는 것이 모두에게 명예로운 것이 아닐까요? (…) 이 지역에서 빠져나가 이성의 경계를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기쁨과 즐거움, 쾌락을 맛보자는 것이지요.”
스무 살 남짓 된 일곱 명의 여인들이 한 성당에서 우연히 만나 죽음의 도시를 떠나기로 결정한다. 그녀들에겐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명예이고, 이성의 범위 내에서 기쁨과 쾌락을 즐기는 것이 윤리이다. 그곳엔 당연히 젊고 기품 있는 남자도 필요하다. 마침 스물다섯 쯤 되는 세 명의 청년들이 성당에 들어선다. 그들은 전염병과 친지를 잃은 아픔 속에서도 기죽지 않았던 쾌활한 젊은이들로서 “엄청난 혼란을 치유할 최적의 방법은 연인을 찾아 나서는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렇게 재난 속에서도 즐거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열 명의 청춘들은 간단한 준비를 마치고 교외로 떠난다. 오로지 자신들이 꿈꾸었던 방식대로 살 수 있는 여정은 그렇게 페스트라는 파국을 통해 찾아왔다.
아무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새로운 공동체
교외의 별장에 모인 젊은이들은 시간에 맞춰 식사를 하고, 낮 동안 각자 자유롭게 하고 싶을 일을 하고 저녁이 되면 함께 모여 이야기판을 벌인다. 그들은 하루 씩 돌아가며 그날의 왕이 되어 하루를 이끌고, 이야기 주제를 정한다. 나이와 성별에 무관하게 평등한 그들의 작은 사회는 가히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열흘 동안 열 명이 돌아가면서 한 이야기 100개의 모음집이 [데카메론]이다.
이야기들의 면면은 참으로 다양하다. 의로운 사람의 이야기도 있고, 연인들의 목숨을 건 사랑도 있고, 미천한 사람들의 유쾌한 기지를 보여주는 일화도 있다. 그중 가장 많은 이야기는 단연 성聖과 속俗이 뒤엉켜 있는 이야기들이다. 예를 들면 이러하다.
마세토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신성하기로 유명한 한 수녀원에 정원사로 일하다 고향에 돌아온 사람을 통해 그곳 수녀들이 얼마나 정원사를 괴롭혔는지 듣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그 수녀원의 정원사가 되고 싶었다. 수녀들의 히스테리가 억눌린 성性 에너지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서 그녀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 한데 유난히 잘생긴 외모가 문제였다. 금남의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거짓말이 필요했다.
그는 남루한 차림으로 도끼 한 자루를 들고 수녀원에 찾아가 바보 벙어리 행세를 했다. 그의 작전은 성공했고 수녀원의 너른 정원은 그의 일터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젊고 잘생긴 정원사가 대담한 어린 수녀의 눈에 들어왔다. 동료 수녀는 신에게 바친 순결 서약을 지켜야 한다고 말렸지만 대담한 어린 수녀의 논리는 명쾌했다.
“생각해 봐. 우린 긴 세월 동안 많은 맹세들을 했어. 그리고 무엇 하나 완벽하게 지키지 않았잖아? 그리고 우리가 지키지 못한다 해도 하느님께서는 얼마든지 다른 여자를 찾으실 거야.”
그렇게 대담한 수녀는 마세토를 꾀어 헛간으로 들어가 쾌락을 즐겼고 그녀의 동료도 가세했다. 그렇게 세 사람만의 밀애가 이어지던 어느 날, 다른 수녀가 창문으로 헛간을 들락거리는 그들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처음엔 원장 수녀에게 보고를 할까 했으나 생각을 바꿔 자신도 그 비밀스러운 쾌락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렇게 소문은 퍼져 모태 솔로인 수녀원장만 빼고 8명의 수녀 모두가 마세토와 즐거움을 나누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원장 수녀에게도 빛나는 오후가 찾아왔다. 여름 한낮에 밤일로 지쳐있던 마세토가 정원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수녀원장은 아름다운 청년의 몸에 매료되었고 그를 깨워 자기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여러 날 동안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자 수녀들이 “정원사가 밭일을 해주지 않는다”라고 요란스레 불만을 쏟아냈다. 수녀원장은 어쩔 수 없이 정원사를 내어주었지만 틈만 나면 그를 다시 불렀고 급기야 건강한 청년이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마세토는 수녀원장과 함께 있을 때 이렇게 말했다.
“원장님! 제가 듣기로 암탉 열 마리에 수탉 한 마리는 괜찮지만 열 남자가 한 여자를 만족시키기는 힘들다고 해요. 그런데 전 지금 아홉 명을 감당하고 있거든요.” (…)
“이게 무슨 일이야! 네가 벙어리라고 알고 있었는데?”
“(…) 하느님의 은총으로 오늘 밤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원장 수녀는 그의 말을 믿기로 했다. 수녀들을 모아 마세토가 입을 열게 된 것이 그녀들의 기도와 수호성인의 보살핌 때문이라고 합의를 보았다. 적당한 규칙을 정해 마세토가 무리하지 않게 배려도 해 주었다. 그 덕에 마세토는 건강하고 즐겁게 수녀원에서 오래오래 살면서 “자식을 키우는 수고와 비용도 치르지 않은 채” 수많은 어린 수녀와 수도사들의 아버지가 되었다. 신을 향한 순결 서약은 깨어지고 수녀원은 이상한 가족 공동체가 되어버렸다.
보카치오의 변론 – 이야기가 나를 살렸습니다
마세토가 수녀원에 간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이야기꾼은 이렇게 말했다.
여자가 흰 두건을 쓰고 검은 옷만 입으면 그것으로 (…) 여성으로서의 욕구가 사라진다고 믿는 우둔한 자들이 세상에 많습니다. (…) 자기들은 별의별 짓을 다하면서도 권태나 고독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기 때문이죠.
담장 밖에선 성역으로 보이지만 그 안은 쾌락의 천국인 공간. 이는 여러 가지 이유로 집에서 딸을 수녀원에 보내 놓고 순결을 강요하던 사회에 대한 비밀스러운 반항이었다.
[데카메론]에는 이렇게 반항심과 똘기로 뭉친 인물들의 이야기가 가득 담겨있다.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자유롭고자 하는 본능이었다. 자신의 본능에 솔직하고, 즐겁게 연애를 하고, 세상을 속이며 유쾌하게 살아가다 때론 목숨을 걸고 복수를 하는 사람들. 그들은 부패한 교회, 무능하고 권위적인 남편, 딸을 소유물로 보는 아버지, 주제 파악 못하는 허풍쟁이를 패배자나 우스갯거리로 만든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 속에 하도 속된 이야기가 많다 보니 보카치오는 사회적으로 비난을 많이 받았다. 때문에 그는 책 속에서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자기 사연을 들려준다. 자신이 젊어서 사랑의 열병을 앓았는데 많은 이들의 방문과 위로, 그들이 들려준 재미난 이야기 덕에 살아났는 것이다. 이야기 덕에 나았으니 자신도 이야기로 그들에게 보답하고 싶다고. 그래서 [데카메론]을 썼노라고.
특히 그는 규방에 갇혀 지내는 여인들을 자신의 독자로 호출한다. 사회적 약자, 원치 않는데 격리된 여인들에게 일탈과 반항, 복수의 사례집을 건넨 셈이다. 식욕과 애욕으로 각성하고 똘기와 재치로 현실을 뒤집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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